2020. 2. 29. 15:3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11월 25일 마음의 불씨
부처님께는 세 가지의 덕이 있다고 이야기하죠.
첫 번째는 대서원의 덕이 있고, 두 번째는 대자비의 덕이 있고, 세번째는 대지혜의 덕이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께는 서원과 자비와 지혜의 덕이 있다는 거죠.
부처님의 대서원의 덕은 부처님께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서원의 덕이예요. 그게 대서원의 덕이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탄생게에서는 '삼계에 모든 중생을 내가 마땅히 다 구원해서 편안케 하리라'하겠다고 하는 탄생게의 서원이 있는 거죠.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이 없었으면, 내가 이 땅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어요. 이것을 부처님의 대서원의 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자비의 덕이죠. 부처님께서는 자애심이 있으시고, 아파하는 마음이 있고, 공유하는 마음이 있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고, 차별없는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대자비의 덕이라는 거죠.
또 하나는 부처님에게는 대지혜의 덕이 있다는 거예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가운데에 언제나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지혜의 덕이 없으면, 아픈 사람을 보더라도 아파할 수 없고, 신음 소리를 듣더라고 거기에 공감할 수 없고, 기쁜 것을 보더라도 느낄 수가 없고,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서원과 대자비와 대지혜의 덕이 있다는 거죠. 이 세 가지의 덕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거예요. 부처님이기 때문에 세 가지 덕이 있는 게 아니라, 이 세 가지의 덕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불교이서는 일관되게 이 세 가지의 덕을 강조하죠. 서원과 자비와 지혜. 이 세 가지를 불교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부처님의 덕이기 때문이예요. 부처님의 이 덕이 없으면 우리는 부처님과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부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세 가지 덕 때문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일관되게 이거를 강조하는 거죠.
아쉽게도 지금의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의 덕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서원을 이야기하지만 서원의 행이 없고, 자비를 이야기하지만 자비의 행이 없고, 지혜를 얘기하지만 지혜의 행이 없다는 거죠. 단지 말은 있는데, 거기에 행이 없다는 거죠. 서원과 자비와 지혜가 박제화되어 버린 거죠. 박제화되어서 생명력을 갖지 못하게 된 거죠.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마음 속에 불씨가 없기 때문이예요. 마음의 불씨가 있어야 서원이 일어나고, 마음의 불씨가 있어야 자비가 일어나고, 마음의 불씨가 있어야 지혜가 일어나고, 마음의 불씨가 있어야 그 일어난 것이 행으로다 옮겨지는데, 마음의 불씨가 없어서 마치 찬 재처럼 어떤 온기도 없으니, 어떻게 서원과 자비와 지혜가 이 땅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불타 오를 수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무량심을 가지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무량심을 가지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무량심은 바로 우리의 마음의 불씨걸랑요. 불씨가 없으면 불타오르지 않죠. 중국의 어느 선사는 이런 말씀을 했죠. 작은 불씨가 한 마을 태우고, 온 산하를 다 불태운다고 그랬어요. 작은 불씨가 보잘 것 없지만, 그 불씨가 마을도 태우고 온 산하를 다 태워버린다는 거죠. 마음 속에 불씨가 없으면 어떻게 서원과 자비와 지혜가 불 붙을 수 있겠어요? 불씨가 없는데 어떻게 나무에 불을 붙일 수 있겠는가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죠. '불은 나무에서 일어나지만, 그 나무를 태운다' 그랬어요. 불이라는 것은 나무에서 일어나죠. 나무에서 일어나서 그 나무를 태우죠.
마음의 불씨는 내 삶의 행복을 불태워 주죠. 마음 속에 불씨가 없으면 열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정이 없으면그 어떠한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죠. 많은 분들이 이 시대의 양극화를 걱정하죠. 양극화가 이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과거에도 양극화는 있었고, 미래에도 양극화는 있을 거예요.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양극화가 없은 적이 없죠. 그런데 그 양극화가, 그 간극이 메워지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무량심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우리 마음 속에 무량심이 부족한 것은 내 마음 속에 불씨가 타오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내 마음 속의 불씨가 활활 타올라야 되거든요.
부처님께서 왜 자비를 이야기 하셨겠어요? 부처님께서 왜 서원을 이야기 하셨겠어요? 왜 부처님께서 지혜를 이야기 하셨겠어요? 다 그것을 강조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예요. 처음부터 서원을 가진 사람이 없고, 처음부터 자비을 가진 사람이 없고, 처음부터 지혜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혜롭고, 태어날 때부터 서원이 넘쳐나고, 태어날 때부터 자비심이 충만해 있는 사람은 없죠. 끊임없이 마음 속에 불씨를 피워올리기 때문에, 그 서원이 충만해지고, 그 자비와 지혜가 갖추어지는 거죠.
우리가 부처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부처님의 세 가지 덕입니다. 나는 누군가를 닮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세 가지 덕은 배우면 배울수록 좋고, 닮으면 닮을수록 좋습니다. 내가 대서원을 갖고, 내가 대자비를 갖고, 내가 대지혜를 갖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내 행복을 위해서 대서원을 갖고, 대자비를 갖고, 대지혜를 가져야죠.
사실 부처님은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어요. 많은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었던 거고. 왜 많은 말씀을 할 필요가 없냐면, 말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니까요. 불을 말해도 입에 불이 붙지 않고, 물을 말해도 갈증이 풀어지지 않는 거와 같죠. 말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죠.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중국의 선사 백운 수단(白雲守端)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행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느니만 못 하다' 말을 해 놓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거예요. 말을 했으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자는 거죠. 실천을 해야 된다는 거죠. 아무리 말이 옳다 하더라도 그 실천이 옳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실천이 쉽게 옮겨지지 않는 것은 내 마음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속의 불씨가 약하기 때문이죠. 그러기 때문에 대서원을 세우라고 이야기 하셨죠. 큰 서원을 세워라! 네가 큰 서원을 세우고, 그 큰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 부지런히 부단한 노력을 하고.
아무 목표점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죠. 서원은 목표점과 같습니다. 서원이 나를 성취시켜 주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대서원을 가지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일체 중생에 대해서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라 하셨고, 그걸 강조한 이유가 거기에 있죠. 서원과 지혜와 자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대서원이 있는 사람은 대자비가 있고, 대자비가 있는 사람은 대지혜가 있게 마련이죠. 지혜로운 사람이 자비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크나 큰 서원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의 덕을 배우고, 익히고, 숙달시키라는 거예요. 서원과 자비와 지혜를 배우고, 그리고 그것을 익히고, 그리고 그것을 숙달시키라는 거예요.
세상은 그 어느 것도 내가 하지 않는 한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오직 나의 힘으로 얻은 것만이 내꺼죠. 누군가가 가져다 주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만이 내 것이죠. 행복이라는 것이 뭔가요?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요? 옆에 사람이 아무리 '너 행복하지!' 강조해 줘도, 내가 정말 행복한가요?
어떤 분이 지리산의 도가 높은 분한테 깨달음을 얻었다는 인가를 받고 그 지리산을 구름위를 걷듯이 내려왔다는 거죠. 집에들어가니까, 남편이 거기서 뭐했느냐고 묻더라는 거죠. 그래서 인가를 받았다고 그랬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인가를 받기 위해서 소정의 액수를 그 분께 허~~~언납을 했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남편이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면서, '이여자가 미첬나? 니 미쳤째?' 그 한 소리에 그 구름이 걷히고, 진눈깨비가 내리더라는 거죠. 깨달음을 인가받고 지리산에서 내려올 때는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것과 같았었는데, 현실의 경계에서 그것이 다 무산되어 버린거죠. 왜 그럴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누가 인증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겠죠. '나, 지금 행복한거니?' '나 행복한거 맞지?' 라고 묻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히 자기 자신이 느끼는 거죠. 행복이라는 것은 내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거예요. 내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서 타오른 건 아니라는 얘기예요. 온 천지가 다 행복하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 행복이 없으면, 그것은 나의 행복이 아니죠. 행복이라는 것은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거죠. 내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거죠.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진정으로 덜 행복한 이유는 내 마음 속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속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는 이유는 서원과 집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고, 숙달시켜야 됩니다.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행복했던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것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거죠. 마음 속의 불씨를 일으켜셔야 됩니다. 마음 속의 불씨를 일으키면, 자연히 나 자신의 행복은 충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세 가지 덕을 갖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세 가지의 덕을 갖추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래서 그렇습니다. 한 겨울에 방 안에 있는 화로를 헤집어 보세요? 얼마나 따뜻한가를! 요새는 집안에 화로가 없죠. 옛날에는 다 화로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굉장히 춥죠. 그 화로를 헤집고, 그 위에 김치를 놓고 그 위에 밥을 얹어 놓으면, 따끈한 김치 볶음밥이 되죠. 화로를 끼고 앉아서 그걸 먹고 있으면, 그 어떠한 음식보다도 맛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행복보다도 더한 행복이 없죠. 그것은 화로가 있어서 가능한 거죠. 그것은, 그 어떤 열기구도 그것을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내가 화로를 얘기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따뜻한 불씨가 마치 화로와 같다는 얘기예요.
오늘의 주제는 '마음의 불씨'입니다. 마음의 불씨를 태우십시요. 마음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시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가 느낄 수 있고, 내가 알 수 있고, 내가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함께 기도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다 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오늘도 저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이 성전에 모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서원과 대자비와 대지혜의 세 가지의 덕을 갖추시고 계십니다. 저희들도 부처님처럼 세 가지의 덕을 배우고, 세 가지의 덕을 익히고, 세 가지의 덕을 숙달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노력하는 제 삶에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오며, 저희 가족과 저희 이웃에게도 부처님의 자비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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