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악마 배웅하기|…… 혜천스님설교

2020. 3. 21. 15: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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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알 參謁-새로 부임한 관리가 그 지역의 유지나 기존 관리들을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혹 이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실지 모르겠습니다.
스님께 여쭤 봣더니, 친견 또는 임금을 뵙는 알현 등의 단어가 마땅치 않아 參謁이라고 새단어를 조어했다고 합니다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12월30 


내 마음의 악마 배웅하기

 

 

앞으로 오세요, 앞으로. 거긴 등이 시리다고, 등이. 앞으로 오세요, 앞으로. 앞으로 와야 등이 안 시렵지. 오늘 주제는 마음의 악마 배웅하기입니다. 마음의 악마 배웅하기. '내 마음의 악마 배웅하기'

 


라자가하의 비극

 

불교의 개교에 가장 공헌한 사람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마가다의 국왕이었던 빔비사라라고 하는 왕을 꼽지 않을 수 없죠.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직후, 35세의 청년 붓다를, 그 당시는 고타마 싯타르타죠. 고타마 싯타르타를 구원자 붓다로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러고 붓다 앞에 신앙 고백을 하죠. 자기에게는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노라고. 그러면서 그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그는 붓다 앞에서 고백을 하죠. 최초의 정사 베르바나(Venuvana Vihar 베누바나 비하라: 죽림정사)를 세웠고, 그는 누구보다도 붓다의 가르침에 헌신적이었어요. 그러나 그의 노후는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답지 못했죠. 아들에게 왕위는 찬탈되었고, 아들에 의해서 유폐되어서, 그는 굶어 죽었죠. 이 사건을 불교에서는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의 비극'라고 이야기 하죠.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아사세는 왕으로서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코살라를 침공해서 병합시켰고, 강력했던 밧찌 연합국을 멸망시켜서 통합시켰죠. 아사세는 동인도 전역을 석권해서, 우리가 말하는 마가다 제국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사세에게는 씻지 못할, 아무리 본인의 성공가도와 반비례해서 씻지 못할 원죄가 있었죠. 그것은 아부지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고, 아버지를 유폐시켜서 굶어 죽게 했다는 거죠. 아사세는 그것 때문에 항상 괴로워했다고 하죠. 그런 모습을 본 의사였던 지바카는 아사세에게 붓다를 참알(參謁)할 것을 권하죠.

 


참괴심(慙愧心)으로 용서받은 아사세

 

라자가하의 비극이 있고, 아마 세월은 여러 해가 지났겠죠. 아사세는 선뜻 베르바나에 가서 붓다를 참알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베르바나에 가서 붓다를 참알하죠. 붓다는 아사세를 용서합니다. 왜 붓다께서 아사세를 용서했을까요? 빔비사라왕을 유폐시켜서 굶어 죽게 했던 아사세를 왜 붓다는 용서를 했을까요? 붓다가 아사세를 용서했던 것은 아사세가 깊은 참괴심(慙愧心)을 보였기 때문이예요.

 


붓다는 인간이 가져야될 근본적인 것으로서 참괴심을 이야기하죠. 참괴심이라고 하는 것은 참회하는 마음이고, 회개하는 마음이죠. 그리고 반성과 성찰이죠. 붓다는 참괴라는 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될 첫 번째 덕성이라는 거예요. 참괴심은 배려가 되죠. 참괴심은 양심이 되고, 참괴심은 윤리가 되죠. 참괴심은 도덕이죠. 참괴심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죠.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고, 구별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점은 참괴심이 있느냐 없느냐죠. 참괴심이 없다면 설사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이 아니죠.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사람의 형상을 한 물체를 우리는 인형이라고 부르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인형이라고 부르죠. 참괴심이 없으면, 설사 사람의 형상을 하고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이 아니죠.

 

마음이 악마 

 

어느 날 비구 라다는 붓다에게 질문을 하죠. "세존이시여! 마라, 마라 하는데 마라란 무엇입니까?" 마라는 악마를 말하죠. 도대체 악마, 악마 하는데, 악마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때 붓다는 이렇게 이야기 하죠. "라다여! 마음이 악마다." 왜 붓다가 마음이 악마라고 했을까요? 내 마음 속에 참괴심이 없다면 악마와 다를 게 없다는 거죠. 악마가 악마인 이유는 참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참괴심이 없습니다. 참괴심이 없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면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죠. 내 마음 속에 참괴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 거리낌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라다의 질문에 마음이 악마라고 했던 겁니다.

 


우리는 참괴심이 부족하죠. 참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 악마를 키우죠. 악마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적개심과 증오와 미움이 가득하다면, 그것이 악마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사람보다 무서운 건 없죠. 산 속에서 살면서 동물이 무서을 것 같지만, 동물은 무섭지 않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호환보다 무서운 것은 포악한 관리의 학정이라고 이야기 하죠. 차라리 호랑이면 탐관오리보다 그 해악이 적다는 거죠. 이 세상에 사람보다 무서운 건 없습니다.

 

참괴심은 인간의 첫 번째 덕성

 


물론 이 세상에 사람보다 아름답고 귀한 존재도 없죠. 우리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고 하는 말을 쓰죠. 내 마음에 참괴심이 없으면 인면수심이 되죠. 지난 주에 나는 거대한 지네 이야기를 했죠. 악마와 지네가 다른 게 아니죠. 지네가 뿜어내는 독은 살상의 독이죠. 모든 것을 해치니까요. 그러나 지네와 맞서서 싸웠던 두꺼비의 독은 치유의 독입니다. 같은 독이라도 다르죠. 지네는 살상의 독을 뿜고, 두꺼비는 치유의 독을 뿜죠.

 


붓다가 참괴심을 인간이 갖추어야할 첫 번째 덕성으로 꼽은 이유는 거기에 있죠. 참괴심은 우리의 악마를 내 마음에서 떠나가게 하죠. 참괴심은 내 양심입니다. 참괴심은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참괴심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이고 도덕입니다. 참괴심이 없으면 우리는 타인을 배려할 수가 없습니다. 아사세가 권력에 눈이 멀어서 아버지 왕위를 찬탈하고, 아버지를 유폐시켜서 굶어 죽게했던 것은 그가 참괴심이 부족했던 것 때문이죠. 만약에 아사세가 참괴심이 있었더라면, 그와 같은 짓은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아사세는 그것을 깊이 참괴했습니다. 참괴했기 때문에 붓다가 용서한거죠.

 


용서는 자애심으로

 

나는 용서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붓다가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느냐면, 우리의 마음은 자애심으로 충만해 있지 않기 때문이죠. 용서할려면 자애심이 충만해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자애심이 충만해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의 악마는 자애심을 가장 두려워 하죠. 악마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자애심이죠. 자애심은 참괴심을 자양으로 해서 자라니까요. 참괴심이 없으면 자애심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괴심은 자애심을 싹트게 하고, 그 자애심을 키우죠.

 


내 마음의 악마를 몰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요! 내 마음의 악마를 쫒아내려고 하지도 마십시요. 내 마음의 악마가 떠나갈 수 있도록 배웅해 주십시요. 내 마음의 악마를 키운 것은 내 자신이지 악마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미움과 원망과 적개심 속에서 살았습니다. 미움과 원망과 적개심이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모든 것을 세상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내 부모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내 자식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내 남편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내 아내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부처님 탓으로 돌리고.

 

탓하지도 싸우지도 마시압

 


탓하지 마십시요. 탓하면 탓할수록 내 마음의 악마는 힘을 얻죠. 그리고 기뻐서 웃죠. 우리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을 위해서 살지, 싸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죠. 근데 우리는 싸우려고만 하죠. 타인과 싸우려고 하고, 자기 자신과 싸우려고 하죠. 어떤 때는 세상 탓이라고 해서 세상과 싸우려고 하고, 어떤 때는 내가 못나서라고 하여 나와 싸우려고 하죠.

 


싸우지 마세요! 이 세상에는 싸워야할 적은 없습니다. 정말 싸워야할 적이 있다면,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기 자신을 탓하는 마음이겠죠. 싸움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싸우면 싸울수록 승자는 존재하지 않죠. 전장에는 오직 패자만 있을 뿐이죠. 왜 전장에는 패자만 있을까요? 전장에서는 승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적의 목을 베어서 그의 수급을 말꼬리에 달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수급을 베었다면, 그의 가족은 그를 증오할 것이고, 그가 불행해지기를 원하겠죠.

 


내 마음의 악마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뻐하니까요. 그것을 누구보다도 바라죠. 내 마음에서 악마를 배웅해줘야 됩니다. 내 마음의 악마는 참괴심을 가진 사람을 가장 두려워 하죠. 악마는 밝은 태양 아래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죠. 악마가 존재하는 곳은 음습한 어두움이죠. 미움과 증오와 원망은 악마가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죠. 참괴심은 그 곳에 밝은 태양을 비추는 거와 같습니다. 붓다가 왜 참괴심을 강조했는가를 우리는 다시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죠. 48%의 사람들이 멘붕에 빠져서 <레 미제라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죠. 51%는 기뻐서 날뛰죠. 이것이 어찌 행복을 지향하는 인간의 모습이겠어요.

 


행복과 안락을 위해-악마를 배웅하자

 

이 세상에는 하나만 존재하죠. 그것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모두가 마음 속에 참괴심이 있을 때만이 가능해지죠. 참괴심이 없으면 내 마음에 독버섯이 자라서, 그 독버섯이 독기를 뿜죠. 가장 먼저 나를 죽일 것이고, 그 다음에 내 옆에 사람을 죽이겠죠.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하고 안락하라고 하셨죠. 행복하고 안락하려면 내 마음 속의 악마를 배웅해 줘야 됩니다.

 

'안녕히 가십시요, 이 곳에는 그대가 머물 곳이 아닙니다. 그대가 머물 곳은 증오와 원망과 적개심이 가득한 어둠의 세계, 당신이 머물 곳은 바로 그 곳입니다.안녕히 가십시요. 나는 오늘 당신을 배웅하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라고 배웅을 해줘야 되겠죠.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의 비극의 연출자이자 주연인 아사세를 용서했습니다. 아사세를 용서했던 것은 아까도 언급했듯이 그가 깊은 참괴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참괴심을 떠나서는 윤리 도덕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참괴심을 떠나서는 양심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참괴심을 떠나서는 정의를 이야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세계가 정의롭지 않은 것은 마음의 참괴심이 부족한 사람들이 입으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마음의 참괴심이 없는데, 어떻게 정의로울 수가 있겠어요.

 


붓다는 중도를 설했어요. 중도는 옳은 길이라고 하는 뜻이죠. 옳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옳으려면 참괴심이 있어야만이 옳습니다. 참괴심이 없으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죠. 정의를 행한다고 수없는 사람들이 나섰지만, 그 정의 끝에는 피바람이 불었죠. 왜 그럴까요? 정의의 칼을 든 사람이 참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참괴심은 자신에 대한 반성이며, 자신에 대한 성찰이니까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죠. 자기에 대한 반성과 자기에 대한 성찰이 없는데, 무슨 깨달음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떠한 행복이 다가올 수 있겠는가요?

 


우리가 백년을 산다 하더라도, 행복하지 않다면, 백년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에 불과할 것이죠. 하루를 산다 하더라도 행복하다며는 그 행복은 백년의 시간을 뛰어 넘죠.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내 마음의 참괴심이 그 독성으로서 자리잡고 있어야 됩니다.

 

참괴심을 회복해야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이 참괴심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죠. 어쩌면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죠. 아무도 참괴심을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올 한 해도 예년의 해와 다름없이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있죠. 올 한 해에 우리가 얻어야될 수확으로다는 행복이어야 되죠. 그 행복은 참괴심이 가져다 줍니다. 오늘부터는 내 마음의 악마를 배웅하고, 내 마음의 성자로서 사십시요.

 


성자와 악마는 동체입니다. 악마가 따로 존재하고, 성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마와 성자는 동일체입니다. 악마를 전송하면, 악마를 배웅하면 내 마음에는 성자만이 존재할 것이고, 내가 성자를 배웅하면 내 마음에 악마만이 존재하겠죠. 태어날 때부터 성자는 없고, 태어날 때부터 악마는 없습니다. 이제 나와 함께 내 인생의 동반자였던 악마는 오늘로서 배웅하십시요. 그저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 배웅하십시요. 악마를 배웅하면 나는 행복합니다.오늘은 여기까집니다.


 

기도

 

오늘 누가 송년법회의 기도를 좀 이끌어 주실까요? 아아! 오늘 기도를 이끌어 주실 분이 없나? 다함께 기도하시죠. 합장하시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저희들은 올 1년 한 해도 악마와 함께 동거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비극의 주인공 아사세를 용서했듯이

저희 또한 저희 마음의 악마를 배웅합니다.

오늘부터 저희는 성자로서 성자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와 저희 가족과 그리고 저희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