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심과 도심

2007. 6. 9. 15: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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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보는 마음이 미심이다. 예전엔 하늘에서 용이 비를 내린다 했다. 요즘엔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하늘엔 비가 없다 한다. 완전히 다르다. 여기까진 상식이다. 하지만 비가 땅에서 오는 것인가? 불교는 비는 너의 마음이라 말한다. 모두 마음이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네 마음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것이 법문이다.

 

법문은 지혜의 세계로 인도하는 문이다. 글 문이 아니다. 그래서 법문이다. 마음 밖에 비오고 빗소리 듣는 것은 중생들 생각이다. 미심이다. 미심을 도심으로 인도하는 말씀이 법문이다. 현상을 늘 자기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넘어야 할 관문이다. 연못의 달을 보고 들어가 찾지만 그 것은 그림자지 달이 아니다. 그림자를 달로 착각하는 것이다. 달은 하늘에 있다. 비는 땅에 있는 데 하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달은 하늘에 있는데 땅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바로 이 것이 미심이다.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인데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내가 보아서 있는 것을 전혀 모른다. 있어서 있는 것으로 안다. 이 글이 핵심이다. 보아서 있느냐 있어서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은 내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보는 것이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것만 해결되면 된다.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는다 내가 보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도 산다고 내가 보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죽고 살고 있고 없는 데서 자유로워지려면 보는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 보는 것 이 것이 번뇌다. 끊임없이 좋다 나쁘다. 어제는 좋다 보다 오늘은 나쁘다 보고 내일은 또 좋다고 본다. 전부 자기 중심으로 본다. 정신으로 보면 객관은 없다. 주관 뿐이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보는 것은 못한다. 어른은 어른 중심으로 아이는 아이 중심으로 본다. 내가 옳다 본다고 다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는 걸 진짜 있는 것으로 안다. 그 게 미심이고 중생심이다. 미심에서 벗어나는 게 도심이다.

 

공화 허공에 꽃이 보이는데 따려면 없다. 왜냐 하면 꽃은 내 눈병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내 눈병 때문에 꽃이 보이는 것이지 눈병이 없으면 안 보인다. 내가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본래 불생불멸인데 생노병사를 느낀다. 느끼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느낌은 전부 자기중심이다. 이 것들을 모른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보는대로 보이는 것이지 있는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있는대로 보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헤메게 된다. 이 걸 윤회라 한다. 집을 잃고 돌아다니는 아이와 같다. 나에게 보이는 것은 내가 만든 그림자다.

 

이 걸 확실히 아는 것이 입도다. 내가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본다. 이 것을 번뇌 윤회 고해라 한다. 도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이런 습관을 버려야 한다. 갈 때 가고 올 때 오면 된다. 근심 걱정을 내려 놓자! 평생 이익을 쫒아 살았는데 죽을 때 보니 손해만 보고 살았다 한다. 모두 허망한 짓이다. 무가애 걸릴 것이 없다. 이 세상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이 세상 좋은 것도 없다. 좋은 것도 내가 만들어서 있다. 사실 알고 보면 적도 없고 우군도 없다. 내가 적을 만들고 우군을 만든다. 내가 상대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감옥 자기 덧에 걸려 헤메는 것이다. 친한 걸 만들면 또 친하지 않은 것을 또 만들어야 한다.

 

사천왕이 든 금강저는 부수고 칼은 자르고 창은 밀어내는 것이다. 모두 집착하지 말라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이던지 일어나면 부숴라. 그래서 부처도 조사도 부수라는 것이다. 나쁜 것만 부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도 부숴라. 왜 부수냐? 이 세상 모든 건 색즉시공 색공이다. 이 잔도 흙과 물 그리고 사람 솜씨로 만든 것이다. 본래 자체가 없는 무상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느끼던지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런데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꾸 집착하고 두려워한다. 미한 마음이다. 집착과 공포의 마음을 방망이로 때려 부수라. 그 게 사천왕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마군이는 자꾸 집착하게 만든다. 꼬득이고 유혹한다. 사실은 내가 끌리는 거다. 이 세상 유혹은 없다. 자기가 넘어가 놓고 끌고 갔다 원망한다. 다 자기가 선택한 거다. 마는 미한 마음이다. 집착과 공포의 마음이 마다. 무상하니 집착할 것이 없고 자체가 없으니 집착할 것이 없다. 집착하는 마음을 때려 부수는 것이 금강 방망이다. 금강저 처럼 지혜는 써도 써도 안 없어진다.

 

누가 나를 괴로움으로 끌고 가는가? 나의 집착 애착 미련 공포가 나를 괴로움으로 끌고 간다. 하기는 자기가 해 놓고 보상은 다른 데서 받으려 한다. 그 것이 미한 마음이다. 정신이란 먼데 있는 것이 아니고 큰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밥은 내가 먹는데 자기가 왜 안달인가? 안타까워 하는 그 마음이 고통의 근원이고 마군이다. 거울에 나무 가리고 흙이 붙으면 거울 역할을 못한다.

 

사실 이 세상 애착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집착 안하고 무서워하고 걸리는 마음 그냥 부수어 버려라. 걸리지 않으면 끝난 거다. 자기 구제가 된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디로 가나? 고통과 근심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역할로 가야 한다. 그 상징이 감로수다. 관세음보살의 물병은 병보다 물에 의미가 있다. 감로수는 애착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 금강저고 자비를 상징하는 것이 감로수다. 이 세상 기쁨 주는 것보다 더한 진리는 없다. 불안을 주는 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안락이다. 행복이 뭐냐?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다. 애착과 공포가 없을 때 편안할 수 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더 높은 지위를 탐하고 아무리 힘이 있어도 더 힘센 놈이 있어 편안할 수 없다. 적이 없을 때 편안해 진다. 우리 안에 무수히 많은 적들이 있다. 편하지 못하다. 구하는 마음 두려운 마음이 없어져야 편안해진다. 허망한데 집착하지 않는 것이 지혜다. 그 반대가 번뇌다. 번뇌는 허망한데 집착하는 것이다. 지혜와 자비를 실천할 때 행복이 온다. 사는 것도 잠시 동창회 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긴 지혜의 세계에서 보면 한 평생도 알고보면 한 순간이다. 이 게 지혜다. 이 세상 적은 없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 좋은 것은 없다. 다 내가 만든 것이다. 이 게 자기를 아는 지혜의 도다.

 

감로수는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물이다. 흙탕물도 물이다. 하지만 마실 수 없다. 번뇌도 마음이다. 하지만 공포와 애착이 섞여 못 쓰는 마음이다. 감로수는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물이다. 누구에게나 좋다. 산에 있어야 할 정원수 캐다가 자기 집에 갖다 놓고 늘 쳐다보고 손질하면서 내가 얼마나 애정 갖고 정성 들이는줄 너는 아나? 한다. 물로 말하면 오염된 물이고 마음으로 말하면 번뇌의 마음이다.

 

남 돕는 것도 자기 애착으로 도우면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로운 것이다. 자기 문제 해결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자비행을 하라.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고 삶에 대한 애착이다. 애착이 있으면 공포가 생기고 두려움이 생긴다. 애착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금강경을 배우고 감로수의 자비행은 법화경 보문품을 이 둘을 합쳐 배우고 중단없이 하는 원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배워라. 많이 할 것 없다. 이 3가지만 부지런히 독송하고 마음에 새겨라.

이상 종범스님 미심과 도심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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