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당당한 사람과 늘 근심걱정 뿐인 사람(述而 편)

2007. 11. 19. 20:10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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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당당한 사람과 늘 근심걱정 뿐인 사람(述而 편)

 

 

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태백은 가히 덕이 지극하다고 이를 수 있느니라.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하였는데도 백성들은 그의 덕을 들어 칭찬함이 없구나.”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德而稱焉)


②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번거롭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남이 두렵게 여기고, 용기가 있되 예가 없으면 난폭하게 되고, 곧되 예가 없으면 박절하게 된다.

군자가 친족에게 잘 대하여주면 백성들 사이에 착함이 일어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박절하지 않게 되느니라.“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君子篤於親則興於仁 故舊不遺則民不偸)


③ 증자가 병이 위중할 때 제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 발을 펴보고 내 손을 펴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두려워하고 조심함이 깊은 못가에 있는 듯하고 살얼음을 밟는 듯하다.’하였는데 지금에 와서야 나는 그 곳에서 해방되었음을 알겠노라, 제자들아!”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④ 증자가 병이 나서 맹경자가 문병을 오니, 증자가 말하기를, “새가 죽음에 임하면 그 울음이 구슬퍼지고, 사람이 죽음에 임하면 그 말이 착하여 지는 것이오. 군자가 도를 실천하는데 귀중히 여기는 것이 세 가지 있소. 용모를 갖춤에 있어 사납고 교만함을 멀리 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는데는 신의를 가까이 할 것이요, 언사를 내는 데는 비루함과 억지 짓을  멀리 하여야 하오. 그리고 제사에 제기를 다루는 일은 그것을 맡은 사람에게 맡기면 되오.”

(曾子有疾 孟敬子問之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 籩豆之事則有司存)


⑤ 증자가 말하기를,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묻고, 문견이 많으면서도 과문한 사람에게 묻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이 하고, 실하면서도 허한 듯이 하고, 남이 나에게 침범해 와도 옳고 그름을 따져 다투지 않을 것이니, 옛날 나의 벗이 이렇게 하였느니라.”

(曾子曰 以能 問於不能 以多 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 嘗從事於斯矣)


⑥ 증자가 말하기를, “십 오륙 세 되는 고아를 의탁할 만하고, 사방 백 리 되는 나라를 맡길 만하고, 나라의 중대한 사변을 당하여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군자다운 사람이리라. 참으로 군자다운 사람이니라.”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⑦ 증자가 말하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마음이 꿋꿋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그 소임이 중대하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仁을 베푸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하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⑧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에서 일으키고, 예에서 세우며, 악에서 이루니라.”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을 따라오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느니라.”

(子曰 民 可使由之 不可使知之)


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함은 난동을 부릴 징조요, 사람이 인이 아님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동을 일으킬 징조이니라.”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강독>

지덕(至德)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사람들은 큰 덕이 알려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 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덕은 그 자신을 알리려고 하는 것,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요즘 여론의 위력은 대단하다. 인터넷 등의 발전으로 직접민주주의가 성큼 다가온 느낌마저 든다. 그런 점에서는 긍정적인 점이 있다.

정당이나 정책, 정치인에 대한 지지가 시시각각 숫자로 표현된다.

그러다보니 긍정적인 면 이외에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

인기영합주의는 그 조사 대상으로 되는 사람이나 정당, 정책, 문화 예술은 물론 국민 전반의 의식 발전에 여러 테마를 안겨주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공자의 말씀이 현대에 새롭게 다가온다.

어떻게 하면 여론이 공의(公義)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역시 진정한 덕을 갖춘 사람들이 모든 분야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를 읽으면서 사람의 성정이랄까 하는 것을 이렇게 잘 이야기할 수 있는가하는 감탄이 일어난다.

恭․愼․勇․直은 보통 좋은 덕목으로 생각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禮로써 조화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폐단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낼 수 있을까.

여기서 禮란 여러 덕목들을 제대로 나타나게 하는 그런 요소로 보인다. 보통 無禮라고 하면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할 형태로 나타나는 어떤 행동양식의 결함 같은 것을 연상하게 되지만 그 보다도 그것을 일으키는 사람의 심층의식에 어떤 치우침, 조화의 상실 등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가하고 돌아보게 된다.


‘民 可使由之 不可使知之(백성을 따르게는 할 수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다)’는 구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일견 우민정치(愚民政治)나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공자의 말씀을 그런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사람의 실태를 정확하게 통찰한 바탕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이상(理想)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어렵고  이해하도록 가르친다는 것 또한 어렵다.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억지로는 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래서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사람들을 통치의 대상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민정치나 철인정치는 서로 다름이 있지만 ‘사람들을 알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판단이 바탕이 되어 있는 점에서는 비슷하고, 둘 다 통치자의 이익이 중심으로 되기 쉽다.

우민정치가 무지를 조장해서 통치를 쉽게 하려는 쪽이라면 철인정치는 독재나 독선으로 흐르기 쉽다.

둘 다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하나는 이해하게 하는 것, 깨닫게 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그 실태에 맞게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선각자(때로는 통치자) 스스로 모범을 보여 따르게 하는 것과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싶어지는 사회적 공기를 형성하여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하나로 되는 그런 길이다.

공자의 말씀은 후자의 길이다. 이것이 덕치(德治)이며 오늘의 민주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먼저 깨달은 자에게는 패도(覇道)에 흐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잘 보면 패도(覇道)는 비록 선의(善意)로 보이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통치자의 이익을 넘어서기 힘들다.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는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어떤 길을 걷는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할 때 그 사람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서인지 물어지는 것이다. 나를 중심에 놓고 가르치는 것은 상대가 잘 따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들으려고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가르쳐서 깨닫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알게 하려고 할 때 어떤 마음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른 길일까?

공자의 말씀이 이런 점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好勇疾貧 亂也(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미워하면 난동을 일으킨다)’의 구절에서는 진정한 용기와 가난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勇은 2장의 勇而無禮則亂의 勇을 말하는 것 같다. 조화가 없는 절제되지 않는 용과 가난을 미워함이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

또 하나는 가난에 대한 태도인데,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공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貧이나 富를 최고의 가치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는 좋은 것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仁이고 道이고 義인 것이다.

부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이다.

貧을 미워하는 것과 無禮한 勇이 결합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 아니다.

貧을 미워하면 富를 미워하게 된다. 이 미움이 바탕이 되어서 일어나는 亂은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 모든 변혁의 역사 속에서 성찰되어야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어질지 않은 사람을 너무 미워함도 난을 일으킨다)’는 구절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그 동안의 여러 변혁 운동들을 생각하게 한다.

 잘못된 일이나 사람을 볼 때 그것을 고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을 고쳐 仁義를 실현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 不仁에 대한 미움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이 것이야 말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나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핵심적인 테마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미움은 인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셨다.

인류는 오랜 동안의 역사를 통해 점차 이런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 증오나 분노가 바탕이 되는 변혁은 결국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仁義를 실현하려는 에너지와 분노나 미움의 에너지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하였다고 생각한다.

절대적 가난, 공공연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이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할 지에 대해 과거 성현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이치를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불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는 인을 실현해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 그런 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포지티브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