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성인(聖人)이 권하는 '진정성' (제 7편 술이)

2007. 11. 14. 21:26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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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성인(聖人)이 권하는 '진정성' (제 7편 술이)

 

 

⑯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앞으로 몇 년 더 나이를 먹어 쉰 살까지 주역을 습득하게 된다면 큰 잘못은 없으리라.”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⑰ 공자께서 늘 하신 말씀은 시경, 서경 그리고 예를 지키는 것 등이었다.

(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


⑱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을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했다. 공자께서 자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왜 말하지 못했는가? 그 사람됨이 학문을 좋아하여 발분하면 밥 먹기도 잊어버리고, 안 뒤에는 즐거워서 근심을 잊어버리며 늙어 가는 것조차 알지 못 한다고.”

(葉公 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⑲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배워 아는 사람이니라.”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⑳ 공자께서는 괴이한 것, 완력으로 하는 것, 어지러운 것, 그리고 귀신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子不語怪力亂神)


(21)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내 스승될 만한 사람이 있느니라. 그 좋은 점을 골라서 따르고, 좋지 못한 것을 거울 삼아 고칠 것이니라.”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22)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내게 덕을 내리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 하리요.”

(子曰 天生德語予 桓魋其如予 何)


(23)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숨김이 없노라. 나는 행함에 있어 너희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이니라.”

(子曰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24) 공자께서는 네 가지로 가르치시니, 문(文)과 행(行)과 충(忠)과 신(信)이니라.    

 (子以四敎 文行忠信)


 

 


<강독>

 

이 장들에서도 공자의 호학(好學)하는 마음이 잘 들어 난다. 나이 들어서도 쉼이 없는 배움에 대한 열의는 그의 끝없는 진리 탐구의 열정을 느끼게 한다. 주역(周易)에 대한 말씀이나 스스로 그를 평하여 발분망식(發憤忘食) 낙이망우(樂而忘憂) 부지노지장지운이(不知老之將至云爾) 등으로 말씀한 것이 그러하다.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배워 아는 사람’이라는 말씀 또한 그의 마음가짐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대단히 과학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어떤 성인보다도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부정이나 긍정 없이 모르는 그대로 놓아 두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사람들은 성인에게 이적(異蹟)을 기대하거나 신(神)과 같은 보통 사람이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종교의 창시자와는 다름이 있다.

이 다름을 약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현대 사회에서 공자가 잘 살려질 수 있는 장점으로 되는 것은 아닐까.

당시의 사람들, 보통의 사람들의 기대에 비추어 보면 공자가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감추고 있는 것이 없는가 의문을 가졌음직도 하다. 공자는 이런 생각에 대해 명쾌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숨김이 없노라. 나는 행함에 있어 그대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이다.’라고.

力과 亂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공자의 평화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인간의 진화와 인간 본연의 지향에 대한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신뢰는 자신의 생사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는데, 환태가 나를 어찌 하리요’(환태라는 사람이 나무를 뽑아 공자를 압사시키려고 하니까 제자들이 빨리 그 곳을 피하기를 권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이 있다’라는 말씀은 요즘 특히 음미해야 할 말이다.

요즘 ‘진정으로 배울 만한 스승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공자의 시대는 스승이 많았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스승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 그 자신의 태도가 다른 것이다.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아집에서 자유로우면 모두가 스승이 된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잘못된 것은 잘못된 대로.

좋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것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게 된다.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상대를 고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그 좋지 않은 요소를 고치려 하는 것이다. 보통은 자기를 고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고치려 한다. 이렇게 하면 무리가 생긴다. 많은 경우 자신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을 때 상대의 좋지 않은 면이 보여 온다. 이런 상태에서 상대를 고치려 하면 역효과가 생길 뿐이다. 먼저 자신을 변화시킨 후라야 상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고치는 것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24장의 공자의 사교(四敎)는 오늘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예나 지금이나 참된 인간의 변함 없는 목표이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충(忠)과 신(信)이다.

충(忠)이라는 한자(漢字)를 풀어보면 中心이 합쳐진 것이다. 한자(漢字)를 잘 모르니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사람의 마음에 中心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가장 중시하는 것이냐와 직결되는 것이다. 과거에 국가나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주로 쓰다 보니 충(忠)이라 하면 현대인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충(忠)의 의미를 과거의 사회제도나 관념과 결부시키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개인이기주의가 발달하다 보니까 중심을 ‘자신의 이익’이라는 바탕에 세우려 한다. ‘자신의 이익’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익’이라는 것은 수시로 변한다. 따라서 여기에 중심을 세우려 하면 중심이 잘 서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중심을 세우려 한다.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이 서질 않는다. 결국 忠이 사라지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는 가치를 받아들일 때 중심이 세워진다.  무엇인가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는 가치를 가진 사람들만이 자기의 생명까지도 걸고 忠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대상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을지라도 그 마음의 작용은 시대를 초월하여 공통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忠의 대상은 진리라고 생각한다.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결국 모두(자연과 인간)의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닐까.

현대에 올수록 忠의 의미가 바르게 살려질 수 있고, 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忠이 없으면 信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자신의 중심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는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信이 생기기 어려운 것이다.

자기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곳에는 오직 정글의 법칙이 지배할 뿐, 진정한 인간의 신의는 이루어지기 힘 든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주위가 행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궁극적인 이익은 모두가 행복해 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忠과 信이 현대에서 더욱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화>

 

A;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진리를 알았다’는 식의 사고는 공자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주역을 배우게 되면 큰 잘못은 없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 데서 겸허함이 느껴져요.

 

B; ‘즐거워서 근심을 잊는다(樂而忘憂)’는 글을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저는 근심하느라고 즐거움을 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웃음)

 

C;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가 행복해 지는 것이라면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근심보다는 낙관적 공기가 감돌아야 할 것 같아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 같구요.   

 

D; 공자의 ‘나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배워 아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감동으로 다가와요. 저 자신 이건 ‘ 내 생각’인데 하면서 뭔가 자기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E; 공자께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보면서 ‘종교’에 대해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은 미지(未知)의 것에 대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걸출한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능력이 있지요. 이런 분들이 역사상 성인(聖人)으로 일컬어 진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능력은 그가 아집(我執)에서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닐까요. 사람들에게는 그 능력이 크게 보이지만 오히려 능력은 부산물(副産物)이지요. 부산물에 정신이 팔리면 그 진수를 알고 실행하는 것은 어려워진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유혹이 있는 것 같은데요.

 

F; 공자의 그런 모습에 답답해한 제자들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너무 평이한 이야기만 하시고, 궁금증을 해소할만한 시원한 이야기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혹시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없을까 하고 의심도 했던 모양이지요. 공자의 대답 또한 명쾌하구요.

 

G; ‘배우기를 좋아한다(好學)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같은 경지야말로 진짜로 자유와 행복의 길이라 할 수 있지요. 이것은 사실 모든 성인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적(異蹟)이나 신비주의에 끌리는 거지요.

 

H; 신비(神秘)는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외경(畏敬)도 있구요. 그러나 자신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길 즉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길이 자유와 행복의 길이라는 자각이 없이 신비주의나 기적에 대한 동경에 빠지는 것은 결국은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의 아집과 직면할 수 밖에 없거든요.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공자님처럼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유인이 되고 싶은 거지요.

 

I;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지 않아요. 남의 허물을 보고 자신의 허물을 고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남의 허물이 보이는 경우, 잘 보면 같은 것이 자기 안에 있을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도 상대를 비판하고 때로는 비난하고 심하면 고치려고 까지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J; 저는 어떤 분에 대해 ‘너무 가르치려 한다’고 생각해서 좀 걸리고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걸려 하지 않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가르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한 ’ 사람 같아요.   

 

K; 그런 것 같네요. 누구나 자기가 어떤 사람에게 걸려 있는지 생각해보면 자기를 돌아보게 될 것 같아요. 언제 한번 그런 대회를 열어요, (웃음)

 

L;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가면 반드시 스승이 그 안에 있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네요. 너무 풍요로워 지는 것 같지 않아요.

 

M; 오늘 이야기되는 충(忠)이나 신(信)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지금 자신의 삶이 생각되는 것이 많아요. 저는 노동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곳 역시 철저한 개인주의의 물결은 막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소통이나 사랑, 관심 같은 것이 사라진다면 나중에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싸우는지를 모르게 될 것 같아요. 부분적인 싸움에서  이기는 것 못지 않게 동료 상호 간에 충(忠)과 신(信)을 넓혀 가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 것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길이 아닐까요.

 

N; 한자(漢字)를 보면 옛 선인들의 지혜에 절로 감탄하게 되요.

中心이 자기를 넘어서는 가치에 세워지고, 사람(人)의 말(言)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忠과 信을 바탕으로 知와 行이 일치하는 그런 사람으로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로 되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