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번 변하면, 나라가 한번 변하면 (제 6편 옹야)

2007. 11. 11. 17:10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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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번 변하면, 나라가 한번 변하면 (제 6편 옹야)

 

 

       

⑳ 번지가 지(知)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지켜야할 의(義)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느니라.”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仁者)는 어려운 것은 먼저 하고 보답을 얻는 것은 뒤로 하면 가히 인(仁)하다고 할 수 있느니라.”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21)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사느니라.”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 動 仁者 靜 知者 樂 仁者 壽)


(22)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나라가 일변(一變)하면 노나라에 이를 것이요, 노나라가 일변(一變)하면 도(道)를 행하는 나라가 될 것이니라.”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23)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난 그릇이 모나지 않으면 모난 그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모난 그릇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子曰 觚不觚 觚哉觚哉)


(24) 재아가 묻기를,“ 인자(仁者)는 가령 우물 속에 사람이 빠졌다면 당장에 쫓아 들어가기라도 하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그러겠느냐. 군자는 가게는 할지언정 빠지게는 못하며, 이치에 맞는 말로 속일 수 있을지언정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속일 수는 없느니라.”

(宰我問曰 仁者 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 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25)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 군자가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단속하면 또한 도에서 어긋나지 않느니라.”

(子曰 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26) 공자께서 남자(南子)를 만나보시니 자로가 좋아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정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버릴 것이니라. 하늘이 버릴 것이니라.”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天厭之)


(27)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용(中庸)의 덕(德)을 행함이 덕의 극치이다. 그런데 이 덕을 소홀히 한 지가 너무 오래 되었구나.”

(子曰 中庸之爲德也其至矣乎 民鮮久矣)


(28) 자공이 말하기를, “만일 백성들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줄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인이라고만 하겠느냐? 반드시 성(聖)이니라. 요순 같은 사람도 오히려 그렇게 못함을 걱정하셨을 것이니라. 인자(仁者)란 자신이 나서려고 하는 곳에 남을 내세우고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데에 남을 이루게 한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인(仁)의 올바른 방향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니라.”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강독>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은 많이 들어온 말이다. 사람의 성향을 나타낸 말로도 보이지만 공자가 말씀하시는 지(知)와 인(仁)의 차이가 감각적으로 느껴져 오는 구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動)과 정(靜)이 한 사람 안에서 조화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쉽게 바뀌지 않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 집단 안에서 조화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자(仁者)는 오래 사느니라.’는 말을 읽으면서 나이 들어 원숙한 인격으로 그려지는 것은 역시 내면의 부동심(不動心)을 기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2장에서 일변(一變)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한 번 변한다’는 것은 뭔가 질적 전환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폭력(暴力)이나 무리(無理)가 연상되지는 않는다.

지금의 세상에서 우리나라가 일변(一變)하면 어떤 나라를 그려 볼 수 있을까. 또 그 나라가 일변하면 정말로 인류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이상국가로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과 세상의 일변을 꿈꾼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물어진다.

24장의 재아의 질문을 엉뚱한 것으로 공자를 시험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재아와 공자의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재아 스스로가 빠져 있던 고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런 일은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은 것 아닌가.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따지고 손해 안보려 애쓰는 삶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관념적으로 선(善)에 묶여 결과적으로는 불선(不善)에 이르는 우(愚)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가서야(可逝也)언정 불가함야(不可陷也)이며 가기야(可欺也)이언정 불가망야(不可罔也)이니라.’는 구절이 이런 심정을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나치게 인정에 끌리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이치 따짐에 빠지는 것도 아닌 중용의 길이 있지 않을까. 

27장의 ‘중용의 덕을 행함이 덕의 극치’라는 말씀은 지금에 와서도 변치 않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적당한 타협이나 섞여 있음을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극단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요즘 흔히 말하는 ‘중도 ○○’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중용에는 뭔가 심이 있지 않을까.

진리 탐구와 진리 실현이라는 일관됨이 그 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격적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심이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24장에서 재아의 질문에 공자처럼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경지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우리 부족한 사람이 그 흉내를 내려고 한다면 부끄러울 뿐이다.

28장에서 공자는 仁이 추구하는 목표가 결국은 이타(利他)의 실천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성현의 가르침이 같은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바를 먼저 남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인(仁)이라고 공자는 말씀하신다.

이 것이 더 커져 ‘박시제중(博施濟衆)’하는 것을 최고의 덕, 즉 성(聖)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

 

A; 감히 저를 지자(知者)라고 말하기는 게면 쩍은 이야기지만 굳이 지자와 인자로 구분해 본다면 저는 지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시시비비가 늘 생각되고, 뭔가 외적인 행동에서, 그 결과에서 기쁨이나 만족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B; 인자(仁者)가 지자보다 웃길 같아요. 저도 잘 안되지만 인자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간절해요. 모든 것을 수용하고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바탕에서 나오는 동(動)이 진짜가 아닐까요.

 

C; 저는 산과 물을 이야기하면 높지 않는 산들이 연봉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나 깊지 않은 물이 서로 어울려 흐르는 것이 연상되요.

 

D; 역시 노동운동을 하시는 분이라 다르네요. (웃음)

 

E; 24장에서 경원(敬遠)이라는 말이 나오는 군요. 경원이라 하면 뭔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것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외람되게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도 같습니다.

 

F; 공자께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늘 함께 생각되는 것 같아요.

사람의 인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노나라가 일변하면 도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지금 들으면 고개가 갸웃둥해지지만 어떻든 끊임없이 이상국가가 그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느껴지네요.

 

G; 우리나라가 일변하면 어떤 나라 쯤 될까요. 스웨덴이나 뭐 그런 나라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선진복지국가가 일변하면 도(道)에 이를까요?

 

H; 글쎄요. 뭐 그럴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러나 어떤 상(像)을 갖는 것은 구체적 목표가 잡히니까 좋은 것 같아요. 우리국가가 일변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필요할 것 같아요. 너무 도사(道士) 같은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지지만요.. 대다수의 국민이 함께 그리면    좋을 것 같아요.

 

I; GNP 몇 만 달러 같은 목표는 그려지는데 뚜렷하게 어떤 모델국가가 떠오르지는 않네요. 그렇다면 우리가 도(道)를 실현하는 모델국가로 되면 되지 않아요? (웃음)

 

J; 24장의 재아 같은 물음은 많이 경험하는 것 같아요. 어떤 것이 선하게 사는 것인지, 옳게 사는 것인지 망설이게 될 때가 많아요. 기(欺)와 망(罔)이 다른 것 같은데 한문을 잘 몰라서 감이 잘 안잡히네요.

누구에게 속지 않으려고 경계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아니면서 리(理)에 맞는 행위가 있을 것 같네요. 역시 상당한 내공(內攻)이 필요하겠지요.

 

K; 26장을 보니까 공자도 스캔들은 두려워하신 것 같네요.(웃음)

역시 밀실에서 당당한 인격이라야 지도자나 스승이 될 수 있겠지요. 요즘 우리나라도 지도급 인사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니까 희망이 있는 것 같아요.

 

L; 중용의 실천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가짜로 되고 말아요. 저도 중용이 이상이라고 늘 생각하지만 실제를 보면 극단에 흐르는 경우가 많아요. 극단에 흐르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나 집단을 보면 마음에 각이 서거든요. 뭔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요.

 

M; 중용은 정지된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변증법의 정반합(正反合)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마음이나 인간의 역사나 길게 보면 결국 중용에 도달하는 것 아닌가요.

 

N; 인(仁)은 자기를 바로 세우는 길이 다른 사람을 위하는 행(行)과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아요. 거기서 출발하여 궁극은 성(聖)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요. 성(聖)이란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고 공자님은 말씀하셨는데,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리下化衆生)과 통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종교가 과학과 서로 보완하고, 사회적 실천과 결합하여 세상을 일변(一變)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인류가 전반적으로 성화(聖化)되는 길 아닐까요.

 

O; 너무 장밋빛 전망 아닌가요?  하지만 기분은 좋네요.(웃음)

 

P; 하루 하루 힘들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람끼리 서로 걸리고 실망하는 일이 많지만 그럴수록 인간에 대한, 그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논어 강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