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자연관과 예술관

2007. 12. 16. 09:56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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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끼는 『선불교와 심리분석}이라는 책에 실린 [선불교 강의]라는 논문에서 일본의 하이꾸(俳句) 작가인 바쇼(芭蕉)와 테니슨(Tennyson)의 시를 비교하여 동양인과 서양인이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충격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선 그는 바쇼의 하이꾸를 소개한다.

         자세히 보니
         냉이꽃 피었구나
         생울타리 옆.

한편 테니슨의 시 중에는 <담장 틈바귀에 핀 한 송이 꽃(Flower in Crannied Wall)>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담장 틈바귀에 핀 한 송이 꽃,
         나 너를 틈바귀에서 뽑아
         여기 쥐고 있다. 내 손에, 뿌리째 모두,
         조그마한 꽃 ― 하지만 만약 내가 알 수만 있다면
         네가 무엇인지, 뿌리째 모두, 속속들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련만.

   이 두 시에 나타난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선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는 테니슨의 시에서는 화자가 담장 틈바귀에 핀 꽃을 뽑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냥 뽑는 것이 아니라 '뿌리째' 뽑는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손에 쥐고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바쇼의 하이꾸에서는 화자가 냉이꽃을 뽑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잘 보고 있었는데, 조그만 냉이꽃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 사람이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와 동양 사람이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 사이에는 판이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테니슨의 시의 화자가 꽃 한 송이―그것이 무슨 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를 뿌리째 뽑아 이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하나의 작은 꽃에서 인간과 우주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찾던 질문의 해답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는 과정에서 뿌리뽑힌 꽃은 말라 죽게 되어 있다(그가 이를 다시 심지 않는다면).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존재론적 질문에만 집착한 나머지 꽃의 운명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느낌이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훼손과 더 나아가서는 공해의 주범이 되는 셈이다. 그의 이러한 행동 뒤에는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연을 자의적으로 파괴해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깔려있다. 이 시의 화자가 과학자였더라면, 그는 아마도 이 꽃을 실험실에 가져가 물에 씻어서 원심분리기로 분해한 후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염색체를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이 꽃은 당연히 생명을 잃고 결국에는 실험실에서 나온 산업쓰레기로 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편 바쇼의 시의 화자는 처음부터 '잘 보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우주적이다. 테니슨의 화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담장에 핀 꽃만을 보고 있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따라서 바쇼의 화자는 이미 우주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그의 '바라봄'에서 갖고 있었던 반면에, 테니슨의 화자는 꽃을 뽑아 손에 들어 보고 나서야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해답을 얻지 못하여 꽃을 뽑는 행위를 수없이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두 시인의 한정된 시를 가지고 동양인과 서양인이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생각을 추출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무리일지 모르나 이런 대비를 통해 몇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인은 분석적이고 객관적이다. 이는 그들의 이성중심적인 사고의 틀에서도 발견된다. 테니슨의 화자는 "인간과 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하여 왜 꽃을 뽑았는가? 이는 자연의 작용 뒤에는 우주의 근본법칙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한편 바쇼의 화자는 똑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잘 보고 있었다. 이에서 둘 사이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테니슨의 화자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데 반하여, 바쇼의 화자는 주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이기까지 하다. 바쇼의 화자는 작고 보잘것없는 냉이꽃과 대화함으로써 곧 우주와 대화하고 있으며, 그 결과 자신의 우주적인 질문에 대한 깨달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가 이 모든 과정에서 냉이꽃의 꽃잎 하나도 다치지 않고 더 큰 깨달음에 이르러 더 크게 본 반면, 테니슨의 화자는 점점 작게 봄으로써(처음에는 담장을, 그 다음에는 꽃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꽃의 뿌리를 보았을 것이다) 하늘은커녕 그가 살고 있는 세계도 보지 못했으며, 우주적인 깨달음에는 미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쇼의 시의 화자가 얻은 해답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테니슨의 화자가 이성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이고 자연파괴적인 신을 가정하고 있는 반면, 바쇼의 화자는 초월적이고 동시에 내재적이며 세계(우주)중심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신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문화읽기/이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