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용서했다'는 이 대통령께 권하는 영화

2008. 5. 7. 00:45일반/생활일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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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용서했다'는 이 대통령께 권하는 영화
[오마이뉴스] 2008년 05월 06일(화) 오후 03:33   가| 이메일| 프린트
[오마이뉴스 데니스 하트 기자]
<침묵의 소리> 상영 및 김대실 감독 강연 행사 포스터.
ⓒ Kent State University

미국 오하이오에서 한국과 관련된 중요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돼 일본군의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한국인 '위안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소리(Silence Broken)>(1999)를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켄트 주립대학교, 칼리지 오브 우스터 등 세 대학에서 4월 17~19일에 상영한 것입니다.

2006년 미 하원의원들을 상대로 상영돼 '위안부' 결의안 채택에도 기여했던 이 영화로 수많은 상을 받은 감독 김대실(70) 박사와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도 마련됐습니다.


제가 1년이 넘는 준비 기간을 두고 이 행사를 기획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미국인들은 일제의 만행을 거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평균적인 미국인은 대개 일본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고 관심도 많은 편이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행사에는 중고교 현직교사를 위한 동양학 연수 프로그램(기획 및 재정 지원 : 프리만 재단) 참가자들도 참석했습니다.



김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모든 질문에 일일이 답했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김 감독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할머니들을 넘기고 떠나는 것만 같아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의 상영회에서 관객 반응은 모두 흡사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알고 큰 충격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질의응답도 1시간에서 1시간 30분가량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참혹한 경험을 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제작자의 내레이션 한 마디 없이 그대로 전달한 이 영화는 모든 이를 전율하게 했고,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한국 여성의 강인함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상영회에서 강연 중인 김대실 감독.
ⓒ 데니스 하트

일제 만행의 참혹함과 한국 할머니들의 강인함 전한 <침묵의 소리>


미국 관객에게 충격적인 점은 이 문제가 일본 정부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도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2차 대전의 승자로서 전후 도쿄 전범재판을 이끈 미국이 '위안부' 문제, 난징 대학살, 생체실험을 주도한 731부대 등 일본의 전쟁 범죄 문제는 다루지도 않은 채 넘겨버린 것을 알고 있었던 이들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영화 중간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수의 네덜란드와 영국 여성들은 전후에 즉각 보상을 받았는데 한국 여성들은 전혀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왔을 때도 미국인들의 반응은 동양계 학생들과 달랐습니다.


상영회 개최를 도와준 오하이오 주립대생 최예리양은 이 때 동양계 학생들이 조용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미국 학생들은 강한 충격을 받는 것 같았고, 덩치큰 한 남학생을 비롯한 일부는 흐느꼈다고 전합니다.


최양은 할머니들의 직접 증언이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을 뿐 아니라 강제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일본 우익 학자와 '위안부' 관련 문서를 발견해 공개한 양심적인 일본 학자, "'위안부' 여성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거짓말하는 당시의 일본군과 비인간적인 '위안소'의 실상을 고발한 또 다른 일본군 등 다른 처지에서 한 증언들을 감독이 그대로 보여준 점이 놀라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한 교수님께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한국 여성의 강인함 앞에서 숙연해졌고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른 만행의 끔찍함을 보고 슬퍼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현직 교사 한 분은 "이 영화를 본 교사들은 모두 새로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앞으로 학생들에게 전쟁과 폭력에 대해, 정의와 인류애의 필요성에 대해 가르치겠습니다"라고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김대실 감독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동양학 연수 프로그램 참가자들.
ⓒ 데니스 하트

미국 정부 책임론 처음 접하고 놀라는 미국인들
다음은 세 상영회에서 진행된 김대실 선생님과 청중의 질의응답 중 몇 가지를 추린 것입니다.


-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전혀 보상금을 받지 못했나요?


"일본 정부에서 공식 보상금을 준 일은 없고 민간에서 기금을 만들어 일부 피해자에게 전달한 일은 있었습니다. 민간 기금도 원래 계획처럼 많이 모으지도 못했고 피해자들에게 전달한 경우에도 항상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에 저는 민간 보상금을 '잔인한 돈'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피해자들은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고 '왜 우리가 몸파는 여자들처럼 민간에서 주는 돈을 받느냐'고 오히려 치욕감을 느꼈습니다. 필리핀인 피해자 등 일부 받은 분들도 있지만,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았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해서 돈이 당장 필요해 할 수 없이 받은 경우였으며 받고 나서도 내면의 갈등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 문제가 공론화되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까?


"거의 50년에 걸친 '침묵'은 피해자들이 수치심 때문에 증언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라고들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피해자 중 많은 분들이 저를 붙들고 "우리는 창피할 것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할머니들은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한 데는 일본 정부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고, 일본의 전쟁 범죄를 제대로 심판하지 않는 미국 정부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 미국 의회에서 작년에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결의안이 상정된 것은 작년이 처음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 번 이상 일본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나왔으나 한 번도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작년엔 시기가 잘 맞아 떨어져 재미 교포 사회 및 여러 단체의 지지를 받았고 전세계적 운동으로 발전해 결실을 본 셈입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은 결의안 통과에 대해 미국 정부를 칭찬하는 논조 일색이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50년간 이 문제를 무시해 왔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력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환영한다'고 했어야지요."


<침묵의 소리> 상영 후 청중과 토론하는 김대실 감독.
ⓒ 데니스 하트

이명박 대통령님께 <침묵의 소리>를 권합니다



- 일본 정부는 태도 변화가 전혀 없습니까?


"처음에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 자체를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시미 요시야키 교수가 '위안부' 조달 및 운송 문서를 발견해서 세상에 알리자 어느 정도는 시인했어요. 그렇지만 아직도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공식적인 인정과 사과는 한 적이 없어요. 가끔 하급 관리가 와서 '개인적으로' 사죄하기도 해서 일본 정부가 이미 사과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 사과와 공식 사과는 엄연히 다르지요."


- 피해 여성 중 살아남아서 고향에 돌아온 사람은 몇 명입니까?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은 2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그중 80%가 한국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25%정도가 살아남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75%가 가혹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사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존자 중 고향에 돌아온 사람은 극히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역사적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배려와 자비심과 인정을 갖추도록 가르쳐주세요."


이번 행사를 여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을 다녀갔고 이어 일본도 방문했습니다. 일본 방문 중 이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는 일본이 할 일이고 우리가 미래로 가는 데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든지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대통령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과거사'가 일본만의 문제인지, 민족 문제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인지 이 영화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서구 여성 모방 대신 우리 할머니들에게서 배워야"


오하이오의 세 대학에서 열린 <침묵의 소리> 상영 및 강연회에 오신 김대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인터뷰는 4월 18일~20일에 하루에 약 한 시간씩 사흘 동안 진행됐고 일부는 서면 질의와 답변으로 이뤄졌습니다.



김대실 감독의 책 <침묵의 소리> 표지.
ⓒ Dai Sil Kim-Gibson

- 오하이오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을 기획한 동기를 말씀해주십시오.


"처음엔 '위안부'로 끌려갔던 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책을 쓸 예정이었어요. (기자 주 : 책은 영화와 동일한 <Silence Broken>이란 제목으로 1999년 미국에서 출판됐습니다.) 왜 영화를 만들었느냐고요?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재원 확보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만드는 과정이 어려웠지요. 제작 자체의 어려운 점은 시각 자료가 많이 모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찍은 영상은 전쟁 선전용 영화밖에 없었고, 인터뷰 내내 할머니 얼굴만 찍을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분들의 경험 중 일부는 극화해(dramatize) 배우의 연기를 찍은 영상을 보충했어요.


영화 중간에 한국의 산, 계곡 등도 나오는데 어떤 의미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많아요. 아픔뿐 아니라 그분들이 잃어버린 삶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보통 한국 여자처럼 결혼하고, 자녀들을 키우는 등의 평온한 일상을 그분들은 누리지 못했거든요.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영화화하는 동안 정신적 고통과 울분에 시달린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안 한 게 아니라 한국이 듣지 않은 것이다



- 영화를 만드는 동안 선생님 자신의 의식이나 이해에도 변화가 있었는지요?


"처음엔 목소리가 없는 분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이 제 본분이라고 착각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오만하고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사실은 그분들이 제게 목소리를 주고 저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었어요. 할머니들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수난, 그리고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의 잔혹함을 배움으로써 인생사에 대한 의식이 깊어졌습니다. 할머니들의 지혜와 용기가 놀라왔고 인간 정신의 강인함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 영화에서 할머니들께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으시는데 어떻게 신뢰감을 쌓을 수 있었습니까?


"같은 한국여자고 마음이 통했기에 신뢰를 얻기는 어렵지 않았어요. 제가 진심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걸 알고 나서는 이야기가 술술 쏟아졌어요. 그분들에겐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강한 욕구가 있어요. 할머니들이 과거의 일을 수치스럽게 여겨 오랜 세월 동안 침묵했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만나본 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몇 분은 "우리는 수치스럽지 않아요. 나라가 없어서 끌려갔을 뿐인데 왜 창피해해야 합니까?"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죽음보다 참혹한 경험을 견뎌내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자신의 경험을 전해야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어요. 그분들은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가족, 이웃, 국가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화 제작 현장의 김대실 감독.
ⓒ Dai Sil Kim-Gibson

- '뉴라이트 교과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위안부'가 강제 동원됐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기지촌 매춘과 '위안부'를 동일시하기도 했고, 어떤 분은 일본의 강점은 축복이었다고까지 했습니다. '위안부' 관련 이야기가 "정치 선전"에 불과하다는 책을 낸 '역사적 사실 보급회' 같은 일본 극우의 얘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 사람들, 정말 망상증에 걸린 것 같아요. '이 망할 놈들아!'라고 하고 싶어요. '식민지화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다'는 등의 헛소리를 하면서 제 딴에는 객관적인 양 착각하고 있을 거예요. 식민 기간 동안 한국이 근대화 과정을 거친 건 사실이지요. 그러나 '일제에 강점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은 꼭 해봐야 합니다. 한국이 근대화하지 못했을까요?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는 한국은 근대화의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스스로 근대화하지 못했을 거라는 증거가 없어요."


- 저도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와 서구를 동일시하는 인종주의적 서구중심주의를 재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 페미니스트들은 한국 정부도 책임이 있다며 '위안부' 문제를 가부장적 국가주의 문제로 묶어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일제의 만행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쟁 범죄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을 돌봐드리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공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피해자들을 침묵시킨 데는 일본, 한국, 미국 세 정부에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일본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아시아인 페미니스트들을 은근히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제3세계 여성들을 얕잡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모습엔 정말 분노가 치밀지요."


"'위안부'가 정치 선전이라고? 망할 놈들!"


- 재미 교포를 비롯한 서구 페미니스트나 일부 한국 여성학자들은 이 문제를 군사문화, 기지촌 매춘, 인신매매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론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더 광범위한 맥락에서 분석해야 하며 다른 문제들과도 연관돼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의도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닙니다만, 국가가 체계적으로 동원한 군대 성노예인 '위안부'와 다른 성 착취 문제들 사이의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원래 명칭대로 '위안부', 'comfort women'이라고 씁니다."


- 미국에서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많은 학생이 큰 충격과 감명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인 청중은 어떤 질문을 자주 하나요? 일본계 학생들은 다른지, 한국 학생들과 재미교포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궁금합니다.


"미국인들은 '전혀 몰랐다'며 충격을 표시하거나 '일본이 벌써 사과한 것으로 아는데? 도대체 몇 번이나 사과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든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주로 묻습니다. 재미교포들은 세대에 따라 다른데 노인세대는 이 문제를 잊고 싶어 합니다. 오래된 상처를 왜 건드리느냐는 것이지요.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어요. 젊은 세대는 충격 받고, 분노하고,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하지요. 일본계 미국인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지 않으려 하거나, 화를 내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 죄스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 요즘은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계십니까?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봉한 <모국(Motherland)>을 만드신 배경도 말씀해주세요.


"미국에서 실향민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자본주의의 광풍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의문도 들어 다른 세상을 보려고 2004년 겨울 쿠바에 갔다가 한국계 쿠바인 마르타 림 김을 만났어요. 한국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디아스포라의 시대임을 실감했어요.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5일간 마르타와 한국계 쿠바인들을 인터뷰했어요.


다시 쿠바를 찾아 더 찍을 예정이었는데, 미국의 대 쿠바 정책이 강경하게 돌아서고, 건강 문제도 있고(기자 주 : 2005년에 위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재원 확보가 거의 불가능해서 부족하나마 1차로 찍어둔 영상으로 작업했습니다. 유일한 재정 지원은 뉴욕의 급진적 노동자 단체에서 준 '블로파브 다큐멘터리상(Blaufarb Documentary Award)'이었는데 이 상금으로 쿠바에서 이민 온 마르타 형제들을 인터뷰했어요. 편집하는 동안, 내 일생은 1945년 겨울 온 가족이 38선을 걸어서 넘어 남하한 후 줄곧 '집'을 찾는 여정이었음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냉전 시대 이후 두 이민자 여성이 집을 찾는 이야기로 끌고 갔습니다. <모국>은 올해부터 뉴욕시에 있는 'Women Make Movie'에서 보급하고 있어요. 41분짜리인데, 언젠가 후속 이야기를 보태서 한 시간 정도 분량으로 다시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미국 공영방송을 통해 전국에 방송하려고요."


한국계 쿠바인 마르타와 김대실 감독.
ⓒ Dai Sil Kim-Gibson

- <모국>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 관객 반응이 미국에서와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부산에서 최초 상영을 했는데 매진됐어요. 대부분 관객은 한국인이었지만 전 세계에서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러 오셨어요. 질의응답 시간이 감동적이었어요. 마르타의 언니가 자본주의에 경도돼 빈부격차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데 비해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마르타가 평화로워 보였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분이 제게 계속 영화를, 특히 북한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해주셔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재정, 건강 문제 때문에 <모국>이 마지막 작품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앞서 얘기했거든요. 그 후 제가 직접 참석했던 아시안 아메리칸 국제영화제(2007년 뉴욕)에서도 부산과 마찬가지로 매진됐지요.


한국인은 마음으로, 미국인은 머리로 반응한다고 할 수 있어요.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미국 시민이건 아니건 이민을 온 사람들이고 조상의 나라 또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생각하는 한국에 대한 각별한 감정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느끼며 반응하지요. 저는 자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나친 소유욕과 애착심에 종종 숨이 막힙니다. 이 영화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이민자처럼 살아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미국인은 거의 모두 이민자들이잖아요. 조상들이 바다 건너 먼 땅에서 와서 원주민들을 죄다 죽이고 노예 노동을 착취해 건설한 나라라는 사실을 잊고 살지만요. 모두 나그네라는 동질감을 느끼며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커트 보너것의 <나라 없는 사람(A man without a country)>에 "산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면,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빼면, 살면서 여기저기서 만난 성인 성녀들 때문이다. 성인 성녀란 험악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사람다운 도리를 지키고 산 사람들을 말한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공감합니다."


이민자의 후예임을 잊고 사는 미국인들이여, 이민자처럼 살아보라


- 왜 쿠바에 가셨는지 저는 이해합니다. 9.11 이후 미국인들의 애국주의는 타국에 대해 적대적인 정서를 부추기고 있지요. 주는 것 없이 죽도록 미워하는 두 나라가 쿠바와 북한인데, 평균적인 미국인은 이 두 나라를 잘 모르면서도 지나치게 증오하는 경향이 있어요. 남편이신 단 깁슨 박사님과 함께 회고록을 집필중이라고 들었는데 책이 언제 나오나요? 한국에서도 출판하실 예정입니까?


"회고록은 현재 쓰고 있고 올해 말까지는 탈고할 예정입니다. 한국에서 출판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우선 좋은 책이 완성될 때까지 좀 기다려봐야지요."


- 한국 독자들, 특히 젊은 세대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자기 나라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뜻하는 민족주의는 좋은 가치입니다. 한국엔 인종적, 지리적으로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닌 건강한 민족주의가 필요합니다. 건설적 민족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돌아봐야 합니다. 역사란 미묘하고 취약한 것입니다. 역사는 의도적인 기억의 집합체인 동시에 의도적인 망각의 집합체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힘 있는 사람들이 역사쓰기를 주도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복원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건설적 민족주의는 방랑자들, 존 버거의 말을 인용하자면, '집을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과도 손잡고 가야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망각은 개인이 당면하는 큰 문제이다", "죽음은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했습니다. 쿤데라는 자아는 기억의 총체이며,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미래가 아닌 과거의 상실이라고 봤습니다. 죽음은 망각을 통해 항상 일상에 침범하고 있습니다. 쿤데라는 민족의식에 대해서도 같은 정의를 적용했습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민족의식을 말소하려 할 때는 늘 망각을 조직적으로 유도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할 때에도 똑같은 수법을 썼지요. 과거를 대면하지 않는 민족은 미래는커녕 현재를 살아갈 준비도 돼 있지 않은 민족입니다. 그리고 만인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다면 역사 쓰기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한국 여성은 서구 여성을 모방하는 대신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날랐던 아주머니들, 아기를 등에 업고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던 우리 할머니들에게서 한국의 여성성을 찾아야 합니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강인함과 억압받은 여성들의 고통 속에서도 찾아야 합니다. 상류계층 여성, 엘리트 여성들이 아니라 고생스런 생활 속에서도 인정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삶에서 희망과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 배타적이지 않은 민족주의란 다인종, 다문화적인 한국 민족주의, 세계에 널리 퍼져 살고 있는, 선생님 표현대로 마음속에 고향을 지니고 다니는 한인 디아스포라까지 포용하는 민족주의이겠네요. 여러 번 <침묵의 소리>를 봤지만, 이번엔 윤두리 할머니께서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 처음엔 살아갈 힘이 없었지만 "나라가 없어서 설움을 당했으니 나라도 나서서 일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신세대 여성들은 긴 역사 속에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돌보고 나라를 세우고 지켰던 평범한 한국 여성들의 강인함을 배우고 힘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데니스 하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