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으로 컴퓨터 작동 “唯識思想 입증”

2008. 5. 7. 20: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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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유식사상이 입증?


생각만으로 컴퓨터 작동 “唯識思想 입증”




“三界는 오직 마음이요 萬法은 오직 識일뿐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는 唯識思想을 입증하는 과학적인 실험 결과가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USA투데이는 10월 11일 미국의 한 전신마비 환자가 뇌에 전선을 연결해 생각만으로 컴퓨터의 커서를 움직여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 했다. 이에 따르면 이 환자는 100여개의 작은 감지기를 뇌에 심은 뒤 이것을 전선으로 외부의 컴퓨터와 연결 했으며, 결국 이 환자는 생각만으로 커서를 움직여 ‘퐁(pong)'이라는 게임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지난 8일 미국물리학 및 재활협회 연례총회에서 발표된 이 연구 결과는 매사추시츠주 폭스보로 소재 ‘사이버키네틱스 뉴로테크놀로지시스템(CNS)’에 의해 실시 됐다. CNS측은 25세의 남자 환자가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움직였고 텔레비전을 켜고 e-메일을 여는 한편 70%의 정확도로 게임‘pong)를 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일련의 뉴런(신경단위) 으로부터의 신호를 읽고 신호를 행동으로 해석하기 위해 컴퓨터와 연산을 이용하는 기술의 초기 단계임을 의미 한다.



이와 관련 우희종 서울대교수(수의학)는 “눈, 귀, 코, 입, 몸, 생각 등의 인식작용인 6식가운데 생각(의식)의 힘으로 대상을 움직이는 것은 낮은 단계의 유식사상을 입증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며 “이는 인지과학이 유식학을 집중 연구한 성과로 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신희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학습기억 연구 단장은 “뇌의 의식을 전기 신호로 변환시켜 사물을 움직이는 ‘브레인 컴퓨터 인터페이스(BCI)’ 분야의 성과는 마음의 작용을 입증하는 것” 이라면서 “뇌 과학의 발달로 인해 마음의 비밀이 벗겨질 날도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대불교 신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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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구사 유식의 학설이 현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규명되게 되었으니

용수 무착 세친 같은 큰 스승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실증 적 이었나를 알게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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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학 입문>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불교의 중요한 학문인 유식학을 살펴보았습니다.

불지견으로 깨닫은 바를 범부의 지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겠지만

지루하고 긴 시간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한 이 공덕이 법우님들께서 더욱 정진할 수 있는 하나의 선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唯願 諸佛作證明

願以次功德 圓滿廻向法界

有情無情我等如衆生 自他一時成佛道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定慧眼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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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학 입문>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불교의 중요한 학문인 유식학을 살펴보았습니다.

불지견으로 깨닫은 바를 범부의 지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겠지만

지루하고 긴 시간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한 이 공덕이 법우님들께서 더욱 정진할 수 있는 하나의 선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唯願 諸佛作證明

願以次功德 圓滿廻向法界

有情無情我等如衆生 自他一時成佛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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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경위의 수행 | 유식학입문 2004/11/01 06:41

http://blog.naver.com/hwaq708/80007096787

5. 구경위(究竟位)의 수행






구경위는 자량위와 가행위와 통달위와 수습위의 수행을 통하여 팔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량위로부터 구경위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기간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걸린다.

삼겁을 다시 분류하면,

자량위에서 통달위까지 도달하려면 일 겁(一劫)이 걸리고,

통달위에서 제팔지보살의 수행위인 수습위까지 도달하려면 일 겁이 소요되며,

제팔지보살의 수습위에서 구경위에 오르기까지 일 겁이 걸린다.

이들 수행기간을 모두 합치면 삼 겁이 된다. 삼 겁 동안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나아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등 이타적인 수행을 해야만이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이타적인 수행 가운데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사상이다.




십바라밀은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 7) 방편(方便), 8) 원(願), 9) 역(力), 10) 지(智) 등의 바라밀을 뜻한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으로 십종의 바라밀을 수행하면 유식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유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을 깨닫고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들 십바라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 보시바라밀은 물질과 정신을 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물질을 베풀어준다는 재시(財施)가 있고, 진리를 설명하여 사상을 길러주는 법시(法施)가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보시바라밀을 수행하여 중생들을 계몽하고 복되게 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 지계바라밀은 보살 스스로의 계율을 잘 지키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삼취정계는

첫째,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고 스스로의 범죄를 방호하는 율의계(律儀戒)를 실천하고

둘째, 중생들에게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고 심지어 짐승의 공포까지도 없애주는 섭선법계(攝善法戒)를 실천한다.

셋째,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모든 이익을 가져다주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를 실천한다.

이와 같이 이타적인 계율이 삼취정계이며 대승적인 계율사상이다.




3)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 인욕바라밀은 모든 일에서 고된 일을 참고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인욕은 내원해인(耐怨害忍)과 안수고인(安受苦忍)과 제찰법인(諸察法忍) 등 삼인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 삼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원해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항 때 인욕하며 지혜롭게 피해를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안수고인은 추위와 더위 등 자연의 나쁜 조건을 극복하고 죽음이 닥쳐올 만큼 어려운 고통을 겪어도 이를 능히 참으면서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셋째, 제찰법인은 사성제(四聖諦) 등 여러 진리를 관찰하고 진리를 통달하기 위하여는 어려운 고통을 참고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 정진바라밀은 선법을 행하고 보살행을 할 때 게으름을 퇴치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정진은 피갑정진(被甲精進)과 가행정진(加行精進)과 무퇴정진(無退精進)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피갑정진은 병사가 전장에서 두려움 없이 근면하게 전투하여 적군을 격퇴하는 것과 같은 근면성을 말한다.

둘째, 가행정진은 견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이든지 용감하게 완수하는 근면성을 말한다.

셋째, 무퇴정진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근면성을 말한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 선정바라밀은 마음의 산란과 동요함이 없이 미세한 번뇌까지도 정화하는 선정을 뜻한다. 정(定)과 지혜(慧)를 함께 수행하여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지(根本智)를 나타내고 인연법과 더불어 유위법(有爲法)을 반연하는 후득지(後得智)를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6)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 지혜바라밀은 선정을 닦아 발생되는 지혜를 말하며 지혜는 마음의 번뇌가 없어짐에 따라 분별심이 전환하여 나타나는 마음을 뜻한다. 지혜는 삼라만상이 인연법으로 형성된 연기법을 알고 연기법을 알게 되면 중생의 불성도 알게 된다. 따라서 지혜를 가진 자는 대자대비의 이타행(利他行)도 실천하는 인격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7)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 방편바라밀은 방(方)은 훌륭한 방법과 정직을 뜻하고 편(便)은 편리하게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일체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고 근기에 계합하는 방법과 수단을 편리하게 활용하여 구제사업을 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편바라밀로 말미암아 마음속 깊이 발생하는 미세한 번뇌를 단멸하게 된다.




8) 원바라밀(願波羅蜜) : 원바라밀은 보리와 열반을 속히 증득하기를 발원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원(願)은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의 내용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구보리원은 큰 깨달음과 불과(佛果)가 성취되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둘째, 이락타원은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뜻한다.




9) 역바라밀(力波羅蜜) : 역바라밀은 보살이 자신의 수행과 이타행을 하면서 보다 더 힘을 내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역(力)에는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思擇力)이 있다. 수습력은 모든 힘을 다하여 정화운동을 가행하는 것을 뜻하고 사택력은 모든 진리를 지혜롭게 선별하고 사리를 진리롭게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10) 지바라밀(智波羅蜜) : 지바라밀은 일체의 법을 관찰하여 승의(勝義)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세속에 있는 모든 것과 중생의 근기까지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보살이 수행하는 십바라밀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보살은 자량위의 수행을 할 때부터 육바라밀 내지 십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며 유식학에서는 십바라밀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모든 수행을 집약한 수행관이며 이 바라밀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사회를 불국토(佛國土)로 건설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한 수행으로 말미암아 본래 소유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장애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번뇌가 없어지고 동시에 모든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번뇌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불성에서 발휘되는 지혜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며 무애자재하게 작용을 하게 된다. 망식이 강하면 지혜가 약해지고 지혜가 강해지면 망심이 약해진다는 말과 같이 자량위 때부터 지혜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여 구경위에 도달해서는 망식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혜만 원만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들 지혜를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이고,

묘관찰지는 제6의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7말나식이 정화되어발생하는 지혜이며

대원경지는 제8아라야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주의 진리를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불타의 삼신(三身)과 더불어 작용하게 된다.



불타는 사지(四智)를 구족하고 삼신을 구족하였으며,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이들 삼신을 통하여 불타의 자비가 육도의 중생들에게 미치기 되며 삼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법신(法身)은 자성신(自性身)이라고도 하며 이는 진여(眞如)의 체성이며 진리적인 몸을 뜻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만법의 체성이며 모든 진리의 의지처이고 여러 덕(衆德)의 집합체인 것이다.




2) 보신(報身)은 삼 겁(三劫)을 수행하여 과보로 받은 불타의 몸을 말한다. 불타는 과보를 받아 수용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한다. 십바라밀을 비롯하여 여러 공덕으로 받은 과보를 혼자서만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베풀어주는 자비의 실천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수용신은 여래의 대원경지와 제팔식의 진여성을 말하며 이는 여래 자신만이 수용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다.

타수용신은 십지보살들이 수용하는 불타의 덕성을 말하며 이는 평등성지에 의하여 발생하는 응신(應身)을 뜻한다.




3) 화신(化身)은 여래가 하급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몸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성소작지를 변현하여 나타내는 불신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화신을 변화신(變化身)이라고도 한다. 변화신은 자량위의 보살과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등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에 거주하는 불신을 말한다.




위에서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 등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이들 수행사상은 이타적인 원리로 구성되었으며 이타적인 수행을 통해서만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하여서도 다시 보신과 화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불타의 자비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근본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유식학이 흥기하여 전래된 역사와 팔식을 비롯하여 여러 교리를 설명하였고,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나타내어 성불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사상도 함께 설명하였다.

이들 내용들은 비록 자세하지는 못하더라도 유식학의 길잡이는 되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 체계있고 자세하게 쓴 글을 발표할 것을 기약하고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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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경위의 수행 | 유식학입문 2004/11/0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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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경위(究竟位)의 수행






구경위는 자량위와 가행위와 통달위와 수습위의 수행을 통하여 팔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량위로부터 구경위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기간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걸린다.

삼겁을 다시 분류하면,

자량위에서 통달위까지 도달하려면 일 겁(一劫)이 걸리고,

통달위에서 제팔지보살의 수행위인 수습위까지 도달하려면 일 겁이 소요되며,

제팔지보살의 수습위에서 구경위에 오르기까지 일 겁이 걸린다.

이들 수행기간을 모두 합치면 삼 겁이 된다. 삼 겁 동안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나아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등 이타적인 수행을 해야만이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이타적인 수행 가운데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사상이다.




십바라밀은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 7) 방편(方便), 8) 원(願), 9) 역(力), 10) 지(智) 등의 바라밀을 뜻한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으로 십종의 바라밀을 수행하면 유식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유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을 깨닫고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들 십바라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 보시바라밀은 물질과 정신을 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물질을 베풀어준다는 재시(財施)가 있고, 진리를 설명하여 사상을 길러주는 법시(法施)가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보시바라밀을 수행하여 중생들을 계몽하고 복되게 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 지계바라밀은 보살 스스로의 계율을 잘 지키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삼취정계는

첫째,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고 스스로의 범죄를 방호하는 율의계(律儀戒)를 실천하고

둘째, 중생들에게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고 심지어 짐승의 공포까지도 없애주는 섭선법계(攝善法戒)를 실천한다.

셋째,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모든 이익을 가져다주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를 실천한다.

이와 같이 이타적인 계율이 삼취정계이며 대승적인 계율사상이다.




3)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 인욕바라밀은 모든 일에서 고된 일을 참고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인욕은 내원해인(耐怨害忍)과 안수고인(安受苦忍)과 제찰법인(諸察法忍) 등 삼인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 삼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원해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항 때 인욕하며 지혜롭게 피해를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안수고인은 추위와 더위 등 자연의 나쁜 조건을 극복하고 죽음이 닥쳐올 만큼 어려운 고통을 겪어도 이를 능히 참으면서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셋째, 제찰법인은 사성제(四聖諦) 등 여러 진리를 관찰하고 진리를 통달하기 위하여는 어려운 고통을 참고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 정진바라밀은 선법을 행하고 보살행을 할 때 게으름을 퇴치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정진은 피갑정진(被甲精進)과 가행정진(加行精進)과 무퇴정진(無退精進)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피갑정진은 병사가 전장에서 두려움 없이 근면하게 전투하여 적군을 격퇴하는 것과 같은 근면성을 말한다.

둘째, 가행정진은 견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이든지 용감하게 완수하는 근면성을 말한다.

셋째, 무퇴정진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근면성을 말한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 선정바라밀은 마음의 산란과 동요함이 없이 미세한 번뇌까지도 정화하는 선정을 뜻한다. 정(定)과 지혜(慧)를 함께 수행하여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지(根本智)를 나타내고 인연법과 더불어 유위법(有爲法)을 반연하는 후득지(後得智)를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6)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 지혜바라밀은 선정을 닦아 발생되는 지혜를 말하며 지혜는 마음의 번뇌가 없어짐에 따라 분별심이 전환하여 나타나는 마음을 뜻한다. 지혜는 삼라만상이 인연법으로 형성된 연기법을 알고 연기법을 알게 되면 중생의 불성도 알게 된다. 따라서 지혜를 가진 자는 대자대비의 이타행(利他行)도 실천하는 인격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7)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 방편바라밀은 방(方)은 훌륭한 방법과 정직을 뜻하고 편(便)은 편리하게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일체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고 근기에 계합하는 방법과 수단을 편리하게 활용하여 구제사업을 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편바라밀로 말미암아 마음속 깊이 발생하는 미세한 번뇌를 단멸하게 된다.




8) 원바라밀(願波羅蜜) : 원바라밀은 보리와 열반을 속히 증득하기를 발원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원(願)은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의 내용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구보리원은 큰 깨달음과 불과(佛果)가 성취되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둘째, 이락타원은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뜻한다.




9) 역바라밀(力波羅蜜) : 역바라밀은 보살이 자신의 수행과 이타행을 하면서 보다 더 힘을 내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역(力)에는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思擇力)이 있다. 수습력은 모든 힘을 다하여 정화운동을 가행하는 것을 뜻하고 사택력은 모든 진리를 지혜롭게 선별하고 사리를 진리롭게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10) 지바라밀(智波羅蜜) : 지바라밀은 일체의 법을 관찰하여 승의(勝義)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세속에 있는 모든 것과 중생의 근기까지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보살이 수행하는 십바라밀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보살은 자량위의 수행을 할 때부터 육바라밀 내지 십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며 유식학에서는 십바라밀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모든 수행을 집약한 수행관이며 이 바라밀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사회를 불국토(佛國土)로 건설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한 수행으로 말미암아 본래 소유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장애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번뇌가 없어지고 동시에 모든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번뇌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불성에서 발휘되는 지혜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며 무애자재하게 작용을 하게 된다. 망식이 강하면 지혜가 약해지고 지혜가 강해지면 망심이 약해진다는 말과 같이 자량위 때부터 지혜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여 구경위에 도달해서는 망식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혜만 원만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들 지혜를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이고,

묘관찰지는 제6의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7말나식이 정화되어발생하는 지혜이며

대원경지는 제8아라야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주의 진리를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불타의 삼신(三身)과 더불어 작용하게 된다.



불타는 사지(四智)를 구족하고 삼신을 구족하였으며,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이들 삼신을 통하여 불타의 자비가 육도의 중생들에게 미치기 되며 삼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법신(法身)은 자성신(自性身)이라고도 하며 이는 진여(眞如)의 체성이며 진리적인 몸을 뜻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만법의 체성이며 모든 진리의 의지처이고 여러 덕(衆德)의 집합체인 것이다.




2) 보신(報身)은 삼 겁(三劫)을 수행하여 과보로 받은 불타의 몸을 말한다. 불타는 과보를 받아 수용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한다. 십바라밀을 비롯하여 여러 공덕으로 받은 과보를 혼자서만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베풀어주는 자비의 실천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수용신은 여래의 대원경지와 제팔식의 진여성을 말하며 이는 여래 자신만이 수용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다.

타수용신은 십지보살들이 수용하는 불타의 덕성을 말하며 이는 평등성지에 의하여 발생하는 응신(應身)을 뜻한다.




3) 화신(化身)은 여래가 하급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몸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성소작지를 변현하여 나타내는 불신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화신을 변화신(變化身)이라고도 한다. 변화신은 자량위의 보살과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등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에 거주하는 불신을 말한다.




위에서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 등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이들 수행사상은 이타적인 원리로 구성되었으며 이타적인 수행을 통해서만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하여서도 다시 보신과 화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불타의 자비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근본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유식학이 흥기하여 전래된 역사와 팔식을 비롯하여 여러 교리를 설명하였고,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나타내어 성불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사상도 함께 설명하였다.

이들 내용들은 비록 자세하지는 못하더라도 유식학의 길잡이는 되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 체계있고 자세하게 쓴 글을 발표할 것을 기약하고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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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식학의 수행설(修行說)






위에서 유식의 법상(法相)에 대해서 대략 설명하였다. 법상은 마음의 현상과 물질의 현상을 말한다. 그러한 현상에는 반드시 진여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을 마음의 실성(實性)이라고 이름한다.

위에서 마음이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眞如性)에 대한 설명을 삼무성(三無性)의 설명으로 대신하였다. 이러한 삼무성의 진리를 완전히 깨닫기 위하여는 보살의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의 목적은 팔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얻는데 목적을 두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 수행의 절차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 등 오위로 나누어 설명하게 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량위(資糧位)의 수행






자량위는 수행의 자질을 향상하는 수행위를 말하며 이 수행위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진리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보살들의 수행을 뜻한다.

자량위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하면서 마음을 닦는 것이며 수행의 절차에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등 삼십위의 단계가 있다. 이들 삼십위를 모두 합쳐서 자량위라고 하며 자량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를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이 되는 번뇌는 정화되지 않으므로 매우 초보적인 수행위에 속한다.

그리하여 자량위에서는 미세하고 깊이 집착하는 마음은 정화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번뇌의 뿌리인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번뇌형상이 남아있게 된다. 능취와 소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망심과 분별심의 번뇌망상을 야기하고 있음을 뜻한다.









2. 가행위(加行位)의 수행






가행위는 자량위에서 수행하는 마음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수행을 뜻한다. 이 수행은 난(煖)과 정(頂)과 인(忍)과 세제일(世第一) 등 사선근(四善根)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가행(煖加香)은 하품의 심사관(下品尋思觀)을 수행하며 경게에 대한 집착을 정화하는 명득정(明得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한다.

2) 정가행(頂加香)은 상품의 심사관(上品尋思觀)을 닦고 경게에 대한 집착을 정화하는 명증정(明增定)을 수행한다.

3) 인가행(忍加行)은 하품의 여실지관(下品如實智觀)을 수행하고 집착된 경계는 모두 공한 것임을 인가하는 인순정(忍順定)을 수행한다.

4) 세제일법가행(世第一法加行)은 상품의 여실지관(上品如實智觀)을 수행하며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다. 여기서는 선정을 간단없이 수행하는 무간정(無間定)을 닦는다.

이와 같이 가행의 보살행을 실천하면 집착심과 차별심을 발생하는 능취와 소취의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만을 정화하게 된다. 분별기의 번뇌는 후천적인 번뇌를 뜻하는 것이며 여기서 진일보하여 근본이 되는 번뇌를 정화하려면 부단하게 보살도를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통달위(通達位)의 수행






통달위는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자량위와 가행위를 통하여 부단히 수행한 결과 진리의 눈이 트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무분별의 지혜가 발생하여 진여를 체달하고 달관하게 되며 이러한 경지를 통달이라고 한다.

통달은 진리를 통달했다는 뜻으로서 진리를 통달했기 때문에 마음에는 집착과 탐욕을 나타내는 분별심(分別心)이 없어지게 된다.

분별심이 없어진다는 것은 마음속에 견분(見分)의 분별작용이 없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견분의 분별작용이 없어진다는 것은 능취와 소취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인식이 아니라 절대적인 인식이 실현되게 되며 따라서 진여성(眞如性)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을 관찰하게 된다는 뜻에서 견도(見道)라고 한다.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 칭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초지보살 이전의 수행위를 지전(地前)의 수행위라 하고 지전의 수행위를 자량위와 가행위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통달위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초지의 수행위를 뜻하며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를 말한다. 초지보살의 경지는 비록 견분(見分)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별하는 작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분별은 없지만 아직도 반연하는 작용이 있어서 진여를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4. 수습위(修習位)의 수행






수습위는 위에서 말한 통달위에서 정화하지 못한 마음을 더욱 정진하여 정화하는 수행위를 말한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정화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아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아공은 나 자신이 공한 것을 깨달은 것이고 법공은 인연의 법이 공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물은 인연의 집합과 더불어 공동의 노력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지혜로 그 본성을 잘 관찰하면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극미(極微)의 형성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는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으려면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하여야 가능하게 된다. 금강유정은 최상의 선정을 뜻하며 이 선정은 제십지보살(第十地菩薩)의 수행심에만 나타나는 선정이다. 번뇌의 정화는 제6의식과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초지(初地)에서부터 점점 정화되기 시작하여 제칠지(第七地)의 보살수행에서 번뇌장이 정화되고 아집이 단절된다.

그 후 보살은 더욱 수행하여 아직도 단절되지 않은 소지장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법집을 정화하기 위하여 계속 수행하여야 하며 제십지(第 十地)에 진입하여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단절하게 된다.



번뇌장과 소지장이 단절되면 그동안 번뇌의 장애를 받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했던 지혜가 활발하게 나타나서 모든 법체를 확실하게 관찰하게 된다. 그 지혜들을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칭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망식이 정화되면 나타나게 되고, 묘관찰지는 제6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7말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고 대원경지는 제8아라야식의 번뇌종자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도의 수행을 통하여 망식(妄識)의 번뇌가 정화되면 마음의 진여성에 발휘되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는 번뇌장이 정화되면 열반(涅槃)이 실현되고 소지장이 정화되면 보리(菩提)가 발생한다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보리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며 보살도를 수행하는 가운데에 마음의 번뇌가 한하나 정화된 이러한 수행들을 모두 합쳐서 수습위(修習位)의 수행이라고 한다.

수습위의 수행은 초지보살의 수행으로부터 제십지보살의 수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되는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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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무성(三無性)






위에서 삼종자성(三種自性)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삼종자성은 실제로 인연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자성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삼무성의 학설이다.

삼무성의 학설은

변계소집성의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相無性)이라 하고

또 의타기성의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생무성(生無性)이라 하며

그리고 원성실성의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을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삼종자성은 자성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성(無性)이라고 한다.

진여의 무성에 입각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과 생무성과 승의무성 등 세 가지 진리인 것이며 이들 삼무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무성(相無性)



상무성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실상은 본래 자성이 없고 공중의 꽃(空華)과 같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보면 변계라는 말은 두루 집착하면서 생각한다는 뜻이며 번뇌가 있는 마음이 세간의 사물에 대해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집착하는 것을 변계소집이라 한다.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법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며 그 인연법을 지혜롭게 관찰하면 필경에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망심(妄心)은 무지해서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집착심을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망심에 의하여 나타난 모든 모습은 무상한 것이며 결국 없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며 상무성(相無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치를 유식학에서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상분은 마음에 나타난 사물의 모습을 뜻하고 견분은 마음 위에 나타난 사물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견분은 사물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집착을 두루 나타내게 되며 그 집착하는 번뇌를 변계(遍計)라 하고 집착되어지는 사물을 소집(所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변계소집은 곧 정화되어야 할 망심의 모습들이며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무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능히 집착하는 것(能取)과 집착되어지는 것(所取)은 모두가 감정만 있고 이성이 없는 정유이무(情有理無)인 것이며 이러한 망심의 작용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하고 변계소집성은 허상이며 임시 나타난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무성(相無性)이라고 한다.









2) 생무성(生無性)



생무성(生無性)은 정신계와 물질계가 모두 인연에 의하여 생기하는 것이며 자연생이 아니라 인연생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물질은 지, 수, 화, 풍 등의 인연을 맺어 형성된 것을 말한다. 지(地)는 물질의 견고한 성질(堅性)이며 수(水)는 물질안의 물기운을 뜻하고 화(火)는 물질안의 불기운을 뜻하며 풍(風)은 물질안의 동력(動性)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성질들이 원인이 되고 연(緣)을 만나면 물질의 개체가 형성되므로 이것을 인연의 모임이라고 한다. 인연이 집합하여 조성된 모든 사물은 변천하여 해산하게 되며 결국 본래의 성질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연의 모임인 개체(依他起性)는 자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의타기성은 자연생(自然生)이 아니라 무상(無常)한 것이며 무아(無我)한 것이라고 하며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인연이 집합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성(性)이 없다고 보지 않으며 여기에는 염분의타(染分依他)와 정분의타(淨分依他)의 성질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염분의타는 분별심의 인연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정분의타는 청정심으로 이루어지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뜻한다.

이와 같이 생무성(生無性)은 환사(幻事)와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여러 인연에 의탁하여 출생한 것은 무성(無性)하다는 이치를 설명한다. 인연법은 망집(妄執)과 같이 자연성(自然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설(假說)로 무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연생은 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3) 승의무성(勝義無性)



승의무성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진리를 더욱 나타내는 학설이다.

원성실성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의하여 나타나는 진여성(眞如性)을 뜻한다.

진여성은 있는 것(有)과 없는 것(無)에 치우치지 않은 성질을 말하며 중도적인 진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망심의 반연처가 아닌 것이며 변계소집성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연에 입각하여 형성된 의타기성(依他起性)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이를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라고 칭한다.

원성실성은 인연법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것도 아니고 또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닌 것이며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연의 진리를 유지해 가고 있는 성질을 뜻한다.

이와 같이 인연법은 원성실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원성실성의 인연관계를 초연한 승의무성(勝義無性)의 진리가 있다.



예를 들면 큰 허공에 비록 여러 생각이 두루두루 차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색(衆色)은 자성이 없이 나타나듯이 승의무성도 원성실성과의 관계가 그와 같은 것이다.

승의는 모든 법의 승의를 말하며 그 법의 승의는 진여(眞如)를 말한다.

진여의 진(眞)은 진실한 것이며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여(如)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변역(變易)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진실은 일체의 위치에 부여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 성질은 변천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진리가 온 세상에 충만해 있다는 것이며 이를 일진법계(一眞法界)라고 하며 승의무성이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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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종자성(三種自性)과 삼무성(三無性)






유식학에서는 삼종자성(三種自性)과 삼무성(三無性)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들 학설은 유식학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그리고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에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원전의 학설을 요약한 것이 세친의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이다.

유식삼십론의 게송(偈頌)을 주석한 것이 [성유식론(成唯識論)]이다.



이와 같이 삼종 자성과 삼무성에 대한 학설이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다.

삼종자성의 내용에 의하면 우리 마음인 식(識)을 떠나서 외부세계에서는 따로 진실한 경계(實境)가 없다는 사상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등을 말하며 그 세 가지 삼종자성과 삼무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변계소집성은 인간은 아집과 법집 등의 번뇌를 야기하며 생활하는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 의타기성은 인간의 정신생활과 그 밖에 있는 외부의 물질계를 포함한 모든 자연계는 유일한 원인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다인(多因)과 다연(多緣)이 집합하여 성립하였음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 원성실성은 변계(遍計)의 번뇌는 허구성이며 의타(依他)의 인연이 집합하여 성립된 삼라만상도 일시적 존재(假有0이며, 오직 진여성(眞如性)만이 영원한 존재이며 진실되고 또 만물의 체성(性)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삼종자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하나의 자성(自性)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삼무성설이다.



삼무성(三無性)이란

* 모든 번뇌의 성질은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상무성(相無性)

* 모든 것은 인연의 모임이고 자연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 체성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생무성(生無性)

* 본래 진리는 허공과 같이 고정된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승의무성(勝義無性)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삼종자성과 삼무성은 모든 번뇌와 물질 그리고 정신계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관찰케 하고 깨닫게 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이 삼종자성과 삼무성은 앞에서 설명해 온 모든 교리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며, 동시에 진리와 비진리성을 잘 분류하여 설명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들 삼종자성과 삼무성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삼종자성(三種自性)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의 현실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그 진리성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교리이다. 세 가지 성질이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각각 다른 내용으로 설명된 것이 삼종자성의 특징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삼종자성(三種自性)






1)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의 변계는 주변계탁(周遍計度)의 뜻이다. 주변계탁은 진리를 두루 착각하고 집착하며 인식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제7말나식과 제6의식 등의 마음이 진실하고 초연한 진리와 그리고 인연의 모임에서 형성된 삼라만상(諸法)에 대해서 그 진리성을 망각하고 오히려 아집과 법집 등의 집착을 나타내어 지말번뇌까지도 두루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교학에서는 능동적으로 망상을 나타내는 능변계(能遍計)와 수동적으로 집착되고 계탁(計度)되어지는 소변계(所遍計)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능변계는 제7말나식이 제8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을 능히 망각하고, 또 진실성을 망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아라야식의 견분이란 아라야식의 체성에서 나타나는 작용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체성의 작용을 진실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로 망각(妄覺)하여 아집과 법집을 야기함을 뜻한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체성이란 진여성(眞如性)과 불성(佛性) 또는 무아성(無我性) 등을 말하며 이를 계교(計較)하고 사탁(思度)한 것을 계탁(計度)이라 한다.




그러므로 계탁은 비진리적인 생각으로 진리를 대하거나 사물을 반연하는 심리작용을 뜻한다. 다음으로 제6의식이 육경(六境)을 상대로 능히 계탁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주변계탁이라는 말과 같이 주변(周遍)을 두루두루 어떤 것이나 다 상대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변계탁은 제6의식이 어떤 대상이든지 두루두루 상대하여 선(善), 악(惡), 무기(無記) 등 삼성으로 구별하며 인식함을 뜻한다.

그러나 제7말나식은 오직 아라야식의 견분만을 상대로 아집을 야기하기 때문에 계탁의 뜻은 있지만 주변의 뜻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주변계탁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심식의 변계에 대하여 여러 학자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즉 난타(難陀)와 호법(護法) 등은 능변계의 마음은 오직 의식과 말나식에만 있을 뿐이고,

그 밖에 전오식(前五識)과 아라야식 등 오, 팔식(五, 八識)에는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안혜논사(安慧論師)는 모든 마음에는 허망분별(虛妄分別)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능변계와 망집심(妄執心)의 작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의식과 말나식을 제외한 전오식과 아라야식에는 능변계의 뜻이 없다고 한다면, 허망분별의 뜻도 없다고 보아야 하며 허망분별의 뜻이 없다면, 이는 곧 유루심(有漏心)이 아니라 무루심(無漏心 )으로 보아야하는 모순이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혜논사는 유루란 이미 허망분별을 자성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오식과 아라야식은 비록 계탁과 같은 근본번뇌는 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그 자성에 대하여 유상(有相)의 망상을 나타내는 미세한 분별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안혜논사는 심식 전체의 분별심을 말할 때 전오식과 아라야식은 법집만 있고, 말나식에는 인집(人執)만 있으며 의식에는 아집 그리고 법집 등 이른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와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등을 함께 구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심식의 능변과 집착의 내용에는 각 학자마다 의견이 서로 다르다.

여기서 아집은 인연의 법칙에 의하여 형성되는 연기법(緣起法)을 망각하여 주관적인 실체를 고집한 작용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법집은 사물의 개체 하나하나가 인연의 창조임을 망각하고 그 무명에 의한 집착을 야기한 것을 말하여 법집이라 한다.

우리 인간은 마음의 자성과 내외의 물체에 대한 무지 때문에 아집과 법집이 공한 것임을 망각하고 동시에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이를 통털어서 변계라고 한다.



호법논사는 이러한 능변의 사상을 심식별로 분류하여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 네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심식이 두루 활동하되 계탁하지 않은 것[遍而非計]을 들 수 있다. 이때의 심식은 무루의 제식(無漏諸識)과 유루의 선식(有漏善識)을 말한다.

* 심식이 계탁은 하되 두루두루 광범위하게 계탁하지 않은[計而非遍] 심식이 있는데, 이는 곧 유루의 제7말나식(有漏諸七末那識)이다.

* 두루 계탁하고 또한 두루 주변하며[亦遍亦計] 활동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는 유루와 염오를 겸한 제6의식을 말한다.

* 심식 가운데 두루 활동하지도 한고 두루 계탁하지도 않은[非遍非計]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유루의 전오식(前五識) 및 아라야식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모든 심식의 계탁과 더불어 두루 활동한 것을 매우 명료하게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호법에 의하면 아집과 법집의 지속성은 만약 제6의식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나식은 단절되지 않은 식이기 때문에 항상 범부적인 집착이 유지되며 동시에 여타의 심식(諸八識)에게도 염오케 하므로 이들을 일러 유루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계탁심(計度)에 의하여 집착되어지는 대상은 어떤 내용들인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계의 모든 심식은 인연법에 의하여 생기하는 자성(依他起自性)을 망각하고 이를 집착하며 두루 계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연법이란 연생법(緣生法)이라고도 하며, 연생법은 정신과 유체 그리고 객관계의 삼라만상이 일인(一因) 또는 일연(一緣)만으로 발생하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고, 다인(多因)과 다연(多緣)이 집합하여 발생되며 또한 창조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생법은 실제로 집합되어 있는 현상계이기 때문에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잘 관찰하면, 임시 모여 있는 것뿐이며 구경에는 무상하게 흩어져 없어지고야 마는 무(無)가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와 공(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식정(識情) 위에 나타나는 영상(影像)을 실제로 있는 것인 양 착각하여 실재의 나(實我)와 실재의 법(實法)이 있다고 집착한 것을 무명이라 한다. 범부들은 이것을 아집으로 하고 법집으로 하는 미망의 생활이 시작되는데 이러한 미암은 제6의식과 제7말나식에 의하여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미망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인연법에 대하여 망분별(妄分別)과 망정(妄情)에 의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집착하는 현상을 당정현상(當情現相) 또는 중간존경(中間存境)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망각된 분별에 의하여 인식되는 실아와 실법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한다. 동시에 이들은 마음 가운데 나타나는 이른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의 연생법(緣生法)을 집착한 계탁분별(計度分別)의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또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변계소집성은 인연가유(因緣假有)의 법을 착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체성이 없는 것이며, 또한 체성이 도무지 없는(體性都無) 것이다.




그리고 또 변계소집성은 허구의 것으로서 정만 있고 진리성은 없다고 해서

이를 정유리무(情有理無)라고 한다.

비유를 들면 이는 마치 털이 없는 거북이에게 털이 있다고 하고, 또 뿔이 없는 토끼에게 뿔이 있다고 하는 비진리적인 판단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허구의 무지를 가리켜서 구모토각(龜毛兎角)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무지를 비유하여 깨닫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계의 현상이 마음에 비쳤을 때의 영상(相分)을 잘못 판단하여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견분의 집착(見分執着)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변계소집성의 현상을 상분과 견분의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에 비쳐지는 영상이 상분과 견분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분별되는데 그 분별되는 영상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착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와 비진리는 마음에 의하여 조작되는 것이며 이를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한다. 그러나 진여의 경지는 망심의 반연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의타기성(依他起性)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물질과 정신(色心)의 현상 무두가 중연(衆緣)에 의탁하여 생기하기 때문에 이를 의타기라고 한다.

중연이란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 등 사연(四緣)을 말한다.

이들 사연이 서로 관계지어져야 일념(一念)의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생각은 연에 의하여 발생한 결과이므로 이를 연소생(緣所生)이라 하며, 이들을 종합하여 말하면 중연이 생기는 결과라는 뜻으로 중연소생기(衆緣所生起)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중연이 모여 발생하고 생기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내용을 정신의 생기와 물질의 생기로 나누어 보면 연(緣)내용이 서로 다르다.




첫째로 정신(心法)과 정신작용(心所法)이 생기할 때는 위에서 말한 사연(四緣)이 모두 구비하여야 가능하다.

둘째로 물질계(色法)가 생기할 때는 반드시 인연과 증상연 등 이연(二緣)만 구비하여도 생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신계와 물질계는 인연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어떠한 것도 설사 일법(一法)이라 할지라도 자연생법(自然生法)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연생법(緣生法)은 색법과 심법은 모두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의타기성은 심상(心上)에 임시로 세워진(假位) 현상에 지나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거나 상주법이 아니라, 환(幻)과 같은 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여환가유(如幻假有)라고 한다.




이러한 의타기성을 분류하면 염분(染分)과 정분(淨分)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백법론(百法論)에 의하여 분류해 본다면

심왕(心王) 8, 심소(心所) 51, 색법(色法) 11,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24 등 94법은 유루연생법(有漏緣生法)이라 하며 또한 염분(染分)이라 한다.

다음 정분의 의타(淨分依他)는 무루의 유위법(有爲法)을 모두 포섭하고 또 원성실성(圓成實性)인 진여법도 모두 다 정분에 속한다.

이와 같이 의타기법은 유루와 무루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의타기성의 진리를 지혜롭게 관찰하지 못하므로 변계소집성을 야기하여 많은 집착을 일으키며 생사에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롭게 관찰하면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며 동시에 진리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3) 원성실성(圓成實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원만하게 성취하며 진실함을 구족한 것을 뜻한다. 그 뜻을 알아보면 먼저 원만(圓滿)은 진여의 체가 모든 법에 주변한다는 뜻이고, 성취(成就)는 진여의 체가 항상 지속(常住)하여 생과 멸이 없고(不生不滅) 또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실(眞實)은 진여의 체가 모든 것의 진리가 되고 또 모든 것(諸法)의 실성(實性)으로서 허망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성실성은 곧 불성(佛性)이며 모든 중생의 본성으로서 헛되지 않고(非虛謬) 또 그 체성이 전혀 없지도 않다. 이러한 내용들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도 칭한다.



무위법에는 식변무위(識變無爲)와 법성무위(法性無爲)가 있다.

식변무위는 능히 활동하는 정신세계에서도 불변의 정신이 있는 것을 말하며 능연식(能緣識)의 상분에 사물의 영상이 보여도 무위와 같이 변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행위인 유위(有爲)의 활동을 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정신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를 식변무위라고 말한다.

다음 법성무위는 마음이 변하여 생긴 상분(識變相分)이 아니고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자체를 말한다. 여기에는 폐전진여(廢詮眞如)와 의전진여(依詮眞如)가 있다.




폐전진여는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고 때묻은 사고로도 미치지 못하는 진여를 말한다. 이는 오직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만이 증지(證智)할 수 있는 절대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볼 때 진여 또는 무위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진여인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진여를 이언진여(離言眞如)라고도 한다.

다음 의전진여(依詮眞如)는 진여의 진상을 규명하여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진여를 원만. 성취. 진실 등의 내용을 따서 원성실성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진여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언어를 빌리지 않으면 안되므로, 이를 흔히 의언진여(依言眞如)라고 한다.




이상으로 원성실성의 뜻을 살펴보았는 바, 여기에는 다시 상무상문(相無常門)과 누무루문(漏無漏門)을 함께 설명하는 원성실성의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의타기성인 현상계는 무상(無常)과 유위(有爲) 등 생멸무상(生滅無常)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인연법의 집합과 인연법의 해산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들 법들은 틀림없는 진리의 운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상주성과 무위성의 진여가 뒷받침하여 불변의 진리가 유지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을 원성실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진리이다.




다음으로 누무루문(漏無漏門)의 교리는, 유루(有漏)는 인연법에 의하여 전개되므로 이는 의타기성에 속하고 무루와 무루유위도 원성실성에 속한다. 이들 누(漏)와 무루는 그 체성이 염오(染汚)된 것이 아니며 항상 전도(顚倒)를 떠나 존재하기 때문에 진실만이 있고 또 두루 모든 경계를 반연할 때도 염오법을 떠나 항상 진여만을 반연하게 된다. 이러한 진여의 세계를 실현하고 사는 세계를 불보살의 세계라고 한다.




이상으로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그리고 원성실성의 삼종자성을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변계소집성은 망정(妄情)으로 미혹하여 실아(實我) 실법(實法)을 나타낸 것뿐이며, 실은 허구의 것이므로 이는 감정만 있고 이성은 없는 것으로서 이것을 정유이무(情有理無)라고 한다.

다음 의타기성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하는 현상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가유(假有)인 것이다.

그러나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의 실성으로서 영원히 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진유(眞有)를 유지시켜 주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일체가 아니면서 또한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서 이 둘은 진실된 이치만을 보존하고 있다고 해서 이유정무(理有情無)라 한다.




이상과 같이 일체의 만유를 삼성으로 분류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삼종자성이며 이러한 사상에 의하여 상무성(相無性) 등 삼무성의 사상이 성립된다.

즉 변계소집성은 본래 번뇌는 체상(體相)이 없는 것이므로 상무성이고,

의타기성은 중연(衆緣)에 의하여 생기하며 자연생이 아니므로 생무성(生無性)이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근본 무분별지의 경계이며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승의(勝義)를 항상 구현하고 있으므로 이를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삼종자성의 진리를 관찰하며 수행하면 종합적인 진리관이 더욱 뚜렷해지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