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엇인지 알면 이러한 의문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인들은 말씀하시기를.......
거북이의 털을 말하고 토끼의 뿔을 말했습니다.
제가 만약 거북이의 털이 무슨색이냐고 묻는것과,
토끼의 뿔은 몇개가 나느냐고 묻는다면 물음 자체가 이상하겠지요.
이러한 의심과 논란을 일컬어 희론이라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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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生前)이든 사후(死後)든 우리의 육신과 마음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육신과 마음의 집합체인 오온(五蘊)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합니다.
경에 이르기를 오온 또는 제법(諸法)의 존재 양상이 바로 모두 공(五蘊皆空,)하며 따라서 이와 같이 제법이 공한 모양(諸法空相)은 불생불멸하며 불구부정하며 부증불감하다 했습니다.
모든 존재가 공한 모양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가 시절인연에 따라 잠시잠깐 머문 듯 있어 보이는 것이지 결코 고정불변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諸行無常 諸法無我)
즉 공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떤 고정불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無有定法).
이 말을 바꾸어 음미하면 정한 바 있음이 없는 공의 입장에서는 무엇이든지 되고자 한다면 그 의지대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공(空)하기 때문에 인연을 만나면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듯이 무엇이 생긴 듯 보이게 되고 인연이 사라지면 또한 한조각 뜬구름이 멸한 듯 안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가도 있게 되며, 있다가도 없어지게 되는 것은 존재의 실상이 모두 연기가 가능한 공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불구부정(不垢不淨)하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하며 불래불거(不來不去)한 동시에 역생역멸(亦生亦滅)하며 역구역정(亦垢亦淨)하며 역증역감(亦增亦減)하며 역래역거(亦來亦去)한 것입니다.
여기서 불생불멸(不生不滅) 역생역멸(亦生亦滅)이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동시에 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하 역래역거(亦來亦去) 까지의 해석은 이와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의 실상이 바로 공입니다.
즉 있는 그대로 공한 것이며 텅 빈 것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있는 것이기도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가능한 까닭이 바로 제법의 실상이 이와 같이 나라 할만한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따라서 시절인연에 따라 유(有)와 무(無)를 초월하여 생주이멸(生住移滅)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천백억 화신의 공한 모양으로 있음이 없이 나투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산 것과 죽은 것이 모두 공한 성품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으니 어찌 있고 없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생전(生前)이든 사후(死後)든 우리의 육신과 마음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의문이 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렇게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바로 정견(正見)을 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에 빠져 헤매는 까닭입니다.
진정하게 공한 것은 묘하게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고 해서 있다하고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 잡혀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한다거나 상대를 무시를 한다거나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공의 차원은 본래 정한 바가 있음이 없는 까닭에 시절인연에 따라 있는 모양이든 없는 모양이든 그 무엇으로도 변화, 발전하여 나툴 수 있다는 것입니다(不守自性隨緣成).
불교의 입장에서 말하는 공(空)이나 무(無)가 단순히 없는 것이라면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할 필요도 없고, 잘 살기 위해 더 이상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이나 무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형태가 있고 없음을 떠나 시절인연에 따라 그 무엇이로든 다 될 수 있다는 말이기에 부지런히 수행을 하면 언젠가 그 공덕이 현행하는 것이며 또한 지혜의 눈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자라면 인생을 소극적이고 비판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활기차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색즉시공(色卽是空)한 동시에 공중시색(空中是色)한 이러한 실상을 바로 믿고 이해하고 닦아 체득하는 것이 곧 반야지혜이며 이 반야지혜를 체득하여 제반 문제를 해결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보람된 삶을 제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영위하고자 하는 것(해탈 열반)이 바로 수행입니다.
색과 공의 관계는 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거나 다르지 않다 함(不二, 不異)을 제대로 깨우쳐야 현실에 있으면서 현실에 집착되지 않고, 현실에 집착되지 않으면서 현실을 중요하게 인식하게 됨으로써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하고 상구보리(上求菩提)하며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보다 폭 넓은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단순한 현실 부정이나 현실 도피나 현실 집착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되 활발발하게 자유자재한 경지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니 모름지기 수행인이라면 사후에 마음이 있느니 없느니, 태양을 바로 보느니 등지느니, 그림자를 보느니 마느니 하며 쓸데없이 정신을 혼란시키지 말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각자 생계를 열심히 꾸리는 틈틈이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여 있고 없음에 자유로운 자유인이 되도록 정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글자만을 �지 말고 한 생각 일어남을 돌이켜 비춰 본다면 나의 말들이 모두 외도의 마설이요 티끌임을 알 것입니다. 황금 가루가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눈에 들면 티끌일 뿐이라 하였으니 부처가 말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입에서 연꽃이 피는 도리를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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