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지눌(1158~1210)은 송광사에서 11년간 머물면서 수선사를 마련
정혜(定慧)로써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저서로는 진심직설(眞心直說) 등이 있다.
1. 불타는 집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째서 거기 머물며 긴 고통을 받을 것인가.
윤회를 면하려면 부처를 찾아야 한다.
부처는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랴.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거짓이어서 생(生)이 있고 멸(滅)이 있지만,
참으로 허공과 같아서 끊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뼈와 살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뒤덮는다.’라고 한 것이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법을 멀리 성인들에서만 구하려 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태우고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며, 피를 뽑아 경전을 쓰고 밤낮으로 눕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고
팔만대장경을 줄줄 외우며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마음을 알면 수많은 법문(法門)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다'하시고,
'모든 중생의 갖가지 허망 된 생각이 다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인
청정한 본심)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이며, 미래에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구하지 말 것이다.
마음의 바탕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을 떠나면 곧 의젓한 부처이다.
2. 불성은 어딘가
"만약 불성(佛性)이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몸 가운데 있으면서 범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저는 어째서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네 몸 안에 있는데도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차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무슨 물건인가?
또 이 육신은 地 水 火 風의 네 가지 요소(四大)가 모인 것이므로 그 바탕이 미련해
식정(識情)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깨달아 알겠는가.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그것이 바로 너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臨濟)스님이 말씀하기를 '사대(四大)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런데 다만 네 눈앞에 뚜렷이 홀로 밝은 형상 없는 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형상 없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이며 너의 본래 마음이다.
즉 불성이 네 안에 버젓이 있는데 어찌 밖에서 찾으려하느냐.
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옛 성인들의 도(道)에 든 인연 몇 가지를 들어
의심을 풀어 줄 테니 진실인 줄 믿어라.
옛날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스님은 성품을 보았습니까?'
'성품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그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 버젓이 작용하는데도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내게 있단 말입니까?'
'왕이 작용한다면 볼 수 있지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체(體)도 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작용할 때에는 몇 군데로 출현합니까?'
왕이 그 여덟 군데를 말해 달라고 하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으면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고, 발에
있으면 걸어 다니며, 두루 나타나서는 온 누리를 다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精魂)이라 부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이 열리었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께 물은 일이 있었다.
화상은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큰스님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닦아가야 합니까?'
'한 꺼풀 가리는 것이 눈에 있으니 헛꽃[空華]이 어지러이 지는구나.’
그 스님은 이 말끝을 알아차린 바가 있었다.
옛 성인의 도에 드신 인연이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힘들지 않았다.
"이 법문으로 말미암아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그는 옛 성인과 더불어 손을 마주잡고 함께 갈 것이다."
3. 신통변화
"앞에 말씀하신 견성(見性)이 참으로 견성이라면 그는 곧 성인입니다.
신통변화(神通變化)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요즘 수도인들은 한 사람도 신통 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너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마라.
정(正)과 사(邪)를 분간하지 못함은 어리석어 뒤바뀐 것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곧 잘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에 게으른 생각을 내어
도리어 자격지심에 떨어지는 수가 있으니 네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데에 있는 것이다.
도를 배워도 앞뒤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본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소견이지 수학(修學)이라 이름 할 수 없다.
자기를 그르칠 뿐 아니라 남까지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대체로 도에 들어감에는 문이 많으나
크게 나누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 점수가 가장 으뜸가는 근기(根機)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본다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해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곧 깨달아 일시에 단박 도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근기이므로
이 돈(頓)과 점(漸) 두 가지 문은 모든 성인들의 길이다.
예전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를 닦아 이 닦음으로 말미암아 증득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신통변화는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서 점점 훈습(薰習)해 나타난 것이지
깨달을 때에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이치는 단박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을 따라 번뇌를 녹일 수 있지만
현상[習氣]은 단번에 제거될 수 없으므로 차례를 따라 없애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봉 징관(780~840)스님이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뜻을 깊이 밝혀 다음같이 이른 것이다.
'얼음 못이 모두 물인 줄은 알지만 햇볕으로써 녹일 수 있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은 깨달으나 법력(法力)으로써만 훈수(薰修)할 수 있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만 대고 씻을 수 있고, 망상이 다해야만 마음이 신령스레 통하여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현상의 신통변화는 하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닦아 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신통이 자재한 사람의 경지로는 오히려 요괴스런 짓이고,
성인의 분수에는 하찮은 일이다.
비록 나타날지라도 요긴하게 쓰지 않을 것인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을 때 한량없는 묘용(妙用)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하니 이와 같은 생각은 이른바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본말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알지 못하고 불도를 찾는다면 모가 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으리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미리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나 부처의 종성(種性)을 끊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깨달음을 믿지도 않아 신통 없는 이를 보고 업신여긴다.
이는 성현을 속이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4.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이 모든 성인의 길이라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에 있어 이미 단박 깨달음이었다면 왜 점수를 빌리며,
닦음이 점차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 합니까?
돈과 점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범부가 미(迷)했을 때는 사대(四大)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게 된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는 지혜 성품(無漏知性)이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그러나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름없음을 깨달았으나 끝없이 익혀 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없애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하여 공(空)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胎)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라 한다.
이를테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얼마동안의 세월이 지낸 뒤에야
비로소 어른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다만 네 자심(自心)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 앎을 구한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면서 다시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없어지지 않는 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 때문에 또 앎을 구할 것인가.
만약 앎을 구하고자 한다면 문득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性)이다."
5. 본래면목
"상근기는 들으면 곧 쉽게 알지만, 중하근기는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방편을 말씀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알아듣게 해 주십시오."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네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생각을 쉬고 내 말을 들어라.
모든 법이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이 본래 고요하고 티끌세상이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法)이 다 공(空)한 곳에는 영지(靈知)가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공적(空寂)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 너의 본래 면목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法印)인 것이다.
이 마음을 깨달으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참으로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
걸음걸음이 삼계를 뛰쳐나와서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갖추게 되며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네가 이와 같다면 참 대장부이니 평생에 할일을 마친 것이다.”
“제 분수대로 보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입니까?”
"네가 지금 내게 묻는 것이 너의 공적영지 하는 마음인데
왜 돌이켜 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느냐?
내 이제 네 분수를 따라 바로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 테니 너는 마음을 비우고 내 말을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들으며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말해 보아라.
만일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왜 사람이 한번 명을 마치면 눈은 스스로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혀는 말하지 못하며,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며, 발은 걷지를 못하느냐?
그러므로 알아라.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너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니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네 가지 요소의 성질이 공하여
마치 거울에 비친 형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분명히 알며 어둡지 않고 한량없는 묘용(妙用)을 통달할 것인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름이라'고 한 것이다.
또 이치에 들어가는 데는 길이 많으나 너에게 한 문을 가리켜 근원에 들어가게 하겠다.”
“네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듣습니다."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 보아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느냐?”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온갖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관세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내가 다시 너에게 물어보겠다.
네가 말하기를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온갖 분별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할 수 없다면 그때는 허공이 아니겠느냐?”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체(體)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말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거라.”
6. 지금 나를 구제 하려면
과거 윤회의 업을 따라 생각하면,
몇 천겁을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못 만나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그 얼마인가.
생각하면 긴 슬픔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게을리 지내다가 다시 그전 같은 재난을 받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도 닦는 길을 어둡지 않게 한 것인가.
참으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남이요 겨자씨가 바늘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가 만약 물러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을 때 한 마디 불법을 들어 믿고 받들어 괴로움을 벗고자 한들
어찌 다시 얻게 될 것인가?
위태로운 데에 이르러서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바라건대 도 닦는 사람들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하여 돌이켜 살필 줄을 알아야 한다.
무상(無常)이 참으로 빨라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저녁노을과 같다.
오늘은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뜻에 새겨 둘 일이다.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지금 닦지 않는다면 만겁에 어긋나 등질 것이요, 힘써 닦으면 어려운행이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허! 요즘 사람들은 배고파 음식을 대하고도 입을 벌릴 줄 모르며,
병들어 의사를 만나고서도 약을 먹을 줄 모르니 아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슬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창해(滄海)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내랴.
그러므로 말세에 이 법문을 듣고 희귀한 생각을 내어 믿고 받아가지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겁에 모든 성인을 섬기어 갖가지 선근을 심었고,
깊이 지혜의 바른 인연을 맺은 으뜸가는 그릇(根性)임을 알아라.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기를
'이 글귀에 신심을 내는 이는 한량없는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또 '대승(大乘)을 발한 이를 위해 설하며 최상승(最上乘)을 발한 이를 위해 설한다.'라고 하였다.
원컨대 도(道)를 구하는 사람들은 미리 겁을 내지 말고 용맹한 마음을 낼 것이다.
만일 수승함을 믿지 않고 하열함을 달게 여겨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닦지 않으면
비록 숙세의 선근이 있을지라도 선근을 끊는 것이므로 더욱 어려운 곳으로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렀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한번 사람 몸을 잃으면 만겁(萬劫)에 돌이키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마땅히 삼가 해야 할 것이다.
지혜로운 이가 보배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고 어찌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할 것인가.
보배를 얻으려면 가죽주머니를 잊어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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