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節因緣 시절인연

2008. 7. 11. 17: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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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節因緣 시절인연
 
무릇 공부는 시절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선가에서는 종종 말을 합니다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는 수좌들에게 있어서 훌륭한 스승이나 도량 도반
등의 조건이 잘 맞아 떨어 지면 공부는 저절로 익어 져서 어느 한 순간 
칠통을 타파하고 본분사를 해결한다고 하니 이것 역시 그냥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게 노력해 온 시절 인연이 닿아야 하는가 봅니다
 
억지로 용을 쓰고 죽기 살기로 애를 먹일 때는 한걸음도 공부에 진척이 없어
이 공부가 마치 원수 보이듯 하더니 한순간 마음을 비우고 쉬는 그 순간
번쩍 스치고 지나는 섬광처럼 공안의 단초가 보일 때 비로소 그 동안의 애쓴 공부가
모두 헛일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스승들께서는 그와 같은 때에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 공부 점검을 하고
마치 막 입태된 아기의 어머니가 온갖 것에서 조심에 조심을 더하듯
보임 공부를 지어 가라 하십니다
어디 화두를 참구하는 수좌들 뿐이겠습니까
 
염불 행자나 간경 학인들 주력으로 정진하는 수행자들처럼
우리 불교 공부하는 이들 외에도 일반 사회에서의 공부나 연구실에서의 
실험등 모든 일들이 수천 수만번의 노력과 단련을 거치지 않고
손쉽게 성취되는 일은 없다 할것입니다
 
중국에 배휴라는 정승이 있어서 나름대로 불법 공부를 하며 한 사찰을 찾
았습니다. 
그 사찰의 선대 조사를 모신 영정을 보며 옆에 있는 주지 스님에게
'영정은 여기 있는데 스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주지 스님은 얼른 답을 못합니다.
혹시 답을 하실만한 스님이 계신가 물으니 묵묵히 앉아 좌선만 하는 스님이 
계신데 그 스님한테 물으라 합니다
스님이 오시고 배휴는 그같은 일을 설명하자
수좌 스님은 배휴더러 아까 주지에게 묻듯이 한번 더 물으라 합니다
배휴가 '영정은 여기 있는데 스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다시 묻자
스님은 벽력같은 소리로 '배휴야' 하고 부릅니다
 
 정승에 오르고서는 제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경우를 처음 당한 배휴는
온갖 사량 분별이 순간에 끊어 지고 얼떨결에 깜짝 놀라
'예' 하고 크게 대답하는 배휴에게
'그대는 어디 있는고-?' 하고 버럭 소리 치는데서
배휴는 크게 깨닫습니다
 
배휴에게는 아주 귀한 시절인연이 바로 그 순간에 한송이 연꽃으로 
피어난 것이지요. 
그림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묻는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사실 어둑한 사람은 그렇게 물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시절 인연이라는 말은 저절로 다가 오는 것 같은 우연이 아닌
부단한 노력과 정진 끝에 결과로서 만나게 되는 필연입니다.
 
우리는 육근의 구조상 바깥을 향해 보고 듣고 맛보고 하며 '옳으네 그르네' 
'좋으네 낮으네' 하는 등의 습에 매여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바깥에다 관점을 두고  온갖 관심은 바깥에만 있으니
바깥의 반대라 할수 있을 내면의 자기 지신을 확인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소홀할수 밖에 없는 일이 되어 자신에 어두워지고
그 어두운 마음의 눈을 통해 비친 상대를 옳바르게 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육근문으로 들고 나며 출입을 쉬지 않는 망상 번뇌를 돌이켜 쉬면
내면에 구래부동 하고 앉은 자신의 본래 면목을 볼수 있습니다
빈부 귀천 노소 남녀 권세와 지위등을 몰록 놓아 버리고
붉은 고깃 덩어리 위를 자유롭게 출몰하며 온갖것을 짓는 주인공
그 지위도 없고 이름조차 지을수 없는 무위진인을 찾아
걸음없는 걸음을 한발 내밀어 봅시다.
 
세상이 혼탁하다 싶으면 자신의 마음을 맑히는데 힘쓰고
세상이 더럽다 싶으면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요
상대가 미웁다 싶으면 자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상대가 부족하다 싶으면 자신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십시요
세상을 요익코자 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만족이라는 보물로 채우고
세상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스스로 마음을 열어 배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