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법문 7

2008. 7. 17. 13: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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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하신 대중법어/1981년 음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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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盤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이 구절은 앞의 게송에 계속되는 구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멸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

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 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주불멸이라고 하였습 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미래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

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藏刹海), 무진법계, 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

해서 부처님은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삼라만상 일체가 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

문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

다 몇 백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 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항 상 무진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생물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

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

 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

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

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

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모두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土)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

지만 눈감은 사람을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

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알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

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

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눈뜰 필요없

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꼭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

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

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 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

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

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

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그

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

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

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

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

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

리 보고 자꾸만 눈감았다. 눈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

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

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

다. 명경에 끼인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

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

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 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뜰래야 안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

地), 한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

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

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

(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

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

절로 안밝아질래야 안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

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

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

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남을 위해 사

는 데에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 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 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 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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