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方丈 大衆法語 /1981년 음 10월 30일)
지난 수천 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과 시비가 되면서도 완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로 영혼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종교가는 영혼이 꼭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 어느 경론을 막론하고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생전에 지은 바 업(業)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윤회는 우리 불교의 핵심적인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윤회란 것은 확실히 성립되는 것인가? 근래 세계적인 대학자들은 윤회를 한다는 영혼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행동을 잘하게 하려고 교육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근래 과학이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과학도 자꾸 발달함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점차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 열릴 수 있는가?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내려야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 또 신앙생활하는 데에나 불교 포교를 하는 데에, 그리고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 근본적인 토대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세계적으로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이 높고 객관성을 띠고 있는 연구방법으로 전생기억(前生記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두서너 살 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들이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를 해보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생기억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터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애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난 후 일 년 반쯤 되는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우리 집에 가겠다.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네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스루무스'야. 아비스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 테야."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말했습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50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리고는 아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의 일하는 인부들과 싸움이 일어나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구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 그 후 내가 당신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데,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쟁의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 못 하게 하면 웁니다.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습니다. 이 어린애가 가더니 제일 큰 조각으로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 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생에 살던 곳은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간혹 이 동네에 오는 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웬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뛰어나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하지? 내가 또 네 할례(割禮)도 해주지 않더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터키는 회교국으로서 회교 교리상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재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스루무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우는 아이를 달래려면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입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 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지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한 전생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웬 어린애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둥그렇게 되어 쳐다보았습니다. 어린애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애가 중년의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다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생 남편인 '아비스스루무스'인데 저 건너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 하면서 흡사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하는데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 검토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에서도 다수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 준 것이 있었는데 '아비스스루무스'가 죽어 버린 후 그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 돈 빌려 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느 날 돈 얼마를 빌려 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왜 그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 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습니다. 안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아비스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틀림없이 환하게 말하는데, 이것을 누가 어린애에게 말해 줄 것이며 또 어린애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이스마일'은 '아비스스루무스'의 재생이라는 데에 확정을 짓고 보고서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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