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객관세계 스스로 존재할수 없는 인연의 화합 -
- 감각기능 없다면 어떤 대상도 나타날수 없어 -
미주현대불교제공
얼마전 어느 불교대학의 강의에서 바닷물은 왜 짜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를 국민학생 수준의 질문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질문이 될 수 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얼마든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제일 먼저 떠 올릴 수 있는 답변은 중고등학교의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이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무기물이 물 속에 녹아 들게 되는데, 오랜세월 물이 증발하여 농축됨에 따라 바닷물은 높은 농도의 무기물을 포함하게 되고 특히 그중에서도 염화나트륨이라는 성분이 짠 맛을 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어떤 화학물이 들어있기만 하면 짠 맛은 저절로 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이 그렇게 자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아주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사실이 모든 생물에게 보편적일 수는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짠 맛을 감지할 수 없는 생물이 존재한다면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아마 그럴 것 같다). 인간에게는 아주 짠 소금물이라고 할지라도 그 생물은 전혀 짜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위의 대답은 인간의 미각을 전제하여야만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과 관련하여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무지개는 왜 생기는가? 이는 대학교 수준의 물리학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인데, 굴절과 반사의 법칙, 그리고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은 굴절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비가 온 후 공기 중에 물방울이 많이 떠 있으면 태양의 반대쪽 방향에 둥글게 무지개가 뜨는 이유를 위의 설명으로 부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우리의 시각 기능을 전제로 한 답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무지개가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빨강색에서 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빛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빨강색보다 파장이 더 긴 적외선이나 보라색보다 파장이 더 짧은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9가지 색이 될 것이다.
빨강색만을 감지할 수 있는 생물에게는 무지개가 빨강색 만으로 만들어진 원호가 될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로 하늘색만을 감지하는 생물이 있다면, 이 생물은 하늘색과 무지개를 구별하지 못하여 무지개라는 현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시각과 미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른 모든 감각 기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청각에 있어서도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 즉 20에서 20,000싸일클에 해당되는 음만을 들을 수 있다. 그 한 예가 우리는 초음파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후각이나 촉각의 경우에도 비슷한 논의가 가능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감각은 제한적이며 또한 선택적이어서, 인간이 감지하는 생리 한계 내에서 우리의 신체가 그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대상과 화합되어 있어야 지각경험이 나타나게 된다.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만으로 무지개는 생기지 않는다.
적절한 위치에 있는 물방울, 태양, 광학 법칙, 우리의 감지 기능이 모두 화합하여야 한다. 즉 우리의 감각 기능에 대하여 이 감각 기능에 관련되는 감각을 제공하는 객관이 화합하는 경우에 한하여, 우리의 지각경험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지각 경험들이 우리에게 나타남으로써, 이 지각경험을 제공한 대상은 비로소 짜다거나 무지개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엮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엄경에서는 이를 “모든 것이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나고, 인연이 별리 하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였다, 또한 반야심경에서는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였다. 이를 데바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색성향미촉법이 없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안이비설신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안이비설신의가 없다고 한다면 색성향미촉법도 또한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인연따라 화합되었다.
이는 곧 생멸법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객관 세계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이는 객관 세계가 본성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며, 이 문제를 이 글에서는 언급만 하고 자세하게 취급하지 못한 ‘우리의 지각경험에 나타난다’는 문제와 함께 연기론이나 중관 철학과 연관시켜 앞으로 더 다루어보겠다.
이 글과 연관시켜 한 가지 하고싶은 말이있다. 많은 사람이 불교를 어렵다고 한다.그래서인지 불교를 과학과 연관시킬 때에도 현대의 첨단 과학과의 관계가 많이 논의된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는 고전과학으로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는데 현대과학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조명되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첨단 과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과 연관되는 과학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입증해 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할 것 같다. 양형진<고려대 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