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진의 과학불교] 연기 즉 공

2008. 7. 19. 23:28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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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은 독립자존성이 없고 가명에 불과 -
- 결합된 연기요소 흩어지면 공만 남아 -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한다. 이를 공이라 한다. 불타는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생한다고 하였다. 이를 인연생기(因緣生起)혹은 줄여서 연기(緣起)라 하며, 이는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한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연기설로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12지연기(十二支緣起)와 같은 교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무명(無明)에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識)이 있고…생(生)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노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행이 멸하면 무명이 멸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연기설은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생기와 지멸의 인과관계에 관한 가르침이다.
 
 
 또한 연기는 “바퀴라는 부분에 연하여 수레가 있다”라는 것에서 처럼 바퀴라는 부분등이 상호 의존하여 수레라는 명칭이 생겨난다는 소위 상의성(相依性)의 대승철학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불타의 가르침은 일체 존재는 그 스스로 생겨나지 않으며 무아무실체(無我無實體)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조금 잘못 해석하면 불타의 무아선이 우리의 주관적인 관념을 부정하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인연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들 주관이 갖는 실체에 대한 관념은 객관적 여러 요소에 의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이며 그 스스로의 독립자존성이 없는 무아무실체적인 가명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객관적인 제요소는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부파불교(部派佛敎)의 상좌부(上座部)계통에 있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견해로서 아공법유(我空法有)혹은 인무아법유(人無我法有)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설일체유부는 여러 제요소가 삼세에 걸쳐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모두 실유(實有)한다는 삼세실유설(三世實有說)의 교의를 전개하였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우리가 지난 번에 논의하였던 무지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 오늘은 이 문제를 객관 세계의 본성 혹은 객관 세계의 성품과 연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무지개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일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과학자는 물방울에 광선이 비치면 파장이 다른 여러 가지 빛이 어떤 각도로 다르게 굴절되고 반사되는 지를 연구하게 된다.
 
 
 
 
그러나 무지개가 이것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시각감지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에 해당하는 파장의 빛만을 우리 눈은 느낄 수 있으므로 일곱 가지 빛의 무지개가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을 지난 번에 논의하였었다. 이렇게 무지개가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과 태양 광선, 그리고 광선이 지나는 경로에 대한 물리법칙 만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을 분석한다 하여도 이 물방울에서 무지개의 본성을 발견할 수는 없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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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이 물방울은 무지개의 성품 혹은 무지개의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방울에는 무지개의 본성이 없으며, 무지개라는 현상은 여러 가지 제 요소가 무지개가 나타날 수 있게끔 조성됨으로써, 즉 인연이 성립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게 되며 이 때 무지개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촉각의 예를 들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일례로 우리가 매끄럽다고 느끼는 어떤 물질의 표면은 매끄럽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원자 배열을 본다면 그것은 설악산의 바위 능선보다도 더 요철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 요소가 화합하여 우리에게 느껴질 때, 이 물체는 부드럽다는 느낌을 주게 되며, 이로서 이 물체는 부드럽다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렇듯 이러한 논의는 우리의 모든 인지 경험의 원천이 되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전부 성립된다. 이와 같이 그 자체가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모든 요소가 화합하고 연기하여 나타나는 것을 공성(空性)이라 한다.
 
 
 
이를 용수(龍樹)보살은 중론(中論) 제24장 18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공성이라고 한다. 이 공성을 가명이라고도 하며 중도라고도 한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용수보살은 연기와 공성의 등식을 제시하고 있다. 즉 연기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예에서 본다면 무지개나 부드럽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요소의 화합이라는 연기에 의해 현현한 것이다.
 
 
 
이렇듯 일체의 존재가 시간적으로는 원인의 요소에 의존하고, 공간적으로는 같이 존재하는 다른 모든 요소에 서로 의존하게 되므로 공하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상주성(常住性)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중관철학(中觀哲學)의 연기론은 곧 무상, 무아, 공, 중도의 의미를 갖게 된다.
 
양형진<고려대 교수·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