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진의 과학불교] 불생불멸

2008. 7. 19. 23:29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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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체는 순간적 존재…영원불변한 물체 없어 -

 - 양성자 속에 무수한 미립자 매순간 찰라생멸 - 

                                                                     미주현대불교

 

 일체 사물 즉 일체법이 연기이며 무자성이라는 연기무자성공론이 용수보살이 확립한 중관사상의 근본이다. 이 중관사상은 부처님이 설한 중도사상을 계승한 것이요 후에 삼론종은 물론이고 천태종 화엄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파에 그 영향을 미쳤으니, 모든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교의가 된다고 하겠다.

 

중관 사상에 관한 용수보살의 대표적인 논서가 중론(中論)이요, 이 중론의 맨 처음 귀경계에서 밝힌 내용이 팔불중도(八不中道)이다.

 

 이 글에서는 이 팔불중도를 대표하며 반야심경에도 나오는 구절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찰라멸론과 연관시켜 이야기해 보겠다. 연기와 무자성공 그리고 마음에 나타는 연기에 의한 객관 등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하여도, 나에게 이러한 감각을 제공하는 객체는 실재하여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내 눈 앞에 보이는 책상이 실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에게 책상이라는 모습이 보일 것이며, 또 어떻게 책상이라는 관념이 생겨나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일체의 존재자를 인연생기하는 무생한 존재로 보는 무상관이 근본 불교 이래의 기본적 교의라면, 위의 의문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의문은 인도 불교철학에서의 순간적 존재론 즉 찰라멸론의 논의와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찰라멸론이란 우리가 보는 사물이 언뜻 보기에는 순간순간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 순간마다 생멸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의하면 우리가 보는 한 순간 전의 존재와 한 순간 후의 존재는 이 생멸의 과정에서의 원인과 결과 즉 인과로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두 사건이 된다. 그러나 순간적 존재에 관한 이 명제는 이미 그 자체가 우리 지각에 현현하는 것 배후의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어서 우리의 지각에 의해 확인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논리학적으로만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었다. 이 논증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를 설명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를 현대물리학에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지를 논의하고자 한다(다소 까다로운 이 논증을 최대한 간략하게 소개하겠으니 관심있는 분은 인도불교철학책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만약 자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자가 있다면, 이 존재자는 다음 순간에 존속하게 되고 그 다음 순간에도 또 존속하게 되므로, 이러한 존재자는 영원히 존속하게 된다.

 

따라서 사물은 한 순간 존재하고 사라지든지 아니면 영원히 존재하든지의 두 가지의 양상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둘의 중간적인 양상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소중배척논증법(反所證排斥論證法)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찰라멸이다’라는 명제를 찰라멸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확증을 시도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효과적 작용성을 말하므로, 작용은 한 순간에 즉 동시적으로나, 아니면 어떤 간격의 시간에 걸쳐 즉 계시적(繼時的)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존재자가 계시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각 순간마다 그 본성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작용의 순간 전후에 다른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영원한 작용일 수 없고, 또한 작용이 없는 것은 비존재를 의미하므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순간적인 존재라는 논증이 성립한다. 이제 현대 물리학의 입장을 살펴보자. 자연의 궁극적 구성물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물리학은 그 실체를 하나하나 해명해가고 있다. 원자론에 의해 이 우주의 다양한 물질은 1백여개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뒤이어 이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양성자와 중성자의 반지름은 10-15m 정도이다. 이것이 얼마나 작은 크기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양성자나 중성자를 지름이 10㎝인 사과에 비유한다면, 1㎝라는 길이는 지구에서 태양에 이르는 거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작은 양성자나 중성자의 내부에서도 무수한 미립자들이 순간순간 생성되었다가 소멸한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생명은 10초이다.

 

이 짧은 찰라를 사는 무수한 미립자들이 순간적으로 생성되고 순간적으로 소멸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찰라멸하고 있다. 생하면서 동시에 멸하는 이 존재자의 양태를 어떻게 생한다거나 멸한다는 한 단어로서 드러낼 수 있겠는가?

 

 불생불멸이라는 말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 이러한 현대의 물질관은 비단 찰라멸론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생멸하는 미립자가 상의상대하는 존재여서 자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찰라멸론을 인정하면서도 사물의 본성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쳐 실유한다는 설일체유부에서와 같은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의 자연관은 연기무자성공론에 기초한 찰라멸론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러한 자연관은 일체 존재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근본 불교 이래 대승철학으로 이어져 온 무상하고 무자성공이라는 불교의 근본 교의를 우리에게 예증하고 있다. 양형진<고려대 교수·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