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법] 견성을 이루면 나타나는 징후들

2008. 7. 20. 12: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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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토)

견성을 이루면 나타나는 징후들

미국의 심리학자 부크는 순수의식, 곧 삼매상태의 절정에 도달되었을때에는 다음과 같은 징후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째, 그런 사람은 눈을 감고 있어도 눈 속에 환한 빛이 보이고 마음 속에도 항상 빛이 보인다.

둘째, 성품이 고도로 연마되어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하느님을 봤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도독과 윤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여,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없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금전에 욕심을 부린다든가. 여신도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농락한다든가, 제멋대로 분노를 터뜨린다든가 식언을 하든가 하면 일반 속인과 다를게 없게 된다.

셋째, 지혜가 나타난다.

지혜는 지식과는 다르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훌륭한 학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지식은 없어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가 보아도 어딘가 침착한 데가 있고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잘 밝혀서 판단한다.

넷째, 살고 죽는 생명의 실상을 잘 알고 있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진다.

이 세상의 생명은 생겨났다가 없어지지만 그 뒤에는 영원불멸하는 우주의 실상에 합류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실상이 바로 신(神)이며 불(佛)이며 도(道)이며 한이고 원리이다. 따라서 사람이 한평생 살다가 죽는 것을 일장춘몽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다섯째, 죄악감이 없어진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전 인류의 조상적부터 숙명적으로 원죄가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 죄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속마음으로 자기는 정말 예수의 보혈로 죄에서 벗어났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그 원죄에서 벗아날 수 없다는 숙명 속에서 오직 신앙에만 매달리다가 한평생 보내기가 일쑤다.

바로 이러한 죄악감에 매어 있는 사람은 항상 자책에 빠져 위축되거나 자포자기하거나 이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이 되어 언제나 죄의 중압감 속에서 허덕이게 된다. 본성을 찾은 사람, 본성에 불이 붙은 사람은 자기자신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 되므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지낼 필요가 없게 된다.

여섯째, 영성(靈性)이 밝아진다.

일곱째, 풍모가 바뀐다.

이것은 자기 자신보다도 남이 더 잘 알게 된다. 자기자신은 조석으로 거울을 대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변모를 잘 모른다. 가족 역시 항상 같이 지내고 있으므로 그 변화를 뚜렷이 감지하지 못하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친지들은 그 변모를 금방 알아차린다.

이 밖에도 본성을 찾은 사람은 의통(醫通)이 열리는 수가 있다. 환자의 눈을 주시하거나 병이 나았다고 말만 해도 병이 낫는가 하면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난치병이 낫는 수가 흔히 있다. 예수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눈면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나병환자를 낫게 해 준 것은 바로 이 의통이 열렸기 때문이다.

또 깊은 경지에 들어 견성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고,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도의 요기들 중에도 이런 사람은 허다하다. 인도 빈민구제에 일생을 바쳤던 저 유명한 테레사 수녀같은 분도 거의 식사를 안하거나 해도 극소량밖에는 안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도승 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의 생리구조가 이 정도로 변하지 않고는 함부로 견성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전연 자지 않고 먹지 않는다는 것이 힘이 든다면 하루에 세시간 정도 수면으로 만족할 수 있고 밥도 하루에 한끼 정도로 지낼 수만 있어도 상당한 경지에 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수면과 식사를 취하고도 정상인 이상으로 건강해야 할 뿐 아니라 초능력까지도 원한다면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이쯤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함부로 수련정도를 자랑할 수 없는 일이다. 자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막상 이 정도에 이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구태여 남에게 과시하거나 자랑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혹 후배 수련자들에게 교육을 시킨다는 입장에서 잠시 자신의 초능력을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이 세상에 명성이나 치부를 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직 수련이 덜 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세속적인 명예나 부는 진정한 수도와는 하등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련인들은 생명이 위급하거나 그 밖의 어쩔 수 없는 필요에서가 아닌 이상 절대로 자신의 초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고 있다.

초능력자가 스푼을 구부리고 배추씨의 싹을 틔우고 고장난 시계를 고치는 것과 같은 초능력을 과시하는 행위는 진정한 수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