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및 수행
2008. 7. 20. 14:4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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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경(看經)
간경(看經)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으로 경전(經典)은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이므로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功德)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이 되었다.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인 간경(看經)은 풍경(諷經), 독경(讀經), 독송(讀誦)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이들의 의미를 구별하여 쓰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거의 구별없이 쓰고 있다.
간경(看經) 방법으로는 경전을 읽기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는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서 마음을 추스려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경전을 읽을 때는 마음 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나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하는데 이때는 염불(念佛)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그 뜻을 물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경전을 읽는 바른 방법이다.
경전(經典)은 원래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만들어진 것으로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으나 뒤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修行法)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讚嘆)하며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發願)하기도 한다. 또 죽은 자를 위해 독경(讀經)을 하여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우리의 마음을 밝히려고 좌선(坐禪)을 하는 것은 선종(禪宗)의 일관된 수행법이나 좌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禪)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해설서 또는 입문서인 선서(禪書)가 문제가 되는데 선에는 인도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이 있어서 서로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에서 이루어진 선종의 주장을 보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소의경전(所依經典)을 부인하고 있으나 불교 종파의 하나인 선종에 그 사상적 근본이 되는 경전이 없을 수는 없다. 선을 사상적(思想的)으로 표현할 때는 그 논서(論書)가 성립되기도 하고 혹은 선에 관한 특정의 경전이 권장되기도 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는 선(禪)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의 이론가로서 관심론(觀心論) 등 여러 가지 선서(禪書)를 지었으며 특히 능가경(楞伽經)을 애독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5조 홍인(弘忍)은 능가경(楞伽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소의로 해서 종풍을 펼쳤으며 6조 혜능(慧能)조사는 금강경(金剛經)의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라는 부분의 경문(經文)에서 본성을 깨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지만 선의 사상과 실천을 이해하기 위하여 선가(禪家)에서 경전을 보는 것을 간경(看經)이라고 하며 경전(經典)을 본다는 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경은 많은 경전에서 권하고 있는 경전의 독송(讀誦)과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뜻을 달리하고 있으며 불법(佛法)의 교리(敎理)를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경전 저 경전을 섭렵(涉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을 수행처로 삼아 오랫동안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원(禪院)에서는 대부분 결제(結制) 기간에는 간경이 금지되어 있고 해제(解制) 기간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이 함께 기거하는 선당(禪堂)에서는 간경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慣例)로 되어 있어 간경(看經)은 해제 중에 혼자서 지대방 같은 곳에서 주로 하고 있다.
관정(灌頂, abhisecana 또는 abhiseka)
아비전좌(阿鼻詮左)라 음역하며 원래는 인도 제왕의 즉위식(卽位式) 및 태자 책봉(冊封)시에 정수리에 물을 뿌리던 의식이었으나 불교에 입문할 때 물이나 향수를 정수리에 뿌리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보살이 십지 중의 제9지(地)에서 제10 법운지(法雲地)로 들어갈 때 제불(諸佛)이 지혜의 물을 입지자(入地者)의 정수리에 뿌림으로써 법왕(法王)의 직책을 받았음을 증명하는데 이것을 수직관정이라고 한다. 또한 십주(十住)의 제 10위를 관정주(灌頂住)라고 하고 <대사(大事)>의 보살 십지(十地) 중 제10지를 관정지(灌頂地)라고 하며 이외에도 관정위(灌頂位)는 등각위(等覺位)를 지칭할 때도 있다.
한편 밀교(密敎)에서 행하는 관정을 총칭하여 관정(灌頂) 또는 밀관(密灌)이라고 하며 밀교에서는 관정을 중요시하여 여래(如來)의 상징인 오병(五甁)의 물을 제자의 정수리에 뿌리는데 이런 작법(作法)에 의해 부처님의 법위(法位)를 계승(繼承)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진언종(眞言宗)에서는 수계(授戒)할 때는 모두 관정을 행함으로써 진언의 삼매야계(三昧耶戒)를 받는데 이를 수계관정(授戒灌頂)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정(灌頂)을 행하는 방을 관실(灌室)이라 하고 관정을 받는 것을 수관(受灌)이라 하며 관정할 때 주는 인계(印契)와 다라니(陀羅尼)를 관정인명(灌頂印明)이라고 한다.
관정을 할 때 관정을 받는 사람의 재액(災厄)을 없애고 실지(悉地)를 이루기 위해 향, 꽃 등 각종 공양물(供養物)을 태우는데 이를 관정호마(灌頂護摩)라고 한다. 수법(修法)의 횟수나 공물(供物)의 숫자는 다양하지만 동밀(東密)에서는 금강계(金剛戒)의 수법(修法)이 끝난 초후야(初後夜)의 중간에 호마를 행하는데 이를 중간호마(中間護摩)라고 한다. 한편 관정(灌頂)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① 결연관정(結緣灌頂)
사람들에게 불연(佛緣)을 맺어주기 위해 행하는 관정을 말한다.
② 학법관정(學法灌頂)
밀교(密敎)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때와 장소, 사람을 가려 법을 밝혀 주려는 관정을 말한다.
③ 전법관정(傳法灌頂)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아사리(亞梨)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밀의(密意)를 전하는 관정을 말하며 전법관정(傳法灌頂)은 다시 인법관정(印法灌頂), 사업관정(事業灌頂), 이심관정(以心灌頂)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 삼매야계(三昧耶戒)
전법관정(傳法灌頂)을 주기 전에 먼저 주는 작법(作法)으로 3종 보리심으로 계(戒)를 삼는 것을 말한다. 삼매야(三昧耶)는 진언밀교(眞言密敎)에서 부처님이 수행하던 때의 서원(誓願)을 말하는데 손에 칼, 탑, 보주 등을 가진 삼매야형(三昧耶形)으로 그 서원의 근본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기도(祈禱)
기도(祈禱)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神)이나 그 밖에 신기한 힘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하며 불교에서 기도(祈禱)란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도움에 힘입어 재앙(災殃)을 덜고 복을 더할 것을 기원하는 종교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기도는 권청(勸請), 즉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儀式)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겠다는 원력(願力)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廻向)하겠다는 서원(誓願)의 뜻이 더 크다. 따라서 불교의 기도는 불보살(佛菩薩)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多生)에 지은 모든 업장(業障)을 참회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 하기를 발원(發願)하고 회향하는 것이다.
기도발원(祈禱發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이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성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생기므로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공덕(功德)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는 동시에 자신의 편협(偏狹)된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되살려야 한다.
한편 불교는 일반적인 관념과는 달리 원래 깨달음의 가르침을 말하는 종교로 진리를 깨달아 바른 마음, 바른 행으로 인간과 국토의 완성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그런데도 불교를 믿으면 재난이 없어진다든가, 병이 낫는다든가, 불행한 사태가 호전된다는 등 현세적 이익이 있는 것을 말하고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하여 염불하는 정진(精進)을 기도(祈禱)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도라는 말이 가지는 보편적인 의미와 불교의 근본 가르침 사이에 괴리(乖離)가 있기 때문에 일부 식자(識者)들 간에는 기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修行)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불교에서 기도란 깨달음의 진리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완전 무결한 궁극적인 법이며 생명과 존재의 실상으로 진리에는 불행도 괴로움도 일체 재난이란 말조차 없다. 기도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 행으로 닦아 가는 데서 본래 완전한 진리의 공덕(功德)이 자신과 환경에 나타나게 하는 기술이다.
바로 진리를 알면 생명력을 속박하여 나타났던 병도 사라지며 자기 능력을 속박해서 가난했던 빈궁(貧窮)도 사라진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며 깨닫는다는 것은 그대로 스스로가 바뀌고 환경을 진리공덕(眞理功德)으로 장엄(莊嚴)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불보살(佛菩薩)에게 구하여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불보살님의 마음으로 회복(回復)시키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기도(祈禱)란 이렇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의 생명을 회복함에 의해서 일체를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의 기도는 염불(念佛)을 하여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感謝)하는 것이다.
법담(法談)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의 하나로 “만약 형상(形象)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니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말이 있다. 여래(如來) 즉 깨달음의 경계는 어떤 정형화된 모양이나 소리 혹은 생각이나 분별로는 알 수 없다는 말로 이는 참된 진리의 법(法)은 언설(言設)로써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수행을 통하여 증득(證得)한 경지인 참된 깨달음(이것을 선가(禪家)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한다)은 말이나 생각으로 헤아려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고 범속(凡俗)한 사람으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견성(見性)의 경계는 견성한 사람만이 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심에 그 차고 더움은 마신 사람만이 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 견성을 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과연 견성을 했는지 어떤지를 제삼자가 확인하고자 했을 때이다. 이때 그 확인이라는 것은 아직 견성을 하지 못한 분상(分相)에서는 범접(犯接)하지 못하는 곳이므로 부득이 견성한 사람이 견성했다고 하는 그 당사자를 시험하여 진위를 가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진위를 가리는 방법으로는 언어가 견성한 사람의 경계(境界)가 범부(凡夫)의 경계와는 다르기 때문에 견성한 사람끼리의 진리에 입각한 법문(法門)의 문답이 있을 때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狀況)이 생겼을 때 서로간에 주고 받는 대화를 선가(禪家)에서는 법담(法談)이라 하며 특히 행동을 수반하는 법담을 법거량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법담(法談)에서 대두되는 언어나 행동은 범부의 사유(思惟)나 관념(觀念)을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괴이(怪異)하게 여겨지기도 하나 피차가 견성한 선사(禪師)들이라면 바로 이곳에서 깨달은 곳이 확인되고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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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경(看經)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으로 경전(經典)은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이므로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功德)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이 되었다.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인 간경(看經)은 풍경(諷經), 독경(讀經), 독송(讀誦)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이들의 의미를 구별하여 쓰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거의 구별없이 쓰고 있다.
간경(看經) 방법으로는 경전을 읽기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는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서 마음을 추스려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경전을 읽을 때는 마음 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나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하는데 이때는 염불(念佛)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그 뜻을 물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경전을 읽는 바른 방법이다.
경전(經典)은 원래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만들어진 것으로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으나 뒤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修行法)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讚嘆)하며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發願)하기도 한다. 또 죽은 자를 위해 독경(讀經)을 하여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우리의 마음을 밝히려고 좌선(坐禪)을 하는 것은 선종(禪宗)의 일관된 수행법이나 좌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禪)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해설서 또는 입문서인 선서(禪書)가 문제가 되는데 선에는 인도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이 있어서 서로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에서 이루어진 선종의 주장을 보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소의경전(所依經典)을 부인하고 있으나 불교 종파의 하나인 선종에 그 사상적 근본이 되는 경전이 없을 수는 없다. 선을 사상적(思想的)으로 표현할 때는 그 논서(論書)가 성립되기도 하고 혹은 선에 관한 특정의 경전이 권장되기도 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는 선(禪)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의 이론가로서 관심론(觀心論) 등 여러 가지 선서(禪書)를 지었으며 특히 능가경(楞伽經)을 애독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5조 홍인(弘忍)은 능가경(楞伽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소의로 해서 종풍을 펼쳤으며 6조 혜능(慧能)조사는 금강경(金剛經)의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라는 부분의 경문(經文)에서 본성을 깨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지만 선의 사상과 실천을 이해하기 위하여 선가(禪家)에서 경전을 보는 것을 간경(看經)이라고 하며 경전(經典)을 본다는 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경은 많은 경전에서 권하고 있는 경전의 독송(讀誦)과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뜻을 달리하고 있으며 불법(佛法)의 교리(敎理)를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경전 저 경전을 섭렵(涉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을 수행처로 삼아 오랫동안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원(禪院)에서는 대부분 결제(結制) 기간에는 간경이 금지되어 있고 해제(解制) 기간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이 함께 기거하는 선당(禪堂)에서는 간경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慣例)로 되어 있어 간경(看經)은 해제 중에 혼자서 지대방 같은 곳에서 주로 하고 있다.
관정(灌頂, abhisecana 또는 abhiseka)
아비전좌(阿鼻詮左)라 음역하며 원래는 인도 제왕의 즉위식(卽位式) 및 태자 책봉(冊封)시에 정수리에 물을 뿌리던 의식이었으나 불교에 입문할 때 물이나 향수를 정수리에 뿌리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보살이 십지 중의 제9지(地)에서 제10 법운지(法雲地)로 들어갈 때 제불(諸佛)이 지혜의 물을 입지자(入地者)의 정수리에 뿌림으로써 법왕(法王)의 직책을 받았음을 증명하는데 이것을 수직관정이라고 한다. 또한 십주(十住)의 제 10위를 관정주(灌頂住)라고 하고 <대사(大事)>의 보살 십지(十地) 중 제10지를 관정지(灌頂地)라고 하며 이외에도 관정위(灌頂位)는 등각위(等覺位)를 지칭할 때도 있다.
한편 밀교(密敎)에서 행하는 관정을 총칭하여 관정(灌頂) 또는 밀관(密灌)이라고 하며 밀교에서는 관정을 중요시하여 여래(如來)의 상징인 오병(五甁)의 물을 제자의 정수리에 뿌리는데 이런 작법(作法)에 의해 부처님의 법위(法位)를 계승(繼承)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진언종(眞言宗)에서는 수계(授戒)할 때는 모두 관정을 행함으로써 진언의 삼매야계(三昧耶戒)를 받는데 이를 수계관정(授戒灌頂)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정(灌頂)을 행하는 방을 관실(灌室)이라 하고 관정을 받는 것을 수관(受灌)이라 하며 관정할 때 주는 인계(印契)와 다라니(陀羅尼)를 관정인명(灌頂印明)이라고 한다.
관정을 할 때 관정을 받는 사람의 재액(災厄)을 없애고 실지(悉地)를 이루기 위해 향, 꽃 등 각종 공양물(供養物)을 태우는데 이를 관정호마(灌頂護摩)라고 한다. 수법(修法)의 횟수나 공물(供物)의 숫자는 다양하지만 동밀(東密)에서는 금강계(金剛戒)의 수법(修法)이 끝난 초후야(初後夜)의 중간에 호마를 행하는데 이를 중간호마(中間護摩)라고 한다. 한편 관정(灌頂)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① 결연관정(結緣灌頂)
사람들에게 불연(佛緣)을 맺어주기 위해 행하는 관정을 말한다.
② 학법관정(學法灌頂)
밀교(密敎)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때와 장소, 사람을 가려 법을 밝혀 주려는 관정을 말한다.
③ 전법관정(傳法灌頂)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아사리(亞梨)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밀의(密意)를 전하는 관정을 말하며 전법관정(傳法灌頂)은 다시 인법관정(印法灌頂), 사업관정(事業灌頂), 이심관정(以心灌頂)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 삼매야계(三昧耶戒)
전법관정(傳法灌頂)을 주기 전에 먼저 주는 작법(作法)으로 3종 보리심으로 계(戒)를 삼는 것을 말한다. 삼매야(三昧耶)는 진언밀교(眞言密敎)에서 부처님이 수행하던 때의 서원(誓願)을 말하는데 손에 칼, 탑, 보주 등을 가진 삼매야형(三昧耶形)으로 그 서원의 근본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기도(祈禱)
기도(祈禱)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神)이나 그 밖에 신기한 힘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하며 불교에서 기도(祈禱)란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도움에 힘입어 재앙(災殃)을 덜고 복을 더할 것을 기원하는 종교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기도는 권청(勸請), 즉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儀式)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겠다는 원력(願力)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廻向)하겠다는 서원(誓願)의 뜻이 더 크다. 따라서 불교의 기도는 불보살(佛菩薩)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多生)에 지은 모든 업장(業障)을 참회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 하기를 발원(發願)하고 회향하는 것이다.
기도발원(祈禱發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이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성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생기므로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공덕(功德)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는 동시에 자신의 편협(偏狹)된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되살려야 한다.
한편 불교는 일반적인 관념과는 달리 원래 깨달음의 가르침을 말하는 종교로 진리를 깨달아 바른 마음, 바른 행으로 인간과 국토의 완성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그런데도 불교를 믿으면 재난이 없어진다든가, 병이 낫는다든가, 불행한 사태가 호전된다는 등 현세적 이익이 있는 것을 말하고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하여 염불하는 정진(精進)을 기도(祈禱)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도라는 말이 가지는 보편적인 의미와 불교의 근본 가르침 사이에 괴리(乖離)가 있기 때문에 일부 식자(識者)들 간에는 기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修行)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불교에서 기도란 깨달음의 진리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완전 무결한 궁극적인 법이며 생명과 존재의 실상으로 진리에는 불행도 괴로움도 일체 재난이란 말조차 없다. 기도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 행으로 닦아 가는 데서 본래 완전한 진리의 공덕(功德)이 자신과 환경에 나타나게 하는 기술이다.
바로 진리를 알면 생명력을 속박하여 나타났던 병도 사라지며 자기 능력을 속박해서 가난했던 빈궁(貧窮)도 사라진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며 깨닫는다는 것은 그대로 스스로가 바뀌고 환경을 진리공덕(眞理功德)으로 장엄(莊嚴)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불보살(佛菩薩)에게 구하여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불보살님의 마음으로 회복(回復)시키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기도(祈禱)란 이렇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의 생명을 회복함에 의해서 일체를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의 기도는 염불(念佛)을 하여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感謝)하는 것이다.
법담(法談)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의 하나로 “만약 형상(形象)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니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말이 있다. 여래(如來) 즉 깨달음의 경계는 어떤 정형화된 모양이나 소리 혹은 생각이나 분별로는 알 수 없다는 말로 이는 참된 진리의 법(法)은 언설(言設)로써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수행을 통하여 증득(證得)한 경지인 참된 깨달음(이것을 선가(禪家)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한다)은 말이나 생각으로 헤아려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고 범속(凡俗)한 사람으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견성(見性)의 경계는 견성한 사람만이 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심에 그 차고 더움은 마신 사람만이 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 견성을 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과연 견성을 했는지 어떤지를 제삼자가 확인하고자 했을 때이다. 이때 그 확인이라는 것은 아직 견성을 하지 못한 분상(分相)에서는 범접(犯接)하지 못하는 곳이므로 부득이 견성한 사람이 견성했다고 하는 그 당사자를 시험하여 진위를 가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진위를 가리는 방법으로는 언어가 견성한 사람의 경계(境界)가 범부(凡夫)의 경계와는 다르기 때문에 견성한 사람끼리의 진리에 입각한 법문(法門)의 문답이 있을 때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狀況)이 생겼을 때 서로간에 주고 받는 대화를 선가(禪家)에서는 법담(法談)이라 하며 특히 행동을 수반하는 법담을 법거량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법담(法談)에서 대두되는 언어나 행동은 범부의 사유(思惟)나 관념(觀念)을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괴이(怪異)하게 여겨지기도 하나 피차가 견성한 선사(禪師)들이라면 바로 이곳에서 깨달은 곳이 확인되고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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