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력]불교수행법 특별강좌 주력수행/선명화 보살
2008. 7. 20. 17:1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불교수행법 특별강좌 주력수행
姜 善姬(善明華)
1. 들어가는 말
2,500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는 오늘날의 인류와 시대에도 놀라울 정도로 부합하면서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진정한 보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불교가 마음의 행복에 이르는 효과적인 청사진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결론을 내린 것처럼, 신체적인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 심각하게 오염된 환경을 가장 친 환경적으로 복원하는 데도 불교보다 더 가치 있는 가르침은 없다는 결론에 차츰 도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의 가장 큰 가치는 우리 인간의 생각을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업을 바꾸어 나와 더불어 세상을 안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수행을 통하여 잘못된 관행과 관습을 깨닫는데 있다. 사람은 깨닫고 나면 비로소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란 자신만이 옳다는 자만과, 항상 남을 믿지 못하는 의심, 내 것에 대해 집착하는 탐심과, 욕심에서 비롯된 화, 그리고 인과와 무상 등을 모르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로만 사는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는 것이 잘못된 관행과 관습에 따르는 삶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살아온 관습을 고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덕행을 쌓는데 많은 노력을 하면서, 일체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소원과 실천을 하고, 깨달음을 향한 필수적인 선정을 개발하여 空性을 체험함으로서, 삼법인(無常, 苦, 無我)과 인과를 알게 될 때, 비로소 業에 얽매어 살지 않고, 업을 제도하면서 살수 있게 된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성불(成佛)의 길(道”) 즉 일체지(一切智)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계의 차제(次第)가 있다.
그 첫 번째 실행으로 자량도(資糧道)를 닦도록 하고 있다.
긴 여행을 떠나려면 여행에 드는 노자돈이나 식량 등을 마련하듯이, 근기를 성숙시킬 수 있도록 삼보(三寶)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신심과 함께 기도, 보시, 자비의 실천 등으로 자량을 충분히 쌓고 나서 法을 전수 받는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로는 여행준비를 다 마쳤으면 여행길을 떠나듯, 가행(加行)을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서는 먼저 법기(法器)를 만든다. 법수(法水)를 내 그릇에 옮겨 담으려면 그릇을 깨끗이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다섯 가지의 독인 탐, 진, 치, 자만, 의심으로 쌓인 그릇을 깨끗이 닦아야만 법수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독(五毒)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전 우주에 통용되는 만트라를 한다. 그래서 부처님 재세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선사들이 다라니 주력을 많이 하였다고 전해진다.
근대 한국불교의 대선사이신 이 성철종정스님께서도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절을 많이 하도록 하였고, 능엄주를 외우지 못한 납자는 선방의 입방을 불허하셨다고 한다. 모두 이러한 차제를 거쳐야만 비로소 수행을 할 기본자세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法을 담을 만한 그릇이 깨끗이 씻어진 후 法을 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승불교권의 티벳에서는 사가행(四加行)을 하는데, 우선 大拜를 10만 배하면서, 정화 만트라를 10만 번하고, 그 과정을 마치면 만다라 공양을, 마지막으로 구루요가를 한다. 온전한 깨달음이 되기 위하여 티베트 불교에서 가르치는 단계적 수행은 부처님의 일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대열반경』에서,
“발자국 중에서 최고는 코끼리의 발자국이고, 모든 인식 중에서 최고는 무상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완벽한 수행을 할 수 있다.
수행과 수행이 아닌 것의 경계는 번뇌의 치료제가 되면 그것이 수행이고, 치료제역할을 하지 못하면 수행이 아니다.
번뇌가 있으면 과거에 쌓은 업이 비록 없더라도, 갑자기 번뇌로 새로운 업을 쌓아서 윤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윤회하는 뿌리는 번뇌이다. 업과 번뇌 등 태어날 원인이 없어지면, 그것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번뇌의 암덩어리인 오독 중 탐심(貪心)은 ‘부정관(不淨觀)’으로 치료하고, 성냄은 ‘인욕관상’과, 자애심으로 치료하는데, 화내기 전과 화를 낼 때,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화냄의 죄를 알아서 인욕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를 고통에 빠지게 하고, 자기목숨까지도 끊게 하는 것들은 모두 화냄의 허물이다. 원수를 모두 없애고 싶어서 없앤다고 해도 중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원수도 끝을 낼 수가 없다. 그보다는 원인인 화내는 마음만 없애면 모든 원수를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치심(癡心)과 의심(.疑心)의 치료제는 ‘연기법(緣起法)’과 ‘공성(空性)’에 대한 올바른 견해 등을 사유해야 된다. 오독 중 다섯 번째인 자만(自慢)의 치료제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살펴서 교만을 줄여야 한다. 또한 병듦과 늙어감 등의 생로병사로 세속적인 행복이 자주 바뀐다는 것 등을 관상해야 한다.
번뇌 중에서 가장 강한 것부터 먼저 닦아 가는데,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아서 어떤 것이 가장 강한지를 가려내고, 치료제로써 그것을 닦아야 한다.
모든 번뇌의 뿌리인 무지는 자신을 집착함에 의해서 탐, 진, 치, 아만, 의심 등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업을 쌓게 되며, 그것이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오독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아집의 무지함’에 대한 치료제인 ‘무아(無我)’를 깨닫는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병통치약은 ‘무아를 깨닫는 지혜’라고 한다.
무아를 바르게 깨우치고자 할 때는 三學 중에서 禪定을 이루는 것이다. 산란함이 없이 선정이 깊어지는 방편으로는 戒를 지키면서, 아집의 치료제인 공성을 깨달아 지혜를 갖추는데,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禪定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정을 잘 길들여져서 언제든지 선정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고 머물 수 있다면 남은 세 가지(見道, 修道, 無學道)를 이루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셋째로는 見道를 한 후 수도(修道-悟後起修-)를, 마지막 다섯 번째 무학도(無學道)로 이후 세상에 나와 중생제도에 전념하는데, 십우도(十牛圖)가 이를 펼쳐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선정의 개발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은 가장 높은 禪定의 경지를 얻으신 분이다. 그 높은 선정의 상태에서 연기(緣起)를 발견하여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반영해보고, 다시 태어나는 조건들인 번뇌가 남김없이 제거(漏盡通)된 후, 그 道의 진리인 사성제와 8정도를 설하신 것이다.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이토록 중요한 선정을 개발하지지 못한다면 평생 수행을 하였다 하여도 아득할 뿐 수행의 진보 없이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므로, 선정력을 길러서 일상생활에서도 수행이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을 볼 때 주력수행은 선정력을 기르는데 가장 중요한 선교방편(upāya-kusala)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력수행이 갖는 다음과 같은 유익함 때문이다.
주력(呪力-혹은 만트라,mantra-)이란 신비한 힘을 가진 진언이나 다라니를 계속 지속적으로 믿음을 갖고 독송(讀誦)하면 모든 마장으로부터의 보호와 선정의 힘을 길러주는 힘이 있고, 독을 해독하는 해독제의 역할도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만트라’는 마음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우리의 마음을 용렬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만트라의 ‘만(慢)’이란 마음이란 뜻인데, 여기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 )․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을 가리킨다. 곧 하열하고 범속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호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만트라(Mantra)의 ‘만’은 진여지(眞如智)요, ‘트라’는 트라야(Traya)에서 온 것으로, ‘중생들의 비심(悲心)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즉 ‘공성을 증득하여 얻은 지혜와 대비심이 하나가 된 것’을 뜻한다.
혹은 ‘지혜와 방편이 하나인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지혜가 방편을 버리지 않고, 방편 또한 지혜를 저버리지 않음을 가리킨다”(『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中에서)
2. 주력수행의 의미
-능엄주 다라니를 중심으로-
능엄주(楞嚴呪)란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定을 닦는데 힘을 돕는 呪文'(Śũraṇgama samādhi dhāraṇī)이라는 뜻이다. 능엄주는 『능엄경』의 찬술단서를 제공하는데 10권 가운데 제7권에 수록되어 있다. 『능엄경』설은 망심을 깨뜨리고 그 자리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기나긴 수행관문을 세존과 아난의 문답을 통해서 설파하고 있다. 우선 세존은 갖가지 방편을 써서 아난의 망심을 정교한 이론과 타당성을 통해 깨뜨리고 들어가 마침내 진심을 밝히고 나니(제1.2권), 이제 그 곳은 眞妄이 不二한 如來藏心임을(제3권) 깨닫게 하셨다. 여기에서 망심에서 진심에 이르는 正見을 위한 理와 事의 양면 방편수행공덕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방편수행이란 비밀스런 송주(제7권)를 부지런히 하는 일로서 이론적으로 그 공덕의 수승함을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수행을 하되(제8권) 자세한 경계와 유의점들은 좌선의 태도에서 구체화하여 제시하고(제9.10권) 있다. 『능엄경』의 찬술 동기도 능엄주를 중심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현교와 밀교가 원통함을 알 수 있으며, 능엄경 교설은 망심을 현교와 밀교가 하나임을 전제로 참다운 禪學的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능엄경』은 그 내용이 실천적 수행관인 참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도 매우 존중되어 온 경전 중의 하나로 전통 강원의 이력과정인 사교과(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대승기신론)의 한 경전으로 학습되어 오고 있다.
인도의 불교를 顯敎(석존 성도 이후부터 AD 8C까지:원시,부파,대승불교)와 密敎(AD 4C~)시대로 구분을 하기도 하고, 요즘은 남방 테레바다 불교, 북방의 대승불교, 티벳 불교, 선불교 등으로도 나누지만, 인도의 종교 철학 사상과 시대상황 내지 인도사 전반을 놓고 볼 때, 어느 한 부분만을 시대에 맞추어 규정짓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관련서적들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인도에서 불교의 발생이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이미 2천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처님이 태어난 시기에 이미 베다, 바라문교 등의 종교가 있었고, 고도로 발달된 도시문명과 과학, 의학, 합리적인 토론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AD 8-9세기 경부터 불교가 차츰 사라지면서 티벳으로 이전되거나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어 오늘날에는 역수입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인도로 귀착된다. BC 6-5세기경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되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천재성이나 우연이 아니고, 그 이전에 이미 2천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苦, 무지, 윤회, 업, 해탈의 관념들은 우빠니샤드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우빠니샤드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BC 1,500년경부터 서북 인도를 넘어 인도반도에 침입해 온 인도․아리안의 베다문화가 있고, 또 이들이 이룩한 제식주의적인 바라문교 문화가 있다. 그리고 인도․아리안족이 인도에 침입했을 땐 BC 3,000년경부터 고도로 발달된 도시문명을 건설한 원주민인 인더스문명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불교라는 고도로 합리적․분석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종교와 철학체계가 탄생되기 위해서는 요가적․고행적 요소를 가진 인더스 문명과, 현실적이고 논리적․분석적인 인도․아리안의 베다문화라는 두 이질적인 요소사이의 갈등과 창조적 종합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 두 요소가 한편으로 우빠니샤드로 통합되어 베란따라는 힌두교의 정수를 낳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의 울타리를 넘어선 불교라는 세계종교로 발전되었다.”(이 지수 교수의 『인도에 대하여』,中에서)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알게 된다면, 간화선만이 참 수행법이라고 한다거나 염불이나 위빠싸나만이 진짜 수행법이라고 우기면서 자기가 하는 수행 이외에는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편견이라 본다. 열린 마음으로 여러 수행을 이해하고 자기에게 맞는 주제와 수행방법으로 정진을 하여야 진보 있는 유익한 수행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관련 문헌들의 다라니에 대한 설명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무량무변한 이치를 섭수해 지니어 잃지 않는 염혜(念慧)의 힘을 일컫는다. 곧 일종의 기억술로서 하나의 일을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일까지를 연상(聯想)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②보살이 남을 교화하기 위해 다라니를 반드시 얻지 않으면 아니되며, 이것을 얻으면 한량없는 불법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대중 가운데 있어도 두려움이 없고, 또한 자유자재로 정교한 설법을 할 수 있다.
③보통으로 다라니를 지혜 혹은 삼매를 말한다. 이것은 말을 잊지 않고 뜻을 분별하며 우주의 실상에 계합하여 수많은 법문을 보존하여 가지기 때문에 끝없는 이치를 알아 학해(學解)를 돕고 모든 장애를 벗어나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등 많은 공덕이 있으므로 다라니라 한다는 등
초기불교 교단에서도 불교도를 수호하며 재난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용하다가 점차로 마음을 통일하는 수행으로 응용되고 드디어는 陀羅尼야말로 불교의 근본이라고 하는 사상, 곧 Dhāraṇī는 法(Dharma) 바로 그것이기에 法이 갖는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것으로까지 승화되었다고 한다.
인도 수행의 역사를 보더라도 5천년 전부터 타파스(tapas:고행)→yoga→禪의 순으로 발전해 옴을 알 수 있다.
만트라를 眞言, 呪, 神呪, 密呪, 密言 등으로도 번역하며,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誓願을 의미하고, 비교적 짧은 呪를 「진언」이라하고, 긴 呪를 「다라니」라 한다.
능엄다라니는 530여 구(석 인기역, 『大如來佛頂楞嚴呪』,로 구성된 가장 긴 다라니이며 주 내용은
수능엄경 제7권에는
"수행자(修行者)는 누구든지 수행(修行)의 완성과정으로 『大如來의 佛頂首楞嚴經』을 수학(修學)하고, 修行해서 영해(領解)해야 佛敎의 철리(哲理)를 알고, 무상정편지정각(阿耨陀羅三藐三菩提)을 깨달아서 부처님의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아 成佛한다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회에 발표된 논문의 자료들을 통해 송나라 때부터 선가에서는 아침․저녁 송주에서 반드시 능엄주를 하고, 티벳불교에서도 큰 행사 등을 할 때는 모든 마장을 없애고 불보살님과 신장님들의 가피를 얻기 위하여 능엄주를 먼저 독송하고 행사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 한국불교에서 주력을 하신 대표적 선사는 백용성스님께서 六字진언으로 悟道를 하셨고, 혜월선사께서도 천수다라니 주력을 하여 지혜를 얻었다는 것은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성철 전종정스님의 회상에서는 한때 능엄주를 외우지 못하는 승려는 입방을 불허했으며, 능엄주를 외우는 조건으로 입방을 허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성철스님의 회상에서는 많은 절을 하고 아비라기도 라든가 능엄다라니 주력 등을 하도록 하는데, 이는 한국의 사찰 중에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그 차제를 가장 잘 유지하며 실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외 한국의 고승이신 향곡, 자운, 청담, 효봉, 일타, 서암, 정영스님 등도 항상 송주는 능엄주를 하셨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특히 대승불교권에서는 능엄다라니가 선정력을 길러주고 지혜를 유지하는데 미치는 영향이 선가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제방의 선방과 많은 사찰에서 능엄주력을 하고 있다.
3. 주력수행의 공덕
『수능엄경』 序品에
“어느날 파사익왕이 부처님을 궁궐로 청하여 공양을 받쳤다. 같은 날 아난은 별청을 받고 멀리 갔다가 혼자 돌아오는 도중에 공양시간이 되어 걸식을 하러 가다가 마등가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사비가라의 선범천주(先梵天呪)로 아난을 붙들고 음실(婬室)로 들어가서 음란한 몸으로서 아난을 유혹하여 파계를 시키려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이 마등가의 요술에 붙들린 것을 아시고서 공양을 마치자마자 곧 돌아오시니, 王과 大臣과 長者, 居士들이 따라와서 부처님의 법요를 듣고자 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頂上으로부터 百가지 보배롭고 무외(無畏)한 광명을 놓으시고, 광명 속에는 천엽의 연화가 출현하였는데 부처님의 화신이 앉아서 神呪를 말씀하여 문수사리보살에게 명하기를 ‘이 신주를 가지고 가서 아난을 구해오라’고 하시었다. 문수사리보살은 신주를 가지고 가서 惡呪를 소멸하고서 아난과 마등가를 이끌고 부처님의 처소로 돌아왔다.
아난이 돌아와 부처님의 발에 頂禮를 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출가한 후로 부처님의 사랑을 믿사옵고 多聞만 求하였으므로 無爲를 증득하지 못하였아오며 梵天의 邪術에 갇혔을 적에 마음은 비록 명료(明瞭)하였으나 자유로이 벗어날 힘이 없었는데 문수보살을 만나서 벗어났습니다. 비록 여래의 佛頂呪를 받자와 그 신통력의 가피를 입었사오나, 친히 듣잡지 못하였아오니 바라옵건데 대자비로서 다시 宣說하시와 현재와 미래세에 윤회하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의 믿음을 받잡고, 몸과 마음을 해탈케 해 주시옵소서’ 이때에 회중의 일체대중이 모두 예배하고 여래의 비밀한 章句를 듣고져 하자, 부처님께서 선설하셨다” 고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대여래불정능엄주』공덕부 참조)
4.주력수행의 방법
부처님께서 모든 수행은 定․慧의 병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정(사마타)을 배제한 채 혜(위빠싸나) 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공허한 직관에 불과하다. 사마타(定)를 익히지도 않은 채 수행을 하면 마음이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관의 심오한 수준까지 도달하기 힘들어진다. 어떤 주제로 수행을 하든, 선정력이 없는 수행을 한다면 그저 거품처럼 부글거리는 생각의 단편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定은 외부 대상으로부터의 산란함을 가라앉히는 것이며, 항상 자연스럽게 수행의 대상을 향하여 환희와 경안을 지닌 마음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이 외에도 혼침과 도거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몸과 마음의 결점을 서서히 극복해 나가는 것이기도 한다. 慧는 定에서 여여함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定과 慧는 같이 작용한다. 마음은 수행의 대상(능엄주)에 집중함으로써 고요하게 된다. 앉아서 주력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매우 고요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을 定이라고 한다. 결국 이 집중력은 대상(다라니의 각 구절)을 끊임없이 觀하는 것으로서 유지되며, 자동적으로 慧를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이 자연스럽게 순환한다.
“만트라를 처음 할 때에는 각 구절을 번갈아 주의를 집중하면서, 자신의 귀에 들릴 정도의 소리크기로 빠르고 느리지 않는 똑같은 속도로 한다. 만트라를 하는 동안 혼침이 온다고 느껴질 때는 소리를 觀하기 시작하는데, 소리를 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염송하는 소리를 듣는 듯이 관상한다. 그렇게 해 가다가 집중이 되면 오로지 고요한 가운데 만트라의 소리를 사유하면서 삼매를 닦는다. 마음과 만트라의 소리까지도 다 잊은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止觀삼매에 들게 된다. 삼매의 힘은 소리를 이용한 선정상태에서 증장되지만, 소리가 다 섭수된 후에 갖게 되는 상태에서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中에서)
다시 말해 다라니의 한 구마다 계속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하다 보면, 마치 재봉틀 바늘이 천을 일정한 속도로 박으며 지나가듯 하다가, 차츰 다라니와 관하는 마음이 회오리바람이 돌아 뭉치듯 하나로 합쳐지면서부터 점점 몰입 하게 되고, 이 상태로부터는 망상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사람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몰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노력을 해 가면 다라니가 몸에 달라붙게 되면서, 앉아 있을 때나 걸어 다닐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 마음은 여전히 고요하고, 꿈속에서도 이어지면서 그 고요함과 밝음을 연속하여 유지하는 힘이 증장되어 진다. 이때부터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짐을 알 수 있으며, 수면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定과 慧가 별개의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어떤 주제로 수행을 하든, 같이 작용한다는 것은 체험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고요해 지면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오는 정확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바람에 출렁거리던 바닷물이 바람이 멎고 잠잠해지면서 모든 티끌까지도 다 가라앉아 마침내는 바다 밑이 훤히 보이는 것과도 같다. 禪定力이 없이는 이런 효과를 쉽게 발휘하지 못한다.
1) 외우기
다라니는 대체로 길고 발음을 하기도 어렵거니와 외우기도 힘이 든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외우려고 하다보면 힘에 부쳐서 쉽게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외우려 하기 보다는 우선 자연스럽게 읽는 연습을 꾸준히 해 가야 한다. 발음이 어려워서 경우에 따라서는 입술이 부르트기도 하고, 몸에 열이 나기도 하며, 이가 시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자신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나 속으로 해 가면서 몸을 잘 컨트롤(Control) 해 가며 하루하루 몇 독씩 더 해 나아가는 걸로 서서히 해야 한다.
발음이 자연스럽게 되면 읽는 속도가 차츰 빨라지게 되고, 그럴 때는 읽는 횟수를 점점 늘려간다. 횟수를 늘려 읽다 보면 반복되는 구절부터 자연스럽게 외워지게 된다. 그렇게 십수일이고 몇 달이고 혹은 더 긴 세월을 걸려서라도 하다 보면 어느 날 다라니가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서 마치 몸 전체가 다라니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든든하다.
2) 주력수행
다라니가 다 외워지면 하루에 7독을 일주일 간, 그 다음은 21독을 일주일간, 그 다음은 …, 이렇게 횟수를 본인의 형편과 몸에 맞게 늘려 나아가야한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하려면 처음 시작할 때에는 시간을 짧게 해야 한다. 짧은 시간이라면, 어떤 것을 하든 즐겁게 느낄 것이다.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지치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매일 몇 독을 하였는지 기록하고, 또한 스스로 정한 횟수가 일찍 끝나면 계속 횟수를 늘려가면서, 속도를 점점 빠르게 하는 훈련을 해 가다 보면, 숙련이 되어 망상이 들어 올 틈이 차츰 줄어들게 된다.
시끄러운 곳에서나 집중이 잘 안되는 곳에서는 소리를 내어서 하면서 그 소리를 마음으로 들어가며 하여야 한다. 다라니를 외는 소리를 들으면서(耳根圓通)하거나 큰소리로 더욱 빠르게 하면, 다른데 관심이 없어지면서 생각이 들어 올 틈이 없어지게 되어 있다. 주력을 하면서는 구절구절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소리를 주의 깊게 觀하다 보면 무념에 들게 되며, 무념에 드는 열쇠는 이근원통에 있다고 능엄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소리가 없어지고 아는 마음까지 없어져서 무념처(無念處)에 들게 될 때가지 규칙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수련해 가다 보면 다라니를 하는 횟수가 하루하루 빠른 속도로 늘어나게 되고, 나중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어 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그러다가 더욱 빨라지면 몸의 어느 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빠른 속도로 그냥 자동으로 돌아간다.
이쯤 되면 애써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게 되는데, 마치 축음기의 판이 자동으로 돌아가듯 그렇게 흐르는 것처럼 계속 이어진다. 무엇을 하든 자리를 잡은 다라니는 계속 돌아가고 다라니가 몸을 끌고 다니며 일하고, 다라니가 주체가 되어 음식을 먹고, 행주좌와 中에도, 꿈속에서도 계속 끊어지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수행이 이어질 때는 일어나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그냥 잠이 들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면 몸도 경직된 것처럼 굳어있고, 악몽에 시달린다거나 복잡한 꿈으로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마치 묵직한 느낌 등 이지만, 자면서도 수행이 이어지면 이런 꿈들이 사라지고, 일어났을 때 선정에서 깨어날 때와 똑같이 몸이 가볍고 정신도 맑게 깨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시작과 중간 끝까지 알 수 있게 이어진다.
이 정도 숙련이 되면 몸은 하늘에 뜬 풍선처럼 가벼워지고, 진공(眞空)상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잠이 저절로 줄어들고 망상도 어디로 갔는지 송두리째 뽑힌 것 같음을 알 수 있으며, 혼침이 없어져서 항상 깨어 있다. 몸의 가죽을 마치 한 꺼풀씩 벗겨 낸 듯 나날이 새롭고 상쾌하여 지면서, 이런 날이 시작되어 며칠 지나지 않아 드러나는 자리가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반드시 스승을 찾아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 때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게 되면 얼굴이나 움직임만 보고도 벌써 수행의 경지를 알고 다음을 일러 주실 것이다.
이 주력의 힘(선정력)은 이후 화두를 드나 觀을 하나 무슨 대상으로 수행을 하든, 망상이 거의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수행의 주제를 끌고 갈 힘이 생기고, 이후에도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쉽게 오매일여가 되어, 짧은 기간 동안에 覺性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 그 힘의 밑천으로 세상을 자신감과 포용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에너지가 스스로 끊임없이 생겨남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다 녹여버릴 수 있는 용해제와 같은 자비심이 저절로 방사되어 짐에 환희와 행복감은 날로 확장되어 진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한번 정한 시간과 정진 일수 등은 꼭 지키는 강인함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100일을 정진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면 그 100일을 채우기 위해 첫 번째로 몸단속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처음부터 긴 날수를 계획하면 지루하여 포기할 수 있으므로 7일의 기한부터 정해 놓고 한다). 재가불자로서 또한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기본 五戒를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두 번째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조절, 환경을 비롯해서 오랫동안 정진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위해 보조수단으로 몸을 호흡에 잘 맞추어 절을 한다거나, 복식호흡과 선체조를 필히 곁들여 가면서 몸을 이완시킨 다음 정진을 하여야 된다. 몸은 내팽개치고 무작정 정진만 온 종일 하겠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행을 포기하겠다는 징조이고, 결국 선정력이 길러지는 게 아니고, 수행을 잘못하여 上氣되거나, 갖가지 병(골병)만 남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상기되었다고 느껴질 때는, 수행의 대상을 항문 쪽의 위치에 내려서, 의식을 아래로 내려서 하다보면 상기된 氣가 자연스럽게 내려온다. 기의 흐름은 의식을 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래도 내려가지 않으면 오체투지를 매일 30분 이상하면 상기되지 않는다. 너무 신경을 곤두세워 조급증을 내면서 하다보면 상기되고, 오히려 도거와 같은 현상이 와서, 수행을 금방 포기하게 되거나 정신분열증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행을 하다보면 자신의 체험이 스스로에게 참고가 되고, 다음의 수행은 마음이 알아서 저절로 방향을 제시해 주게 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헌신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을 내팽개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이며, 자신을 학대한다는 것은 곧 밖으로도 사람과 동․식물, 그리고 환경에까지 그 학대의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한 사람은 남을 존중한다. 자신을 아는 만큼 남을 알고 세상을 안다고 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 자비와 존경심이 진지할 때, 타인에게 그 자비스러움이 방사되어 퍼져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3) 수행일기 쓰기
수행일기는 매일 써야한다.
어떤 수행을 선택해서 하든,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는 기한을 정해 놓고 하면서 반드시 매일 기록을 해야만 한다. 예컨데 능엄주력을 하는 사람은 어제는 몇독을 했고 오늘은 몇 번을 했는지를 쭈욱 기록해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날 하루 사정이 있어 수행을 하지 못하였을 지라도, 수행일기를 써야만 하는 이유 때문에 반드시 조금이라도 수행을 하게 되고, 또한 다른 생각이나 방황을 하고 있다가도,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의 대상으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수행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득력이 될 때 까지는 심신의 단련을 위한 절이나 선체조 등을 해 나아가는 기록이라든가 하루의 일과를 세밀하게 기록하는 노력을 해가야 한다. 이렇게 기록 하다보면 스스로에게 참고자료가 되고 평생 수행을 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되며, 어느 수행지침서 보다도 값진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아진다.
수행일기에 기록 할 것은 수행이 잘되면 잘 된 대로, 안 되면 안 된 대로, 솔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수행이 안 되는 날은 왜 안 되었는지, 오늘은 왜 망상이 많았는지 등을 반성해 본다. 그 원인은 알게 되면 같은 망상은 거의 오지 않게 되어 있다. 원인 없는 망상은 없다. 의존하지 않고 발생하는 현상은 없기 때문에 모든 현상들은 반드시 그들의 원인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일체지는 반드시 원인들과 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체험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좌선은 몇 시간을 했고, 행선은 몇 시간을 했는지, 식사 할 때는 놓치지 않았는지도 살펴야 한다. 말을 많이 했는지, 행동은 더욱 삼가 했는지, 어떨 때 가장 많이 놓쳤는지 등을 소상히 기록해야 그런 부분들에서 다시 부딪혔을 때는 놓치지 않게 되며, 언행도 조금씩 변화가 온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대화(전화통화까지도)할 때, 화장실을 갈 때도 씻고, 음식을 먹으면서, 차를 마시고, 화낼 때, 즐거웠을 때, 그 중 어느 때 가장 많이 놓쳤는지 기록하다 보면 스스로 감시자가 되어 수행이 몸에 익고 망상도 줄어들게 된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서 정진을 할 때와 午後不食을 하고 수행을 하였을 때를 비교점검해 보고, 음식의 양을 많이 섭취했을 때와 소식 했을 때, 육식을 했을 때와 채식으로 하고 난 뒤의 변화, 또한 거칠고 딱딱한 음식과 부드러우며 달콤한 음식, 신 음식, 짠 음식, 매운 음식 등을 먹고 수행했을 때의 차이도 기록해 본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데 있어서 녹차와 커피를 마신 후와 기호음료나 술 등을 마신 후 등을 경험한 대로 옮겨 쓴다.
밥을 먹은 양이 많으면 위에서 소화시키는 시간이 많아서 수행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자꾸 졸음이 오게 되어 있다. 녹차나 발효차를 마시고 수행을 하면 정신이 안정되어 쉽게 삼매에 들고, 커피나 맵고 자극이 강한 것들을 섭취했을 때는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계속 감돌면서 흥분되고 산만하며, 불쾌한 기운이 계속 몸을 휘감음을 알 수 있다.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 속이 계속 부담이 가서 또한 집중이 잘 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에 자동으로 음식의 양과 종류를 알아서 먹게 된다. 이렇게 체크하다보면 스스로 戒를 지키게 되어 있다.
계절에 따라서 날씨의 영향을 받게 되는 변화도 정리해 두어야 한다. 눈․비가 오는 날, 흐린 날, 맑은 날, 또한 하루 중에서도 가장 집중이 잘되는 시간과 산만한 시간 등을 자세히 기록해 가면서 수행을 하면, 대충짐작으로 하는 수행보다 몇 배의 빠른 진보와 유익함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상의 부분들을 점검하는 것 이외에도 집중이 잘 안 될 때는 ‘어떤 마음으로 수행 했는가’를 일기에 기록해야 한다.
뭔가를 조급하게 성취를 바라는 탐욕이 있는 마음인지, 염려하고 불안걱정을 하는 마음이 있는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한 일들을 하였는지,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화내고 있는지 등을 점검하면서 정진을 하면, 그런 감정, 느낌 등의 원인이 알아지는 순간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세밀히 체크하고 점검해 보면 우리들이 하는 망상이 대부분 이상의 것들에서 오고 있음을 알아지게 된다.
그 밖에도 과거의 강한 기억들이 있다. 나쁜 감정은 자비와 용서로 용해시키고, 좋아했던 일들일지라도 깊이 살펴보면 그 안에 탐심이 미세하게나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 숙련이 될 때 까지는 산만한 곳이나 외출 등을 자제하고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어떤 대상과 부딪치더라도 그것이 안으로 해석되어지거나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훈련이 될 때까지는 주의하고 삼가지 않으면 퇴보하거나 스스로 좌절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반드시 기록하고 참회할 때 언행의 변화와 수행의 진보라는 유익함이 함께한다.
5. 맺는말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심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上․中․下의 근기에 따라 선교방편으로 근기에 맞는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환자에게 병의 증상과 체질에 따라 상이한 약을 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식의 방법을 쓰듯이 치료, 즉 解脫이라는 동일목적을 위해 다양한 진단, 처방, 처치를 사용하신 것이다. 특히 『능엄경』에서는 말세 중생들을 위하여 선정의 힘을 키우는 데는 만트라를 하는데 그 방법은 이근원통에 핵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계셨던 2,500년 전은 모든 환경이 성숙되어있었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세상이 너무도 어지럽고 복잡하며 오염된 환경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을 무시하고 마냥 앉아서 면벽하고 화두를 챙긴다든가, 그 외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아득하고 공허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부처님과 선지식들께서 강조하신 주력으로 부지런히 선정의 힘을 키워 득력이 된 후에는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과도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행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린다.
몇 번을 강조하여 禪定에 들어가야만 空을 체험하게 된다. 空性을 체험하지 않은 자에게는 五毒을 없애기란 매우 힘이 든다. 공성을 자꾸 체험하고 올바로 이해함으로서 無常, 苦, 無我를 느껴서 자비로 승화되어 언행이 바뀌고, 우리의 모든 삶은 저절로 변화가 오며, 무엇보다도 가장 큰 수확은 사물의 본성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말씀하신,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각자의 수행이 더욱 진보가 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 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키우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누가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는가. 다름 아닌 우리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들이다“
※참고문헌
楞嚴徑(1995), 동국역경원
석 인기(1972), 『大如來佛頂楞嚴呪』, 한국불교연구소
俱舍論(1988), 동국역경원
석설오 역(2002), 『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효림
달라이라마(2004), 『용서』, 오래된 미래
변순미(2003),『楞嚴心呪 悉曇梵字 한글표기에 관하여』, 불교학 연구학술논문집
이지수(2002), 『인도에 대하여』, 통나무
密敎辭典(1998), 홍법원
佛敎辭典(2002), 동국역경원
-수행에 관해 많이 나오는 질문 5가지-
Q1.: 다라니는 너무 강해서 약한 사람이 하면 귀신이 보이거나 휘둘려서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A: 다라니는 특히 약한 사람을 위한 수행방편이다. 위에서 다라니의 의미와 왜 해야 하는지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귀신에 관하여서는, 우리의 눈에 보인다고 인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흔히 수행을 하다가 귀신이나 잡신에게 흐림을 당하거나 유혹되거나 반하여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동굴 같은 곳은 귀신들이 머무르기 좋은 환경인데, 그곳에 들어가 수행하면 귀신들의 공간을 빼앗기게 되므로, 다른 사람이 내 집에 쳐들어오면 싸움을 하듯, 해침을 해 온다. 더욱이 힘센 귀신들이 살지 않는 곳을 택해야 한다.
이럴 때는 자비를 베풀어서 스스로 이겨내던가. 의식을 통해서 해결해야한다. 무서워하면 당하게 되어있다. 또한 경우는 번뇌가 강해서 귀신으로 나타난 것으로 착각한다.
남방의 유명한 선사로 만트라를 하면서 위빠싸나를 이룬 아짠선사의 경험담을 옮겨 보고자한다.
…아짠 문이 동굴에 들어가 수행을 하려하자, 그 마을 사람들이 그 동굴은 엄청난 거인의 귀신이 살고 있어서, 그 동굴에 가는 사람은 누구든 죽거나 기절하거나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서 나온다면서 말리지만, 아짠은 오히려 지혜를 계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동굴에 들어가 삼매를 닦는다.
어느 날, 눈앞에 귀가 10미터 정도나 되는 검은 피부의 거인이 나타났다. 그 거인은 몽둥이를 들고 아짠에게 다가와,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산을 지킬 권한을 부여받아 왔으며 감히 내게 도전해서 나를 이기려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이 동굴을 당장 떠나지 않으면 몽둥이로 박살내겠다”고 하였다.
아짠은 그 귀신과 텔레파시(정신 감응)로 교신을 하면서 “나는 아무에게도 도전하지 않았으며 누군가를 이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번뇌에 도전하여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 이다. 그대가 삼계(欲界, 色界, 無色界)를 자비의 힘으로 감화시키는 붓다의 제자인 나를 해치고자 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가 자랑하는 것처럼 정말로 능수능란한 힘을 소유했다면 세 영역(三界)의 모든 존재들을 지배하는 위대한 법인 까르마(karma, 業)와 다르마(법)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묻자 귀신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아짠은 계속해서 물었다.
“붓다는 남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욕망을 제거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다” 귀신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했다.
아짠은 그가 지닌 힘은 야만적이어서 자신에게 해가 될 뿐임을 지적하며 귀신을 훈계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힘은 자신을 태워버리는 불과 같은 결과만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그대자신을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정말 몸에 해로운 까르마인 것이다. 나는 올바른 길이 8정도를 따라가는 한 사람의 스님이다.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이건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망이다. 그대는 지금 자신을 해칠 어떤 사악한 생각도 하지 않는 나를 해치려고 한다. 일단 행동을 멈추고 자신이 행하려는 악업의 결과에 대항 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대가 나를 죽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죽게 될 테니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힘에 대한 집착이 현혹된 그대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다 죽게 마련이다.”
이렇게 아짠이 계속 훈계하자 귀신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패배를 몹시 두려워하며 수치스러워 했다. 결국 사신은 주문에 걸린 듯 아짠의 훈계가 끝날 즈음에 몽둥이를 내려놓고 굴복하였다.
그리고 스님의 강력한 자비의 빛에 오히려 타격을 받았다면서, 자신의 위협은 가장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어느새 신심 깊은 신자가 되어, 아짠에게 그곳에서 계속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은 아짠의 수호신으로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아짠 문』-불광출판사-)
Q2.: 평소에는 모르겠는데, 앉아서 수행을 하려고만 하면 망상이나 과거의 일들이 스크린이 지나가듯 계속 나타난다.
A: 마음속이 심한 산란심으로 괴로울 때는, 수행을 하기 전에 멋대로 방일하면서 살았던 결과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서, 그로 인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떠올려야 하며, 그 흐름을 멈추도록 바로 지금 정복해야 한다.
의사가 약으로 고칠 수 없는 환자에게는 피를 뽑고 부황을 뜨는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든가,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기, 용서를 하는 것만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삶을 항상 점검하며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신없이 헤매고 다닐 때도 망상이 무수히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겼다 없어지고 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수행을 하면 점점 깊은 단계에 들어, 거친 수위의 마음이 제거되면서,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俱舍論』에서는 우리의 지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의 최소 단위가, 한 찰나는 1/75초로 환산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 1초에 75회의 生滅이 있지만, 우리가 바깥의 강한 경계에 휘말려 그것을 감지하지 못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고요히 앉아서 수행하면 떠오르게 되어 있으므로, 좌선만 하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이때는 망상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주제의 수행을 열심히 觀하고 또 관하면서 수행하다보면, 이러한 것들은 사라지게 되어있다. 그래도 같은 망상이 계속되면 위의 각 처방을 사용하면서, 무엇보다도 구름이 벗겨지고 햇빛이 드러나듯 할 수 있는 길은 선정력을 기르는 길이 가장 지름길이다.
Q3.: 수행하는 조건이 어렵다.
A: 수행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기란 매우 어렵다. 대수롭지 않은 세속의 일에서도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수행을 할 때도 지금 이만큼의 조건을 갖추었을 때 슬기롭게 활용하지 못한 채 지나쳐버려서는 안된다. <
세속의 일이란 턱수염과 같다. 턱수염이 밀어내면 길어나고 또 밀어내도 길어나듯이 세속의 일도 끝이 없다. 언제 염라대왕 앞에 갈지 우리는 모른다. 나이가 많다고 먼저가고, 젊다고 나중에 가라는 순서는 없다. 예로부터 오는 순서(出生)는 있어도 가는 순서(죽음)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닦지 않으면 평생 차일피일 이런저런 조건만 따지다가 어느 날 염라대왕의 문을 노크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Q4.: 얼마나해야 깨 칠 수 있는가?
A: 수행을 하고자 하는 환희로운 마음으로 수행에 입문한 때로부터 완전하게 깨달을 때까지 항상 정진에 의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노력은 하지 않고 앞서 가는 사람만 쳐다보면서 조급증만 내는 것은, 욕심을 하나 더 보태는 격이 되고, 무리하게 하다가 상기되어 건강을 해쳐서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공부들이 정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꾸준한 자기점검과 노력만이 진보가 있을 뿐이다.
하루 일과는 좌선할 때와 쉴 때 두 가지로 나뉘며, 身口意로 인한 모든 행이 이 두 가지 안에서 이뤄지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의미 있게 하면 하루 일과도 의미 있게 보내게 된다. 그렇게 한달, 일년 등을 꾸준하게 보내면 일생을 의미 있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좌선 시 열심히 정진을 했더라도 쉴 때에 산란하게 보내면 다시 정진하려 할 때 무척 해롭게 된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을 때에 자신의 입을 살피고, 혼자 있을 때는 마음을 살펴 단속하면서 자신의 수행의 주제를 놓치지 않도록 늘 점검에 점검을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
Q5.: 혼침이나 도거가 올 때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A: 부처님께서 비파줄을 너무 조이거나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나지 않으니, 적당하게 조여야 제대로 소리가 난다고 하셨던 것처럼, 미세한 혼침이 생겼을 때 마음을 너무 조이면 도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적당하게 조여야 한다. 그러다가 혼침이 생기겠다 싶은 마음이 들면 조금 더 조여 준다.
예를 들어 만트라를 하다가 혼침이 오면 소리를 조금 더 크게 하다가 혼침이 사라지면 다시 본래의 톤으로 한다든가, 더욱 빠르게 하거나 조금 느리게 하는 등의 리듬으로 하다 보면 혼침이 사라지고 다시 밝고 명료해 진다.
그래도 없어지지 않으면 호흡을 한다든지, 찬물로 세수 등을 하거나 시원한 장소 등으로 옮긴다
불자라 함은, 먼저 윤회세계가 고통 그 자체임을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이 오직 불법승 삼보에만 있다는 믿음, 이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강한 믿음이 생길 때, 완벽한 수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며, 올바른 스승을 찾는 방법과 수행하기에 가장 완벽한 몸을 받는 것에 대한 사유, 또 무상과 인과 등을 사유하고, 그런 다음 단계별로 수행하여야 참된 진전이 있다.
姜 善姬(善明華)
1. 들어가는 말
2,500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는 오늘날의 인류와 시대에도 놀라울 정도로 부합하면서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진정한 보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불교가 마음의 행복에 이르는 효과적인 청사진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결론을 내린 것처럼, 신체적인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 심각하게 오염된 환경을 가장 친 환경적으로 복원하는 데도 불교보다 더 가치 있는 가르침은 없다는 결론에 차츰 도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의 가장 큰 가치는 우리 인간의 생각을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업을 바꾸어 나와 더불어 세상을 안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수행을 통하여 잘못된 관행과 관습을 깨닫는데 있다. 사람은 깨닫고 나면 비로소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란 자신만이 옳다는 자만과, 항상 남을 믿지 못하는 의심, 내 것에 대해 집착하는 탐심과, 욕심에서 비롯된 화, 그리고 인과와 무상 등을 모르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로만 사는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는 것이 잘못된 관행과 관습에 따르는 삶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살아온 관습을 고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덕행을 쌓는데 많은 노력을 하면서, 일체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소원과 실천을 하고, 깨달음을 향한 필수적인 선정을 개발하여 空性을 체험함으로서, 삼법인(無常, 苦, 無我)과 인과를 알게 될 때, 비로소 業에 얽매어 살지 않고, 업을 제도하면서 살수 있게 된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성불(成佛)의 길(道”) 즉 일체지(一切智)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계의 차제(次第)가 있다.
그 첫 번째 실행으로 자량도(資糧道)를 닦도록 하고 있다.
긴 여행을 떠나려면 여행에 드는 노자돈이나 식량 등을 마련하듯이, 근기를 성숙시킬 수 있도록 삼보(三寶)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신심과 함께 기도, 보시, 자비의 실천 등으로 자량을 충분히 쌓고 나서 法을 전수 받는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로는 여행준비를 다 마쳤으면 여행길을 떠나듯, 가행(加行)을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서는 먼저 법기(法器)를 만든다. 법수(法水)를 내 그릇에 옮겨 담으려면 그릇을 깨끗이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다섯 가지의 독인 탐, 진, 치, 자만, 의심으로 쌓인 그릇을 깨끗이 닦아야만 법수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독(五毒)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전 우주에 통용되는 만트라를 한다. 그래서 부처님 재세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선사들이 다라니 주력을 많이 하였다고 전해진다.
근대 한국불교의 대선사이신 이 성철종정스님께서도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절을 많이 하도록 하였고, 능엄주를 외우지 못한 납자는 선방의 입방을 불허하셨다고 한다. 모두 이러한 차제를 거쳐야만 비로소 수행을 할 기본자세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法을 담을 만한 그릇이 깨끗이 씻어진 후 法을 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승불교권의 티벳에서는 사가행(四加行)을 하는데, 우선 大拜를 10만 배하면서, 정화 만트라를 10만 번하고, 그 과정을 마치면 만다라 공양을, 마지막으로 구루요가를 한다. 온전한 깨달음이 되기 위하여 티베트 불교에서 가르치는 단계적 수행은 부처님의 일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대열반경』에서,
“발자국 중에서 최고는 코끼리의 발자국이고, 모든 인식 중에서 최고는 무상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완벽한 수행을 할 수 있다.
수행과 수행이 아닌 것의 경계는 번뇌의 치료제가 되면 그것이 수행이고, 치료제역할을 하지 못하면 수행이 아니다.
번뇌가 있으면 과거에 쌓은 업이 비록 없더라도, 갑자기 번뇌로 새로운 업을 쌓아서 윤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윤회하는 뿌리는 번뇌이다. 업과 번뇌 등 태어날 원인이 없어지면, 그것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번뇌의 암덩어리인 오독 중 탐심(貪心)은 ‘부정관(不淨觀)’으로 치료하고, 성냄은 ‘인욕관상’과, 자애심으로 치료하는데, 화내기 전과 화를 낼 때,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화냄의 죄를 알아서 인욕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를 고통에 빠지게 하고, 자기목숨까지도 끊게 하는 것들은 모두 화냄의 허물이다. 원수를 모두 없애고 싶어서 없앤다고 해도 중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원수도 끝을 낼 수가 없다. 그보다는 원인인 화내는 마음만 없애면 모든 원수를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치심(癡心)과 의심(.疑心)의 치료제는 ‘연기법(緣起法)’과 ‘공성(空性)’에 대한 올바른 견해 등을 사유해야 된다. 오독 중 다섯 번째인 자만(自慢)의 치료제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살펴서 교만을 줄여야 한다. 또한 병듦과 늙어감 등의 생로병사로 세속적인 행복이 자주 바뀐다는 것 등을 관상해야 한다.
번뇌 중에서 가장 강한 것부터 먼저 닦아 가는데,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아서 어떤 것이 가장 강한지를 가려내고, 치료제로써 그것을 닦아야 한다.
모든 번뇌의 뿌리인 무지는 자신을 집착함에 의해서 탐, 진, 치, 아만, 의심 등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업을 쌓게 되며, 그것이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오독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아집의 무지함’에 대한 치료제인 ‘무아(無我)’를 깨닫는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병통치약은 ‘무아를 깨닫는 지혜’라고 한다.
무아를 바르게 깨우치고자 할 때는 三學 중에서 禪定을 이루는 것이다. 산란함이 없이 선정이 깊어지는 방편으로는 戒를 지키면서, 아집의 치료제인 공성을 깨달아 지혜를 갖추는데,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禪定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정을 잘 길들여져서 언제든지 선정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고 머물 수 있다면 남은 세 가지(見道, 修道, 無學道)를 이루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셋째로는 見道를 한 후 수도(修道-悟後起修-)를, 마지막 다섯 번째 무학도(無學道)로 이후 세상에 나와 중생제도에 전념하는데, 십우도(十牛圖)가 이를 펼쳐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선정의 개발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은 가장 높은 禪定의 경지를 얻으신 분이다. 그 높은 선정의 상태에서 연기(緣起)를 발견하여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반영해보고, 다시 태어나는 조건들인 번뇌가 남김없이 제거(漏盡通)된 후, 그 道의 진리인 사성제와 8정도를 설하신 것이다.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이토록 중요한 선정을 개발하지지 못한다면 평생 수행을 하였다 하여도 아득할 뿐 수행의 진보 없이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므로, 선정력을 길러서 일상생활에서도 수행이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을 볼 때 주력수행은 선정력을 기르는데 가장 중요한 선교방편(upāya-kusala)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력수행이 갖는 다음과 같은 유익함 때문이다.
주력(呪力-혹은 만트라,mantra-)이란 신비한 힘을 가진 진언이나 다라니를 계속 지속적으로 믿음을 갖고 독송(讀誦)하면 모든 마장으로부터의 보호와 선정의 힘을 길러주는 힘이 있고, 독을 해독하는 해독제의 역할도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만트라’는 마음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우리의 마음을 용렬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만트라의 ‘만(慢)’이란 마음이란 뜻인데, 여기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 )․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을 가리킨다. 곧 하열하고 범속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호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만트라(Mantra)의 ‘만’은 진여지(眞如智)요, ‘트라’는 트라야(Traya)에서 온 것으로, ‘중생들의 비심(悲心)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즉 ‘공성을 증득하여 얻은 지혜와 대비심이 하나가 된 것’을 뜻한다.
혹은 ‘지혜와 방편이 하나인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지혜가 방편을 버리지 않고, 방편 또한 지혜를 저버리지 않음을 가리킨다”(『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中에서)
2. 주력수행의 의미
-능엄주 다라니를 중심으로-
능엄주(楞嚴呪)란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定을 닦는데 힘을 돕는 呪文'(Śũraṇgama samādhi dhāraṇī)이라는 뜻이다. 능엄주는 『능엄경』의 찬술단서를 제공하는데 10권 가운데 제7권에 수록되어 있다. 『능엄경』설은 망심을 깨뜨리고 그 자리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기나긴 수행관문을 세존과 아난의 문답을 통해서 설파하고 있다. 우선 세존은 갖가지 방편을 써서 아난의 망심을 정교한 이론과 타당성을 통해 깨뜨리고 들어가 마침내 진심을 밝히고 나니(제1.2권), 이제 그 곳은 眞妄이 不二한 如來藏心임을(제3권) 깨닫게 하셨다. 여기에서 망심에서 진심에 이르는 正見을 위한 理와 事의 양면 방편수행공덕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방편수행이란 비밀스런 송주(제7권)를 부지런히 하는 일로서 이론적으로 그 공덕의 수승함을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수행을 하되(제8권) 자세한 경계와 유의점들은 좌선의 태도에서 구체화하여 제시하고(제9.10권) 있다. 『능엄경』의 찬술 동기도 능엄주를 중심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현교와 밀교가 원통함을 알 수 있으며, 능엄경 교설은 망심을 현교와 밀교가 하나임을 전제로 참다운 禪學的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능엄경』은 그 내용이 실천적 수행관인 참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도 매우 존중되어 온 경전 중의 하나로 전통 강원의 이력과정인 사교과(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대승기신론)의 한 경전으로 학습되어 오고 있다.
인도의 불교를 顯敎(석존 성도 이후부터 AD 8C까지:원시,부파,대승불교)와 密敎(AD 4C~)시대로 구분을 하기도 하고, 요즘은 남방 테레바다 불교, 북방의 대승불교, 티벳 불교, 선불교 등으로도 나누지만, 인도의 종교 철학 사상과 시대상황 내지 인도사 전반을 놓고 볼 때, 어느 한 부분만을 시대에 맞추어 규정짓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관련서적들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인도에서 불교의 발생이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이미 2천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처님이 태어난 시기에 이미 베다, 바라문교 등의 종교가 있었고, 고도로 발달된 도시문명과 과학, 의학, 합리적인 토론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AD 8-9세기 경부터 불교가 차츰 사라지면서 티벳으로 이전되거나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어 오늘날에는 역수입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인도로 귀착된다. BC 6-5세기경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되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천재성이나 우연이 아니고, 그 이전에 이미 2천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苦, 무지, 윤회, 업, 해탈의 관념들은 우빠니샤드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우빠니샤드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BC 1,500년경부터 서북 인도를 넘어 인도반도에 침입해 온 인도․아리안의 베다문화가 있고, 또 이들이 이룩한 제식주의적인 바라문교 문화가 있다. 그리고 인도․아리안족이 인도에 침입했을 땐 BC 3,000년경부터 고도로 발달된 도시문명을 건설한 원주민인 인더스문명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불교라는 고도로 합리적․분석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종교와 철학체계가 탄생되기 위해서는 요가적․고행적 요소를 가진 인더스 문명과, 현실적이고 논리적․분석적인 인도․아리안의 베다문화라는 두 이질적인 요소사이의 갈등과 창조적 종합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 두 요소가 한편으로 우빠니샤드로 통합되어 베란따라는 힌두교의 정수를 낳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의 울타리를 넘어선 불교라는 세계종교로 발전되었다.”(이 지수 교수의 『인도에 대하여』,中에서)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알게 된다면, 간화선만이 참 수행법이라고 한다거나 염불이나 위빠싸나만이 진짜 수행법이라고 우기면서 자기가 하는 수행 이외에는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편견이라 본다. 열린 마음으로 여러 수행을 이해하고 자기에게 맞는 주제와 수행방법으로 정진을 하여야 진보 있는 유익한 수행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관련 문헌들의 다라니에 대한 설명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무량무변한 이치를 섭수해 지니어 잃지 않는 염혜(念慧)의 힘을 일컫는다. 곧 일종의 기억술로서 하나의 일을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일까지를 연상(聯想)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②보살이 남을 교화하기 위해 다라니를 반드시 얻지 않으면 아니되며, 이것을 얻으면 한량없는 불법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대중 가운데 있어도 두려움이 없고, 또한 자유자재로 정교한 설법을 할 수 있다.
③보통으로 다라니를 지혜 혹은 삼매를 말한다. 이것은 말을 잊지 않고 뜻을 분별하며 우주의 실상에 계합하여 수많은 법문을 보존하여 가지기 때문에 끝없는 이치를 알아 학해(學解)를 돕고 모든 장애를 벗어나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등 많은 공덕이 있으므로 다라니라 한다는 등
초기불교 교단에서도 불교도를 수호하며 재난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용하다가 점차로 마음을 통일하는 수행으로 응용되고 드디어는 陀羅尼야말로 불교의 근본이라고 하는 사상, 곧 Dhāraṇī는 法(Dharma) 바로 그것이기에 法이 갖는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것으로까지 승화되었다고 한다.
인도 수행의 역사를 보더라도 5천년 전부터 타파스(tapas:고행)→yoga→禪의 순으로 발전해 옴을 알 수 있다.
만트라를 眞言, 呪, 神呪, 密呪, 密言 등으로도 번역하며,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誓願을 의미하고, 비교적 짧은 呪를 「진언」이라하고, 긴 呪를 「다라니」라 한다.
능엄다라니는 530여 구(석 인기역, 『大如來佛頂楞嚴呪』,로 구성된 가장 긴 다라니이며 주 내용은
수능엄경 제7권에는
"수행자(修行者)는 누구든지 수행(修行)의 완성과정으로 『大如來의 佛頂首楞嚴經』을 수학(修學)하고, 修行해서 영해(領解)해야 佛敎의 철리(哲理)를 알고, 무상정편지정각(阿耨陀羅三藐三菩提)을 깨달아서 부처님의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아 成佛한다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회에 발표된 논문의 자료들을 통해 송나라 때부터 선가에서는 아침․저녁 송주에서 반드시 능엄주를 하고, 티벳불교에서도 큰 행사 등을 할 때는 모든 마장을 없애고 불보살님과 신장님들의 가피를 얻기 위하여 능엄주를 먼저 독송하고 행사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 한국불교에서 주력을 하신 대표적 선사는 백용성스님께서 六字진언으로 悟道를 하셨고, 혜월선사께서도 천수다라니 주력을 하여 지혜를 얻었다는 것은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성철 전종정스님의 회상에서는 한때 능엄주를 외우지 못하는 승려는 입방을 불허했으며, 능엄주를 외우는 조건으로 입방을 허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성철스님의 회상에서는 많은 절을 하고 아비라기도 라든가 능엄다라니 주력 등을 하도록 하는데, 이는 한국의 사찰 중에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그 차제를 가장 잘 유지하며 실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외 한국의 고승이신 향곡, 자운, 청담, 효봉, 일타, 서암, 정영스님 등도 항상 송주는 능엄주를 하셨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특히 대승불교권에서는 능엄다라니가 선정력을 길러주고 지혜를 유지하는데 미치는 영향이 선가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제방의 선방과 많은 사찰에서 능엄주력을 하고 있다.
3. 주력수행의 공덕
『수능엄경』 序品에
“어느날 파사익왕이 부처님을 궁궐로 청하여 공양을 받쳤다. 같은 날 아난은 별청을 받고 멀리 갔다가 혼자 돌아오는 도중에 공양시간이 되어 걸식을 하러 가다가 마등가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사비가라의 선범천주(先梵天呪)로 아난을 붙들고 음실(婬室)로 들어가서 음란한 몸으로서 아난을 유혹하여 파계를 시키려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이 마등가의 요술에 붙들린 것을 아시고서 공양을 마치자마자 곧 돌아오시니, 王과 大臣과 長者, 居士들이 따라와서 부처님의 법요를 듣고자 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頂上으로부터 百가지 보배롭고 무외(無畏)한 광명을 놓으시고, 광명 속에는 천엽의 연화가 출현하였는데 부처님의 화신이 앉아서 神呪를 말씀하여 문수사리보살에게 명하기를 ‘이 신주를 가지고 가서 아난을 구해오라’고 하시었다. 문수사리보살은 신주를 가지고 가서 惡呪를 소멸하고서 아난과 마등가를 이끌고 부처님의 처소로 돌아왔다.
아난이 돌아와 부처님의 발에 頂禮를 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출가한 후로 부처님의 사랑을 믿사옵고 多聞만 求하였으므로 無爲를 증득하지 못하였아오며 梵天의 邪術에 갇혔을 적에 마음은 비록 명료(明瞭)하였으나 자유로이 벗어날 힘이 없었는데 문수보살을 만나서 벗어났습니다. 비록 여래의 佛頂呪를 받자와 그 신통력의 가피를 입었사오나, 친히 듣잡지 못하였아오니 바라옵건데 대자비로서 다시 宣說하시와 현재와 미래세에 윤회하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의 믿음을 받잡고, 몸과 마음을 해탈케 해 주시옵소서’ 이때에 회중의 일체대중이 모두 예배하고 여래의 비밀한 章句를 듣고져 하자, 부처님께서 선설하셨다” 고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대여래불정능엄주』공덕부 참조)
4.주력수행의 방법
부처님께서 모든 수행은 定․慧의 병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정(사마타)을 배제한 채 혜(위빠싸나) 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공허한 직관에 불과하다. 사마타(定)를 익히지도 않은 채 수행을 하면 마음이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관의 심오한 수준까지 도달하기 힘들어진다. 어떤 주제로 수행을 하든, 선정력이 없는 수행을 한다면 그저 거품처럼 부글거리는 생각의 단편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定은 외부 대상으로부터의 산란함을 가라앉히는 것이며, 항상 자연스럽게 수행의 대상을 향하여 환희와 경안을 지닌 마음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이 외에도 혼침과 도거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몸과 마음의 결점을 서서히 극복해 나가는 것이기도 한다. 慧는 定에서 여여함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定과 慧는 같이 작용한다. 마음은 수행의 대상(능엄주)에 집중함으로써 고요하게 된다. 앉아서 주력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매우 고요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을 定이라고 한다. 결국 이 집중력은 대상(다라니의 각 구절)을 끊임없이 觀하는 것으로서 유지되며, 자동적으로 慧를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이 자연스럽게 순환한다.
“만트라를 처음 할 때에는 각 구절을 번갈아 주의를 집중하면서, 자신의 귀에 들릴 정도의 소리크기로 빠르고 느리지 않는 똑같은 속도로 한다. 만트라를 하는 동안 혼침이 온다고 느껴질 때는 소리를 觀하기 시작하는데, 소리를 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염송하는 소리를 듣는 듯이 관상한다. 그렇게 해 가다가 집중이 되면 오로지 고요한 가운데 만트라의 소리를 사유하면서 삼매를 닦는다. 마음과 만트라의 소리까지도 다 잊은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止觀삼매에 들게 된다. 삼매의 힘은 소리를 이용한 선정상태에서 증장되지만, 소리가 다 섭수된 후에 갖게 되는 상태에서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中에서)
다시 말해 다라니의 한 구마다 계속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하다 보면, 마치 재봉틀 바늘이 천을 일정한 속도로 박으며 지나가듯 하다가, 차츰 다라니와 관하는 마음이 회오리바람이 돌아 뭉치듯 하나로 합쳐지면서부터 점점 몰입 하게 되고, 이 상태로부터는 망상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사람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몰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노력을 해 가면 다라니가 몸에 달라붙게 되면서, 앉아 있을 때나 걸어 다닐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 마음은 여전히 고요하고, 꿈속에서도 이어지면서 그 고요함과 밝음을 연속하여 유지하는 힘이 증장되어 진다. 이때부터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짐을 알 수 있으며, 수면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定과 慧가 별개의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어떤 주제로 수행을 하든, 같이 작용한다는 것은 체험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고요해 지면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오는 정확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바람에 출렁거리던 바닷물이 바람이 멎고 잠잠해지면서 모든 티끌까지도 다 가라앉아 마침내는 바다 밑이 훤히 보이는 것과도 같다. 禪定力이 없이는 이런 효과를 쉽게 발휘하지 못한다.
1) 외우기
다라니는 대체로 길고 발음을 하기도 어렵거니와 외우기도 힘이 든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외우려고 하다보면 힘에 부쳐서 쉽게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외우려 하기 보다는 우선 자연스럽게 읽는 연습을 꾸준히 해 가야 한다. 발음이 어려워서 경우에 따라서는 입술이 부르트기도 하고, 몸에 열이 나기도 하며, 이가 시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자신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나 속으로 해 가면서 몸을 잘 컨트롤(Control) 해 가며 하루하루 몇 독씩 더 해 나아가는 걸로 서서히 해야 한다.
발음이 자연스럽게 되면 읽는 속도가 차츰 빨라지게 되고, 그럴 때는 읽는 횟수를 점점 늘려간다. 횟수를 늘려 읽다 보면 반복되는 구절부터 자연스럽게 외워지게 된다. 그렇게 십수일이고 몇 달이고 혹은 더 긴 세월을 걸려서라도 하다 보면 어느 날 다라니가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서 마치 몸 전체가 다라니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든든하다.
2) 주력수행
다라니가 다 외워지면 하루에 7독을 일주일 간, 그 다음은 21독을 일주일간, 그 다음은 …, 이렇게 횟수를 본인의 형편과 몸에 맞게 늘려 나아가야한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하려면 처음 시작할 때에는 시간을 짧게 해야 한다. 짧은 시간이라면, 어떤 것을 하든 즐겁게 느낄 것이다.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지치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매일 몇 독을 하였는지 기록하고, 또한 스스로 정한 횟수가 일찍 끝나면 계속 횟수를 늘려가면서, 속도를 점점 빠르게 하는 훈련을 해 가다 보면, 숙련이 되어 망상이 들어 올 틈이 차츰 줄어들게 된다.
시끄러운 곳에서나 집중이 잘 안되는 곳에서는 소리를 내어서 하면서 그 소리를 마음으로 들어가며 하여야 한다. 다라니를 외는 소리를 들으면서(耳根圓通)하거나 큰소리로 더욱 빠르게 하면, 다른데 관심이 없어지면서 생각이 들어 올 틈이 없어지게 되어 있다. 주력을 하면서는 구절구절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소리를 주의 깊게 觀하다 보면 무념에 들게 되며, 무념에 드는 열쇠는 이근원통에 있다고 능엄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소리가 없어지고 아는 마음까지 없어져서 무념처(無念處)에 들게 될 때가지 규칙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수련해 가다 보면 다라니를 하는 횟수가 하루하루 빠른 속도로 늘어나게 되고, 나중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어 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그러다가 더욱 빨라지면 몸의 어느 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빠른 속도로 그냥 자동으로 돌아간다.
이쯤 되면 애써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게 되는데, 마치 축음기의 판이 자동으로 돌아가듯 그렇게 흐르는 것처럼 계속 이어진다. 무엇을 하든 자리를 잡은 다라니는 계속 돌아가고 다라니가 몸을 끌고 다니며 일하고, 다라니가 주체가 되어 음식을 먹고, 행주좌와 中에도, 꿈속에서도 계속 끊어지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수행이 이어질 때는 일어나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그냥 잠이 들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면 몸도 경직된 것처럼 굳어있고, 악몽에 시달린다거나 복잡한 꿈으로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마치 묵직한 느낌 등 이지만, 자면서도 수행이 이어지면 이런 꿈들이 사라지고, 일어났을 때 선정에서 깨어날 때와 똑같이 몸이 가볍고 정신도 맑게 깨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시작과 중간 끝까지 알 수 있게 이어진다.
이 정도 숙련이 되면 몸은 하늘에 뜬 풍선처럼 가벼워지고, 진공(眞空)상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잠이 저절로 줄어들고 망상도 어디로 갔는지 송두리째 뽑힌 것 같음을 알 수 있으며, 혼침이 없어져서 항상 깨어 있다. 몸의 가죽을 마치 한 꺼풀씩 벗겨 낸 듯 나날이 새롭고 상쾌하여 지면서, 이런 날이 시작되어 며칠 지나지 않아 드러나는 자리가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반드시 스승을 찾아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 때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게 되면 얼굴이나 움직임만 보고도 벌써 수행의 경지를 알고 다음을 일러 주실 것이다.
이 주력의 힘(선정력)은 이후 화두를 드나 觀을 하나 무슨 대상으로 수행을 하든, 망상이 거의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수행의 주제를 끌고 갈 힘이 생기고, 이후에도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쉽게 오매일여가 되어, 짧은 기간 동안에 覺性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 그 힘의 밑천으로 세상을 자신감과 포용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에너지가 스스로 끊임없이 생겨남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다 녹여버릴 수 있는 용해제와 같은 자비심이 저절로 방사되어 짐에 환희와 행복감은 날로 확장되어 진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한번 정한 시간과 정진 일수 등은 꼭 지키는 강인함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100일을 정진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면 그 100일을 채우기 위해 첫 번째로 몸단속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처음부터 긴 날수를 계획하면 지루하여 포기할 수 있으므로 7일의 기한부터 정해 놓고 한다). 재가불자로서 또한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기본 五戒를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두 번째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조절, 환경을 비롯해서 오랫동안 정진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위해 보조수단으로 몸을 호흡에 잘 맞추어 절을 한다거나, 복식호흡과 선체조를 필히 곁들여 가면서 몸을 이완시킨 다음 정진을 하여야 된다. 몸은 내팽개치고 무작정 정진만 온 종일 하겠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행을 포기하겠다는 징조이고, 결국 선정력이 길러지는 게 아니고, 수행을 잘못하여 上氣되거나, 갖가지 병(골병)만 남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상기되었다고 느껴질 때는, 수행의 대상을 항문 쪽의 위치에 내려서, 의식을 아래로 내려서 하다보면 상기된 氣가 자연스럽게 내려온다. 기의 흐름은 의식을 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래도 내려가지 않으면 오체투지를 매일 30분 이상하면 상기되지 않는다. 너무 신경을 곤두세워 조급증을 내면서 하다보면 상기되고, 오히려 도거와 같은 현상이 와서, 수행을 금방 포기하게 되거나 정신분열증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행을 하다보면 자신의 체험이 스스로에게 참고가 되고, 다음의 수행은 마음이 알아서 저절로 방향을 제시해 주게 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헌신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을 내팽개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이며, 자신을 학대한다는 것은 곧 밖으로도 사람과 동․식물, 그리고 환경에까지 그 학대의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한 사람은 남을 존중한다. 자신을 아는 만큼 남을 알고 세상을 안다고 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 자비와 존경심이 진지할 때, 타인에게 그 자비스러움이 방사되어 퍼져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3) 수행일기 쓰기
수행일기는 매일 써야한다.
어떤 수행을 선택해서 하든,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는 기한을 정해 놓고 하면서 반드시 매일 기록을 해야만 한다. 예컨데 능엄주력을 하는 사람은 어제는 몇독을 했고 오늘은 몇 번을 했는지를 쭈욱 기록해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날 하루 사정이 있어 수행을 하지 못하였을 지라도, 수행일기를 써야만 하는 이유 때문에 반드시 조금이라도 수행을 하게 되고, 또한 다른 생각이나 방황을 하고 있다가도,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의 대상으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수행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득력이 될 때 까지는 심신의 단련을 위한 절이나 선체조 등을 해 나아가는 기록이라든가 하루의 일과를 세밀하게 기록하는 노력을 해가야 한다. 이렇게 기록 하다보면 스스로에게 참고자료가 되고 평생 수행을 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되며, 어느 수행지침서 보다도 값진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아진다.
수행일기에 기록 할 것은 수행이 잘되면 잘 된 대로, 안 되면 안 된 대로, 솔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수행이 안 되는 날은 왜 안 되었는지, 오늘은 왜 망상이 많았는지 등을 반성해 본다. 그 원인은 알게 되면 같은 망상은 거의 오지 않게 되어 있다. 원인 없는 망상은 없다. 의존하지 않고 발생하는 현상은 없기 때문에 모든 현상들은 반드시 그들의 원인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일체지는 반드시 원인들과 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체험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좌선은 몇 시간을 했고, 행선은 몇 시간을 했는지, 식사 할 때는 놓치지 않았는지도 살펴야 한다. 말을 많이 했는지, 행동은 더욱 삼가 했는지, 어떨 때 가장 많이 놓쳤는지 등을 소상히 기록해야 그런 부분들에서 다시 부딪혔을 때는 놓치지 않게 되며, 언행도 조금씩 변화가 온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대화(전화통화까지도)할 때, 화장실을 갈 때도 씻고, 음식을 먹으면서, 차를 마시고, 화낼 때, 즐거웠을 때, 그 중 어느 때 가장 많이 놓쳤는지 기록하다 보면 스스로 감시자가 되어 수행이 몸에 익고 망상도 줄어들게 된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서 정진을 할 때와 午後不食을 하고 수행을 하였을 때를 비교점검해 보고, 음식의 양을 많이 섭취했을 때와 소식 했을 때, 육식을 했을 때와 채식으로 하고 난 뒤의 변화, 또한 거칠고 딱딱한 음식과 부드러우며 달콤한 음식, 신 음식, 짠 음식, 매운 음식 등을 먹고 수행했을 때의 차이도 기록해 본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데 있어서 녹차와 커피를 마신 후와 기호음료나 술 등을 마신 후 등을 경험한 대로 옮겨 쓴다.
밥을 먹은 양이 많으면 위에서 소화시키는 시간이 많아서 수행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자꾸 졸음이 오게 되어 있다. 녹차나 발효차를 마시고 수행을 하면 정신이 안정되어 쉽게 삼매에 들고, 커피나 맵고 자극이 강한 것들을 섭취했을 때는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계속 감돌면서 흥분되고 산만하며, 불쾌한 기운이 계속 몸을 휘감음을 알 수 있다.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 속이 계속 부담이 가서 또한 집중이 잘 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에 자동으로 음식의 양과 종류를 알아서 먹게 된다. 이렇게 체크하다보면 스스로 戒를 지키게 되어 있다.
계절에 따라서 날씨의 영향을 받게 되는 변화도 정리해 두어야 한다. 눈․비가 오는 날, 흐린 날, 맑은 날, 또한 하루 중에서도 가장 집중이 잘되는 시간과 산만한 시간 등을 자세히 기록해 가면서 수행을 하면, 대충짐작으로 하는 수행보다 몇 배의 빠른 진보와 유익함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상의 부분들을 점검하는 것 이외에도 집중이 잘 안 될 때는 ‘어떤 마음으로 수행 했는가’를 일기에 기록해야 한다.
뭔가를 조급하게 성취를 바라는 탐욕이 있는 마음인지, 염려하고 불안걱정을 하는 마음이 있는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한 일들을 하였는지,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화내고 있는지 등을 점검하면서 정진을 하면, 그런 감정, 느낌 등의 원인이 알아지는 순간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세밀히 체크하고 점검해 보면 우리들이 하는 망상이 대부분 이상의 것들에서 오고 있음을 알아지게 된다.
그 밖에도 과거의 강한 기억들이 있다. 나쁜 감정은 자비와 용서로 용해시키고, 좋아했던 일들일지라도 깊이 살펴보면 그 안에 탐심이 미세하게나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 숙련이 될 때 까지는 산만한 곳이나 외출 등을 자제하고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어떤 대상과 부딪치더라도 그것이 안으로 해석되어지거나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훈련이 될 때까지는 주의하고 삼가지 않으면 퇴보하거나 스스로 좌절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반드시 기록하고 참회할 때 언행의 변화와 수행의 진보라는 유익함이 함께한다.
5. 맺는말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심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上․中․下의 근기에 따라 선교방편으로 근기에 맞는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환자에게 병의 증상과 체질에 따라 상이한 약을 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식의 방법을 쓰듯이 치료, 즉 解脫이라는 동일목적을 위해 다양한 진단, 처방, 처치를 사용하신 것이다. 특히 『능엄경』에서는 말세 중생들을 위하여 선정의 힘을 키우는 데는 만트라를 하는데 그 방법은 이근원통에 핵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계셨던 2,500년 전은 모든 환경이 성숙되어있었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세상이 너무도 어지럽고 복잡하며 오염된 환경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을 무시하고 마냥 앉아서 면벽하고 화두를 챙긴다든가, 그 외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아득하고 공허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부처님과 선지식들께서 강조하신 주력으로 부지런히 선정의 힘을 키워 득력이 된 후에는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과도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행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린다.
몇 번을 강조하여 禪定에 들어가야만 空을 체험하게 된다. 空性을 체험하지 않은 자에게는 五毒을 없애기란 매우 힘이 든다. 공성을 자꾸 체험하고 올바로 이해함으로서 無常, 苦, 無我를 느껴서 자비로 승화되어 언행이 바뀌고, 우리의 모든 삶은 저절로 변화가 오며, 무엇보다도 가장 큰 수확은 사물의 본성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말씀하신,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각자의 수행이 더욱 진보가 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 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키우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누가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는가. 다름 아닌 우리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들이다“
※참고문헌
楞嚴徑(1995), 동국역경원
석 인기(1972), 『大如來佛頂楞嚴呪』, 한국불교연구소
俱舍論(1988), 동국역경원
석설오 역(2002), 『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효림
달라이라마(2004), 『용서』, 오래된 미래
변순미(2003),『楞嚴心呪 悉曇梵字 한글표기에 관하여』, 불교학 연구학술논문집
이지수(2002), 『인도에 대하여』, 통나무
密敎辭典(1998), 홍법원
佛敎辭典(2002), 동국역경원
-수행에 관해 많이 나오는 질문 5가지-
Q1.: 다라니는 너무 강해서 약한 사람이 하면 귀신이 보이거나 휘둘려서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A: 다라니는 특히 약한 사람을 위한 수행방편이다. 위에서 다라니의 의미와 왜 해야 하는지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귀신에 관하여서는, 우리의 눈에 보인다고 인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흔히 수행을 하다가 귀신이나 잡신에게 흐림을 당하거나 유혹되거나 반하여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동굴 같은 곳은 귀신들이 머무르기 좋은 환경인데, 그곳에 들어가 수행하면 귀신들의 공간을 빼앗기게 되므로, 다른 사람이 내 집에 쳐들어오면 싸움을 하듯, 해침을 해 온다. 더욱이 힘센 귀신들이 살지 않는 곳을 택해야 한다.
이럴 때는 자비를 베풀어서 스스로 이겨내던가. 의식을 통해서 해결해야한다. 무서워하면 당하게 되어있다. 또한 경우는 번뇌가 강해서 귀신으로 나타난 것으로 착각한다.
남방의 유명한 선사로 만트라를 하면서 위빠싸나를 이룬 아짠선사의 경험담을 옮겨 보고자한다.
…아짠 문이 동굴에 들어가 수행을 하려하자, 그 마을 사람들이 그 동굴은 엄청난 거인의 귀신이 살고 있어서, 그 동굴에 가는 사람은 누구든 죽거나 기절하거나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서 나온다면서 말리지만, 아짠은 오히려 지혜를 계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동굴에 들어가 삼매를 닦는다.
어느 날, 눈앞에 귀가 10미터 정도나 되는 검은 피부의 거인이 나타났다. 그 거인은 몽둥이를 들고 아짠에게 다가와,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산을 지킬 권한을 부여받아 왔으며 감히 내게 도전해서 나를 이기려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이 동굴을 당장 떠나지 않으면 몽둥이로 박살내겠다”고 하였다.
아짠은 그 귀신과 텔레파시(정신 감응)로 교신을 하면서 “나는 아무에게도 도전하지 않았으며 누군가를 이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번뇌에 도전하여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 이다. 그대가 삼계(欲界, 色界, 無色界)를 자비의 힘으로 감화시키는 붓다의 제자인 나를 해치고자 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가 자랑하는 것처럼 정말로 능수능란한 힘을 소유했다면 세 영역(三界)의 모든 존재들을 지배하는 위대한 법인 까르마(karma, 業)와 다르마(법)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묻자 귀신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아짠은 계속해서 물었다.
“붓다는 남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욕망을 제거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다” 귀신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했다.
아짠은 그가 지닌 힘은 야만적이어서 자신에게 해가 될 뿐임을 지적하며 귀신을 훈계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힘은 자신을 태워버리는 불과 같은 결과만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그대자신을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정말 몸에 해로운 까르마인 것이다. 나는 올바른 길이 8정도를 따라가는 한 사람의 스님이다.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이건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망이다. 그대는 지금 자신을 해칠 어떤 사악한 생각도 하지 않는 나를 해치려고 한다. 일단 행동을 멈추고 자신이 행하려는 악업의 결과에 대항 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대가 나를 죽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죽게 될 테니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힘에 대한 집착이 현혹된 그대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다 죽게 마련이다.”
이렇게 아짠이 계속 훈계하자 귀신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패배를 몹시 두려워하며 수치스러워 했다. 결국 사신은 주문에 걸린 듯 아짠의 훈계가 끝날 즈음에 몽둥이를 내려놓고 굴복하였다.
그리고 스님의 강력한 자비의 빛에 오히려 타격을 받았다면서, 자신의 위협은 가장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어느새 신심 깊은 신자가 되어, 아짠에게 그곳에서 계속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은 아짠의 수호신으로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아짠 문』-불광출판사-)
Q2.: 평소에는 모르겠는데, 앉아서 수행을 하려고만 하면 망상이나 과거의 일들이 스크린이 지나가듯 계속 나타난다.
A: 마음속이 심한 산란심으로 괴로울 때는, 수행을 하기 전에 멋대로 방일하면서 살았던 결과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서, 그로 인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떠올려야 하며, 그 흐름을 멈추도록 바로 지금 정복해야 한다.
의사가 약으로 고칠 수 없는 환자에게는 피를 뽑고 부황을 뜨는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든가,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기, 용서를 하는 것만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삶을 항상 점검하며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신없이 헤매고 다닐 때도 망상이 무수히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겼다 없어지고 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수행을 하면 점점 깊은 단계에 들어, 거친 수위의 마음이 제거되면서,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俱舍論』에서는 우리의 지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의 최소 단위가, 한 찰나는 1/75초로 환산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 1초에 75회의 生滅이 있지만, 우리가 바깥의 강한 경계에 휘말려 그것을 감지하지 못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고요히 앉아서 수행하면 떠오르게 되어 있으므로, 좌선만 하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이때는 망상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주제의 수행을 열심히 觀하고 또 관하면서 수행하다보면, 이러한 것들은 사라지게 되어있다. 그래도 같은 망상이 계속되면 위의 각 처방을 사용하면서, 무엇보다도 구름이 벗겨지고 햇빛이 드러나듯 할 수 있는 길은 선정력을 기르는 길이 가장 지름길이다.
Q3.: 수행하는 조건이 어렵다.
A: 수행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기란 매우 어렵다. 대수롭지 않은 세속의 일에서도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수행을 할 때도 지금 이만큼의 조건을 갖추었을 때 슬기롭게 활용하지 못한 채 지나쳐버려서는 안된다. <
세속의 일이란 턱수염과 같다. 턱수염이 밀어내면 길어나고 또 밀어내도 길어나듯이 세속의 일도 끝이 없다. 언제 염라대왕 앞에 갈지 우리는 모른다. 나이가 많다고 먼저가고, 젊다고 나중에 가라는 순서는 없다. 예로부터 오는 순서(出生)는 있어도 가는 순서(죽음)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닦지 않으면 평생 차일피일 이런저런 조건만 따지다가 어느 날 염라대왕의 문을 노크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Q4.: 얼마나해야 깨 칠 수 있는가?
A: 수행을 하고자 하는 환희로운 마음으로 수행에 입문한 때로부터 완전하게 깨달을 때까지 항상 정진에 의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노력은 하지 않고 앞서 가는 사람만 쳐다보면서 조급증만 내는 것은, 욕심을 하나 더 보태는 격이 되고, 무리하게 하다가 상기되어 건강을 해쳐서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공부들이 정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꾸준한 자기점검과 노력만이 진보가 있을 뿐이다.
하루 일과는 좌선할 때와 쉴 때 두 가지로 나뉘며, 身口意로 인한 모든 행이 이 두 가지 안에서 이뤄지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의미 있게 하면 하루 일과도 의미 있게 보내게 된다. 그렇게 한달, 일년 등을 꾸준하게 보내면 일생을 의미 있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좌선 시 열심히 정진을 했더라도 쉴 때에 산란하게 보내면 다시 정진하려 할 때 무척 해롭게 된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을 때에 자신의 입을 살피고, 혼자 있을 때는 마음을 살펴 단속하면서 자신의 수행의 주제를 놓치지 않도록 늘 점검에 점검을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
Q5.: 혼침이나 도거가 올 때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A: 부처님께서 비파줄을 너무 조이거나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나지 않으니, 적당하게 조여야 제대로 소리가 난다고 하셨던 것처럼, 미세한 혼침이 생겼을 때 마음을 너무 조이면 도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적당하게 조여야 한다. 그러다가 혼침이 생기겠다 싶은 마음이 들면 조금 더 조여 준다.
예를 들어 만트라를 하다가 혼침이 오면 소리를 조금 더 크게 하다가 혼침이 사라지면 다시 본래의 톤으로 한다든가, 더욱 빠르게 하거나 조금 느리게 하는 등의 리듬으로 하다 보면 혼침이 사라지고 다시 밝고 명료해 진다.
그래도 없어지지 않으면 호흡을 한다든지, 찬물로 세수 등을 하거나 시원한 장소 등으로 옮긴다
불자라 함은, 먼저 윤회세계가 고통 그 자체임을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이 오직 불법승 삼보에만 있다는 믿음, 이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강한 믿음이 생길 때, 완벽한 수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며, 올바른 스승을 찾는 방법과 수행하기에 가장 완벽한 몸을 받는 것에 대한 사유, 또 무상과 인과 등을 사유하고, 그런 다음 단계별로 수행하여야 참된 진전이 있다.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발심수행장·수행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도]양극단을 넘어서는 <지혜의 길> (0) | 2008.07.20 |
---|---|
[계율]계율 제대로 지키면 나도 이웃도 편해져 - 청화스님 (0) | 2008.07.20 |
[수행법] 너무 조이거나 느슨하게 하지 말라 (0) | 2008.07.20 |
[수행법]사념처-네가지 명상의 주제들 (0) | 2008.07.20 |
[수행법] 절은 머리와 코가 땅에 닿게 (0) | 2008.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