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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대의와 수행문
원효성사의 사상체계는 대개 [기신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2권은 예로부터 현수(賢首),
혜원(慧遠)의 주석과 함께 [기신론] 3대소(三大疏)의 하나로
[해동소(海東疏)]라고 부른다.
전체를 1.종체를 드러냄(標宗體) 2.제명을 해석함(釋題名)
3.본문을 해석함(依文顯義) 등의 3문으로 나누어 해설하였다.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1권에는 일심이문(一心二門) 삼대 (體相用) 등 이론적인
핵심 부문이 실려 있는데 원효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원효가 [기신론소]에서 밝힌 수행의 요체와 일심에 대하여
대강 살펴보면 그의 독창적인 일심정토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신론]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을 제거하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원효 소(해설)]
이것은 [기신론]을 지은 대의를 서술한 것이다.
논을 지은 대의는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을 밝히고,
상홍불도(上弘佛道:위로 불도를 넓힘)을 나타는 것이다.
중생이 오랫동안 생사의 바다에 빠져 열반의
언덕에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단지 의혹(疑惑)과 삿된 집착(邪執) 때문이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요체는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의혹을 논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대승을 구하는 자가 의혹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법(法)을 의심하는 것으로, 발심에 장애가 된다.
둘째는 교문(敎門)을 의심하는 것으로 수행에 장애가 된다.
"법(法)을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말하자면 이러한 의혹을 짓는 것이다.
대승의 법체(法體)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만일 하나라면 곧 다른 법이 없을 것이며,
다른 법이 없으므로 모든 중생도 없을 것이니,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큰 서원을 일으키겠는가?
만일 법이 여럿이라면 곧 일체(一體)가 아니며,
일체가 아니므로 대상세계와 내가 각기 다를 것인데,
어떻게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혹 때문에 능히 발심할 수 없는 것이다.
"교문(敎門)을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여래가 세운
교문이 많으니 어떤 문에 의지하여야 처음 수행을 일으킬 것인가?
만약 모두 다 의지해야 한다면 단박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며,
만약 한 두 가지 문에 의지해야 한다면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심으로 말미암아 능히 수행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두 가지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심법(一心法)을 세우고, 두 문(二門)을 열었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첫 번째의 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승의 법에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 밖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다.
다만 무명(無明)이 자신의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키고 육도(六道)에 유전하는 것이다.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짓기 때문에 널리 제도하려는
원을 일으킬 수 있다.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를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 큰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두 가지 문(二門)을 연 것은 두 번째의 교문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교문이 비록 많이 있지만 처음 수행에 들어가는 데는
두 문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다.
진여문(眞如門)에 의지하여 지행(止行)을 닦고,
생멸문(生滅門)에 의지하여 관행(觀行)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와 관을 겸하여 운용하면 만행이 여기에 다 갖추어 진다.
이 두 문에 들어가면 모든 문은 다 통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 능히 수행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한다"는 것에 두 가지 집착이 있다.
말하자면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으로써 인집(人執)과
대상세계에 대한 집착으로써 법집(法執)이다.
하화중생에 대해서는 여기서 마친다.
상홍불도(上弘佛道)는 저 두변(二邊)의 의심을 제거하여
결정된 믿음(決定之信)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대승은 오직 일심(一心) 뿐이라는 것을 믿고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에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앞의 두 가지 집착으로 인한 분별을 버리어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고, 여래의 집에 태어나서
부처의 지위를 잇기 때문에 불종자가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논에서 말하기를 "불법의 큰 바다에는 믿음으로써
능히 들어가고, 지혜로써 능히 제도한다
((佛法大海,信爲能入,智慧能度)"라고 한 것과 같다.
[기신론]
사집(邪執)을 상대하여 다스린다는 것은 일체의
잘못된 집착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하는 것이니,
만약 나(我)를 멀리 여의면 곧 사집이 없을 것이다.
이 아견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원효 소(해설)]
인아견은 총상(總相)을 주재(主宰=실아)하는 것이 있다고
헤아려 생각하는 것으로, 인아집(人我執=인아견)이라고도 한다.
법아견은 일체법이 각기 체성(體性=실체)이 있다고
헤아려 생각하기 때문에 법집(法執)이라 한다.
법집은 곧 이승(二乘)이 일으키는 것이며,
인아집은 오직 불법을 배우는 자 가운데서
처음 대승을 배우는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다.
[기신론]
수다라에서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설한 것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처음이 있다 하고,
처음을 보기 때문에 또한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리겠는가?
여래장은 처음(前際:시초)이 없기 때문에
무명(無明)의 상(相)도 시작함이 없으니,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면
곧 이것은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다.
또 여래장은 끝(後際:마지막)이 없으니,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은 그것과 상응하여 곧 끝이 없기 때문이다.
[원효 소(해설)]
다섯 번째 말한 것은,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면 곧 이것은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다"라고 한 것은
인왕경(仁王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위에서부터의 다섯 가지 집착은 모두 법신(法身)
여래장(如來藏) 등 총상(總相)의 주(主=주재자)에 의지하여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통틀어 인집(人執)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정목스님]
[대승기신론]은 마명(馬鳴:불멸후600년경:중인도 마갈타국)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는데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논서"이다.
원효는 [기신론소]를 지어 그 뜻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하고,
자신의 일심사상을 역설하였다.
여기서 부처님이 불법을 펴보이신 큰 뜻은
"하화중생 상홍불도(下化衆生 上弘佛道 )"라 하였다.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下化衆生)는 것은,
첫째 어떤 법을 믿을 것인가?
어떤 수행문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의심을 해소하고,
둘째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대승의 유일한 법은 일심법(一心法)이며,
수행문은 지관(止觀)을 함께 닦는 것이다.
지관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수행하는가?
지(止)란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
사마타의 뜻을 수순하기 때문이요, 관(觀)이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이니,
비파사나의 뜻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가지 뜻으로 점점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아니하여
쌍으로 눈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한다는 것은 일심법을 믿고 수행문에
들어가 중생으로 하여금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알게 하는 것이다.
위로 불도를 넓힌다(上弘佛道)는 것은 바른 믿음을 일으켜(發心)
불종자를 끊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심을 믿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일심을 증득해야 하는데,
일심을 증득함으로써 동체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을 이어받아 원효의 후학들은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이라고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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