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알아차림이 없는 곳에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 자리하게 되는 것

2008. 7. 22. 20: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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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이 없는 곳에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 자리하게 되는 것

 

  어제, 생겨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법들 즉, 생겨나는 과정들, 물질과 정신 현상들 위에 매순간, 그것들을 주시하는 순간에 지금처럼 '싸띠빠타나'의 방법으로 주시하여 수행하는 것이 많아지면, '사띠, 사마디' 즉, 알아차림, 집중의 힘이 강해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는 모습, 물의 흐름처럼, 물의 흐름이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의 연결들 위에 헌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은 연결되어지는 무상한, 항상 하지 않는 특성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나타나서는 지금 당장 사라지고, 지금 바로 생성 돼서 지금 바로 소멸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항상 하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면, 나타나서 사라지며 고통스러운 모습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나타나서 사라지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때, 이 것들이 각각의 특성대로 되어 질 뿐, 통제 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라는 무아라는 특성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원인과 결과의 연결들인, 물질과 정신 현상들 위에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특성대로 되어진다고 하는, 이 삼법인을 아는 것을 '위빠싸나' 지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위빠싸나' 지혜로, 매 순간 대상을 바르게 알기 때문에, 이렇게 알 수 있을 때, 모름, 혹은 잘못 앎이라고 하는 '아윗짜', 무명은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대상을 알기 때문에, 몰랐을 때 생길 수 있는 갈애와 집착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딴하'라고 하는 갈애, 더 강한 형태의 갈애인, 집착도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알기 때문에, 자아라든가, 자아가 있다라고 하는 등등도 생겨 날 수 없게됩니다.     
 
  이렇게 매 순간 대상을 바르게 주시 할 때마다, '아윗짜, 딴하, 우빠다나'라고 하는, 무명과 갈애와 강한 갈애라고 하는 집착, 세 가지 번뇌가 언제나 잘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번뇌가 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인, 물질과 정신 현상들 위에, 이렇게 다양한 상황이라고 하는 세 가지의 특성들 삼법인들을, 물질과 정신의 허물(빨리어로는 '아디노와'라고 부릅니다)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허물을 볼 수 없게되면, 원인과 결과의 연결인, 물질과 정신 현상들을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기게됩니다. 이렇게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항상 하다고 여기게 되어도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기게 되어서 자만, 교만이라는 특성이 들어오게 되며, 좋다라고 여겨도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겨서 '딴하'라고 하는 갈애가 생겨나게 되며, 원인과 결과의 연결인, 물질과 정신 현상을 보지 못해서 이 것들이   각각의 특성대로 되어질 뿐, 통제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알지 못해도 이 것들을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기며, 자아라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자만이나 갈애나 잘못된 견해 중, 어떠한 것에서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기게 될 때,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각각의 특성대로 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각각의 특성대로 되어지는 세 가지의 특성을 볼 때, 허물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허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기게됩니다.

 

 이렇게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법들을 '우빠다니아 담마' 즉, 집착되어지는 법들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으로 집착되어지냐고 묻는다면, '딴하'라고 하는 갈애와 '디티'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들로 집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우빠다니아 담마'라고 하는 집착되는 법들은 육문에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닿고, 알고, 들고, 가고, 내리고, 구부리고, 펴고 이러한 등등의 원인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모든 물질과 정신 현상들 이러한 법들을 '우빠다니아 담마' 즉, 집착되어지는 법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것들을 주시하지 못해서, 이러한 것들의 특성들을 알지 못하게 되면 이러한 것들이 항상 하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고, 이 것들이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좋은 것으로서 여기기 때문에 갈애로서 더욱 집착하게됩니다. 현재의 행복 위에도, 현재의 좋은 것들 위에도 집착하고, 이 것보다 더 좋고, 더 행복하기 위해서   미래의 행복이나, 이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도 갈애로서 집착하게됩니다. 또한 내가 듣고, 내가 보고, 내가 냄새 맡고 이러한 식으로 내가 항상 존재하며 이렇게 나라고하는 개체가 항상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잘못 여겨서 나라는 것 위에도 집착하게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딴하,디티' 라고 하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로서 집착하게되는, 집착당하게 되는 법들을 '우빠다니아 담마'라고 부릅니다. 보통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우빠다니아 담마'라는 집착할만한 법들 즉, 집착 당하는 법들에게  갈애와  잘못된 견해로서 언제나 집착 당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왜 즐거운 것으로, 기꺼운 것으로 여기게 되냐하면, 나타나는 즉시, 생겨나는 즉시 주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앎이라고 하는 것도 없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띠'가 없기 때문에, 즉 알아차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서 생겨나는 물질과 정신 현상이라고 하는 정말 바른 법, 실제 하는 법을 바른대로 알지 못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물질과 정신 현상들을 즐겁고 기꺼운 것으로 여기게 되고,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냄새맡기 좋고 이러한 식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맡기에 좋고 이렇게 즐거운 것으로 여기면서 내가 보고, 내가 듣고 하는 자아의 개념도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갈애라고 하는 것으로, 집착 할 뿐 만 아니라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견해로도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사띠', 알아차림이 없어서, 바른 것을 보지 못해서 대상 위에 집착하게 되었을 때, 원래보다도 더욱 더, 점점 즐거운 것으로 여기고 견해도, 나라고하는 잘못된 견해로 앎으로서, 점점 그릇되게, 어긋나게 되어집니다. 그러면 이렇게 점점 즐거운 것으로 여기고, 점점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사띠', 알아차림이 없어서 앎이라고 하는 지혜가 없는 泳汰都求? 이러한 사람에게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앎이라고 하는 두 가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것의 의미는 보는 즉시, 듣는 즉시 이러한 등등으로 대상이 생겨나는 즉시, 지금 하고 있는 '사띠빠타나'의 방법으로 주시하지 않기 때문에 이 대상 위에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사띠'가 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상 위에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사띠'가 붙을 수 없고, 대상 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대상 위에 확고한, 확고히 머무를 수 있는 종류의  '사띠'가 없기 때문에  '사띠'가 잘리는 것과 같고 이럴 때, 지혜라고 하는 앎이라고 하는 것도 생겨날 수없이 결여됩니다. 이렇게 그 자리에서 결여되게 되었을 때, 그 자리, 즉, 대상 위에는 어둠이 내리게 됩니다. 여기서 어둠은 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 혹은 틀리게 아는 것이라고 하는 '아윗짜' 무명입니다.

 

  이 '아윗짜'라고 하는 무명은, 바른 대로 모르는  것 뿐 만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물의 흐름처럼 계속해서 흐르는 것처럼 연결되는 것을 모르는 것 뿐 만이 아닙니다. 혹은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각각의 특성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 뿐 만이 아닙니다. 반대로 알기도 합니다. 백내장이 낀 눈이 바른 것을 바른 것으로 알지 못하는 것도 있고, 가끔은 바른 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있고,  가끔은 보긴 하는 데, 틀리게 왜곡해서 잘못 보는 것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윗짜'라고 하는 무명은      알지 못하는 것도 있고 틀리게 아는 것도 있습니다. 이 두가지 종류의 '아윗짜', 무명을 첫 번째 '아빠띠빠띠 아위짜', 두 번째 '위차빠띠빠띠 아위짜'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종류의 '아빠띠빠띠 아위짜'는 바르게 모르는 것 즉, 일반적으로 모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짧게 이야기하면 모름입니다. 두 번째 '위차빠띠빠띠 아위짜'라는 것은 틀리게 아는 것 왜곡해서 아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대상 위에 지혜, 앎이 없음으로 해서 이 알지 못함, 모름과 잘못되게 앎이 라고 하는 이 두 종류의 무명, '아윗짜'가 두 겹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없으면 즉, 사띠가 없게 되어지면, 앎이라고 하는 지혜가 빈틈을 가지게되고, 그 공간에서 비어지게되고, 이 비어진 곳에 무명의 어둠이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무명의 어둠이 내림으로 인해서, 어둠이 모두 뒤덮은 것과 같이 되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자기 안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법들이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각각의 특성대로 되어진다고 불리어지는 혐오스러울만한 허물을 가지고 있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허물을 가지고 있다라고 사실대로 바르게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매 순간 주시하지 못함으로서, 그 대상이 있는 동안에 보지 못함으로서  이러한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허물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잘못되게 왜곡되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무아라고 하는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전이야기 한, 첫 번째 종류의 무명인 '아빠띠빠띠 아위짜'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허물을 오히려 반대로 좋은 것처럼 여겨서, 즐거운 것으로 여겨서 이 것이 고통이 아니고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 이 것이 두 번째 종류의 무명인 '위차빠띠빠띠 아위짜'입니다. 그래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 할 뿐 만 아니라, 그 것을 반대로 좋은 것으로 왜곡시켜서 여기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나타나는 순간에 주시하지 못하면, 그 순간에 알아차림이 붙지 못하기 때문에  앎이 라고 하는 것도 생기지 않게 됩니다.  앎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아윗짜', 무명이라고 불리는 '모하', 어리석음이 저절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무명, 어리석음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앎이 없는 순간에 저절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분에 60초라고 하니, 일분 동안이라고 하면, 1초에 한 번씩만 계산해도 일분이면 60번의 어리석음, 무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알지 못한다고 하는 종류의 무명과 잘못되게 안다는 종류의 무명이 두 가지 있기 때문에, 두 종류로 두 배로 곱하게 되면 120개의 번뇌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 분이 되면 600번일 것이고 한 시간이 되면 7200번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모하 빠따라'라고 부릅니다. 정말 바름 법 위에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 혹은 정말 바른 법 위에 알지 못하거나, 잘못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것이 마치 눈 위에 백내장과 같은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하 빠따라'라고 하는 바른 법 위에 덮은 것과 같은 것, 바른 법 위에 백내장과 같은 것을 제거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백내장이 생긴 환자를 수술을 통해서, 치료를 통해서 제거하는 안과 의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부처님께서는 이 안과 의사들과 같은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술 등을 통해서 치료하는 것을 '담마',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눈에 백내장이 제거 된 분을 '상가' 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제대로 따름으로서 바른 법을 본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은 마치 눈에 백내장이 제거되어서 사물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하나의 도와 과를 얻을 때까지 수행했다면 사 악도와 관련된 백내장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 악도에 갈 만큼 이러한 큰 번뇌와 관련된 어리석음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 악도에 가게 할 만큼 큰 불분명함, 어리석음 등은 생기지 않고,  사 악도에 가게 할 정도로 마음의 눈을 덮는 일도 생기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까지 마음의 눈을 덮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할 때에는 최소한 사 악도에 갈 만한 무명, 어리석음으로 덮는 것을 제거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행해야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좋은 것으로 기꺼워하고 즐거워 할만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아윗짜', 무명이 생김으로 인해서  이렇게 즐거운 것으로 여길만한 대상 위에 집착하는 종류의 갈애, '딴하'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보고 싶고, 좋은 것을 듣고 싶고, 좋은 것을 냄새 맡고 싶고, 좋은 것을 닿고 싶고 하는 등등의 이러한 것들을 바라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즐겁고 좋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즉, 바른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 위에 좋아하고 갈망하는 이러한 종류의 갈애가 점점 늘어나고,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두빨라 딴하'라고 하는 약한 종류의 갈애로부터 '발라와 딴하'라고 하는 강한 종류의 갈애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때가 되면 대상을 꽉 쥐고 놓지 않게 됩니다. 이 것이 가장 좋은 것인 것처럼 대상 위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 뿐 아니라, 내가 보고, 내가 즐기고, 내가 느끼는 등등으로 나라고 여기는, 자아라고 여기는 잘못된 견해도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나라는, 자아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하는 '아윗짜'라고 번뇌가 생김으로 인해서  '딴하'라고 하는 번뇌가 생겨나게 되고 갈애가 생겨나게 되고 이 갈애의 형태인 '우빠다나', 집착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아윗짜', '딴하', '우빠다나'라고 하는 것 즉,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와따'중에 하나입니다. '와따'라고 하는 것은 '아윗짜', '딴하','우빠다나'라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돌면서 생겨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비교 할 수 있냐하면, 선풍기를 켰을 때, 선풍기의 팬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선풍기의 스위치도 1,2,3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약하고, 중간 정도이고, 빠른 것들이 있을 수 있는 데, '아윗짜', '딴하', '우빠다나'라고 하는 즉,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라고 라고 하는 것들의 순환, 끊임없이 도는 것은 선풍기의 돔보다 훨씬 더 빠르게 생겨납니다.  우리가 대략적으로 일 초에 하나 씩만 생겨난다고 가정해도 일분에 이 세 가지가 생겨난다고 하면 180가지가 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 설명했던 '아윗짜'라고 하는 무명도 알지 못함과 잘못되게 앎이라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에 이 것만 해도 120가지가 넘습니다. 그래서 100가지를 훨씬 넘는 세 가지 종류의 번뇌가 일분 안에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순환을 '와따'라고 부릅니다.

 

  이 정도로 계속해서 주시하지 못함으로서, 매 순간 순간에 이러한 순환이 계속되는 정도의 단계에 도달하게되면, 원래 마음의 길이 곧지 못한 사람들 즉, '요니쏘 마나?嚼ザ?'라고 하는 마음을 적절하게 두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이 사람들이 "내 마음에 절대로 불 선업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 라고 하는 확고한 결심이 없는 한은 마음의 길이 굽어지는 것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을 '아요니쏘'라고 부릅니다.  적절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아요니쏘'가 생겨나게 되면, '아윗짜'라고 하는, 다른 삶의 물건을 부당하게 소유하고자하는 탐욕과 같은 것이라든가, 혹은 다른 이를 죽이거나 괴롭히고 싶은 것 혹은, 원인과 결과를 믿지 않고, 업과 업의 결과를 믿지 않고, 물질과 정신 현상들 위에 자아라고 보는 것 등의 잘못된 견해들이 생겨 날 수 있습니다.

 

  이 것들이 생기면서, 조금 생기기도하고, 중간 정도로 생기기도 하고, 아주 많이 생기면서, 아주 완전하게 매 순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생기게 되면, 거짓말을 하고, 거친 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이익이 없는 말을 하는 등등의 입의 행위와 관련된 잘못된 행위들도 생겨 날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때로는 훔치거나, 죽이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하는 몸과 관련된 잘못된 행위들도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매 순간에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라고 하는 것들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길이 곧지 않은, 마음의 길이 어긋나게 되는 것들이 생기게 되고 이로 인해서 마음에 불 선업 적인 것들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것들이 또한 몸과 입의 행위로까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길이, 마음의 둠이 곧고, 또한 마음을 바르게, 적절하게 쓰는 것이 있고, 또한 마음에 언제나 생기게 하겠다는 라는 준비도 있다면, 때로는 보시라고 하는 선업을 행할 것이며, 때로는 계율을 지킨다라고 하는 선업들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와 계율을 지킨다고 하는 선업들이 생겨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시 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혹은, 지금 자기 삶의 번영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다음 생이 좋아지기를 위해서 이러한 식의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삶의 번영을 위해서  보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실라'라고 하는 계율도, 자기 자신이나 지금이나 다음 생애들의 번영을 위해서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선업을 '와따까리 꾸살라'라고 부릅니다. 이 것은 '와따'라고 하는 순환 즉, 윤회라고 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돌게 만드는 종류의 선업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선업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선업을 짓지만, 이 때의 마음의 길이 바르지 못하면, 이 것과 관련해서건 그렇지 않건 성냄이 생길 수도 있고, 혹은 어리석음이 생겨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사띠빠타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와따까리 꾸살라'라고 불립니다. 이  '사띠빠타나' 수행을 하는 이 선업은  삶의 흐름, 삶의 순환이라고 하는 윤회가  끊기게 해주는 종류의 선업입니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선업은, 이로 인해서 성냄이나 어리석음 그리고 탐욕 같은 것들이 생기지 않게 해줍니다.

 

  그래서 마음 씀이 어긋나고 왜곡 돼서 불 선업 적인 행위를 하든, 혹은 마음 씀을 적절히 둘 수 있어서 선업을 행하건 간에 이러한 행위들은 조건 지워진 '상카라'라고 하는 법들이기 때문에 나타나서는 사라지고, 생성돼서는 소멸되는 것 들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완전히 끊기면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후에 좋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주기 위해서, 그 것을 행한 사람들 안에 좋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주기 위한 능력인, 자신들의 씨를 남깁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고 하고, 이 안에 열매가 떨어져서 사라졌다고 해서 이 것이 끝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나무가 나고, 또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이 열매의 씨앗 안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이 씨앗을 심고, 물주고, 돌봐 보십시오. 싹이 트고, 나무가 나고, 나중에는 열매를 맺는 나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 것을 보았을 때,  이 씨앗 안에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들은 사라졌지만 , 그 것들 안에 좋고, 좋지 않은 결과들을 줄 수 있는, 그러한 능력들인 씨앗과 같은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씨앗의 성분과 같은, 이러한 것들이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업을 지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고,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결과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업으로 인해 다음 생에 좋거나, 좋지 않은 생으로 태어나게 되고, 또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전의 순간들에도  좋고, 좋지 않은 업들이 계속해서 결과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아윗짜', '딴하', '우빠다나'라고 하는 무명과 갈애와 집착으로 인해서 좋고, 좋지 않은 업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업들이 생김으로 인해서, 다음 생이 생겨나고 그 생의 연결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음 생이 생겨나게 되면, 또한 그 때  따라오게 된 무명과 갈애와 집착들이 있을 것이며, 이러한 무명과 갈애와 집착들에 의해서 또 다시 업들이 생겨나고, 또 다시 업들이 생겨남으로 인해서, 또 다시 다음 생이 생겨 날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이 순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결과가 생기는 것을 '자띠'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삶이라고 하는 '버와 자띠'가 생겨나게 되면 늙고, 병들고, 죽게됩니다. 늙고 싶지 않지만, 늙게 되고, 병들고 싶지 않지만 병들게 되고, 죽고 싶지 않지만 죽게 되고, 또한 슬픔과 걱정과 통곡과 근심, 걱정이라든가, 몸과 마음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따라오게 됩니다. 이렇게 삶이 생겨나게 되는 것의 결과로서, 이러한 것들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생들에게 자신들이 바라지 않지만 늙고, 병들고, 죽고 이러한 끝없는 고통이 생겨나는 것의 이유를 찾아보면, 삶이라는 것이, 생이라는 것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이라는 것이, 생이라는 것이 왜 생겨났는가 하면 그 것의 이유를 찾으면, 그 것은 선업과 불 선업들로 인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선업과 불 선업들은 왜 생겨났는가 하는 그 것의 이유를 찾는다면, 그 것은  '아윗짜',무명과  '딴하',갈애와 '우빠다나',집착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에 번뇌, 세 가지 요소들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서 연결되어지는 끊임없는 순환을 빨리어로 '와따'라고 부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생겨나는 순환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첫 번째가 '낄레사 와따' 번뇌라는 순환, 두 번째가 '깜마 와따' 업이라는 순환, 세 번째가 '위빠까 와따' 결과라는 순환입니다. 이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 것의 의미는 원인과 결과의 법들로 연결되어서, 마치 선풍기가 도는 것처럼 계속해서 순환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 두 가지가 연결되어서 생기는 것이 '와따' 순환입니다.

  그래서 '낄레사 와따' 번뇌라는 순환, '깜마 와따' 업이라는 순환, '위빠까 와따' 결과라는 순환, 순환에는 이 세 종류가 있습니다. 또한 이 세 종류 중에서 '아윗짜'라고 하는 무명, '딴하'라고 하는 갈애, '우빠다나'라고 하는 집착이 '낄레사 와따' 즉, 번뇌라는 순환 안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윗짜' 무명, '딴하' 갈애, '우빠다나' 집착을 '낄레사 와따' 번뇌의 순환이라고 부른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의지해서 생기는 것, 행하게 되는 것이 '깜마 와따' 업이라는 순환입니다. 이 세 가지 번뇌의 순환인 무명과 갈애와 집착을 의지해서 혹은, 이 것들을 원인으로 함으로서 좋은 생이나 나쁜 생이 생겨나게 되는 좋고, 좋지 않은 업을 행하는 것이 것들의 순환이 '깜마 와따'입니다.

 

  또한 업의 씨앗으로 인해서, 이후에 오온이 생기게되는 것이 '위빠까 와따' 결과라고 하는 순환입니다. 그래서 좋고 좋지 않은 업들의 씨앗으로 인해서, 이후에 업의 씨앗의 영양으로 인해서, 업의 씨앗의 능력으로 인해서, 무더기라고 하는 오온이 생겨나게 되는 것, 좋고, 좋지 않은 다섯 무더기가 생겨나는 것이 '위빠까 와따' 결과라고 하는 순환입니다.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와 중생을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무 전체에 가지나 잎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나무 전체에 수액이 퍼져 있습니다. 이렇게 촉촉한 수액이 흩어져 있는 것, 나무 전체에 퍼져있는 것을 '낄레사 와따' 번뇌라고 하는 순환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액이 없는 바짝 마른 나무는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무 전체에 수액이 퍼져 있어야만 이러한 수액을 원인으로 해서 열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열매 혹은, 열매 안의 씨라고 하는 성분이, 수액을 원인으로 해서 생기는 열매의 씨와 같은 것이, 번뇌와 같은 수액을 원인으로 해서 생겨나는 업, 행위와 같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종류의 나무에서 그 씨앗으로부터 다음의 새로운 나무가 나게 되는 것이,
업이라고 하는 원인으로 인해서 다음 생이 생겨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 전체에 퍼진 수액이 생기게 해주고, 이 것이 풍성해지도록, 증가 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흙이라든가, 산소나, 해나 물 등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흙이나, 산소나, 해나 물 등이 없게 되면 수액은 생길 수 없습니다.

이렇게 수액이 생기도록 흙이나, 산소나, 해나 물 등이 보조해 주는 것처럼, 번뇌라고 하는 젖은 요소가 풍성해지고, 생겨 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의 감각적인 쾌락과 천신 들의 감각적인 쾌락입니다. 사실 이러한 인간의 감각적인 쾌락과 같은 것들은 말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감각적인 쾌락과 천신 들의 감각적인 쾌락의 허물들을 보지 못해서 무명이 생기고, 허물을 보지 못함으로서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애가 생겨나며, 또한 갈애 들이 점점 강해지게 되어서, 이 것들 위에 기꺼워하며 집착하게 되고 혹은, 자아라고 잘못 여기면서 집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착에는 기꺼워하고 집착하는 것과 잘못 여기며 집착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허물을 보지 못함이라고 하는,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 요소인, 나무의 수액과 같은 번뇌들을, 인간과 천신의 쾌락이라고 하는 이러한 대상들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무를 죽이고자 할 때, 혹은 씨를 말리고자 할 때 나무를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것은 밑 둥 근처를 돌면서 껍질을 벗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껍질을 벗기게 되면 수액을 흡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나무가 죽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도, 지금 현재 나타나는 원인과 결과의 물질과 정신 현상들을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서 수액과 같은 무명과 갈애와 집착들이 생길 기회가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길 기회가 없게 만들음으로서 이런 번뇌라는 촉촉이 젖은 성분이 마르고 다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지금 생겨나는 대상을 한번 주시하면 한번만큼 이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라고 하는 번뇌의 수액이 생길 기회가 없게 함으로서 말린 것이 되며 두 번 주시하면 두 번만큼 이 것들을 말린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를 죽이는 방법 즉, 수액을 흡수 할 수 없도록 해서 씨를 만들 수 있듯이, 수행자들은 매 순간에 올바른 주시를 통해서 이 번뇌의 수액과 같은 이러한 성분들이 마르도록 생길 기회가 없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뇌라는 젖은 성분이 어디에서 시작돼서 생깁니까 라고 묻는다면 육문에서 시작돼서 생기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닿고, 알고 이러한 것들 안에서 시작 돼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문에는 받아들이는 요소와 부딪치는 요소로 인해서 점화되는 요소, 열리는 요소가 생길 뿐입니다. 여기서 받아들이는 요소는 눈이나, 귀나, 코 이러한 것과 같은 물질이며, 부딪치는 요소는 장면이나, 소리나, 냄새 이러한 종류의 물질입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열리는, 점화되는 요소는 이 대상을 알고, 느끼고, 접촉하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 요소입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들로 이루어진 혹은 받아들이고, 부딪치고, 열리는 이러한 성분으로 이루어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순간에 주시하지 못하여 물질과 정신임을 모르고 원인과 결과임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물질과 정신이라고 하는 원인과 결과들의 연결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이것이 항상 하지 못함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계속해서 사라져 가면서 고통스러운 것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생겨나서 사라지고 고통스러울 뿐이며 각각의 특성대로 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허물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띠빠타나' 수행으로서 주시할 수 있을 때에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도 보게 될 것이며,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봄으로서, 헌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연결되고, 또 헌 것이 사라져서 새 것이 연결되고 이렇게 계속적으로 연결되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헌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연결되는 것을 봄으로서 그 것들이 항상 하지 않음을 보게되고, 이 것들이 항상 하지 않음으로서 고통스러움을 보며, 항상 하지 않아 고통스러움을 보게 됨으로서 각각의 특성대로 되어 질 뿐 통제할 수 없다라는 것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의 연결 위에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무아라는 이러한 상황으로서 보게 되면 이 때 잘못되게 안다라고 하는 '아위짜' 무명은 생겨날 기회를 잃습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 '아위짜'라는 무명이 잘린 것과 같습니다. 잘못 아는 무명이 없기 때문에, 그 위에 잘못되게 갈망하는 갈애,'딴하'도 생길 수 없어서 잘린 것이 됩니다. 이렇게 잘못 앎이 없고, 갈애가 없기 때문에 그 것 위에 강하게 집착하는 '우빠다나'도 없어서 잘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위빠싸나' 수행자가 한번 주시해서 그 순간의 대상을 바르게 안다면 이 한번만큼 '아위짜''딴하''우빠다나'라는 세 가지 번뇌가 생길 기회를 잃게 되어서 이것들이 잘리는 것이 됩니다. 이 것이 '위빠싸나' 수행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의 '와따'라고 하는 순환들 중에서, 세 가지의 '와따'라고 하는 순환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모습과 또한 세 가지의 '와따'라고 하는 순환들이 끊겨지는 모습에서 '낄레사 와따' 즉, 번뇌라는 순환이 핵심이 됩니다. 이 번뇌라는 순환이 끊기게 되면 다른 두 가지도 연결될 수 없으며, 이 번뇌라고 하는 순환이 끊기지 않을 때 다른 두 가지는 계속해서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가 끊기게 되었을 때, 업은 연결되지 않고 그래서 결과도 끊기게 된다라는 말이 있고, 또한 번뇌가 끊기지 않으면, 업도 연결되기 때문에 결과도 계속해서 생겨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세 가지의 순환들 중에서 '낄레사 와따'라고 하는, 번뇌라는 순환이 끊길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와따' 순환들의 연결과 끊김도 팔정도 위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팔정도라는  즉, '사띠빠타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와따', 세 가지 순환은 언제나 연결될 것입니다. 반면에 '사띠빠타나' 수행을 수행하게 되면, 그 안에 팔정도가 계속해서 포함되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와따', 세 가지 순환은 계속해서 끊기게 될 것입니다.

 

  '사띠빠타나' 수행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실라 막강가' 계율이라고 하는 팔정도의 세 가지 요소도 없고, '사마디 막강가'라고 하는 팔정도 중의 세 가지 요소도 없으며, "빤냐 막강가'라고 하는 팔정도 중의 두 가지 요소도 없습니다. 이러한 계, 정, 혜, 삼학이라고 하는 8가지의 법들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계율이라고 하는 팔정도의 법 세 가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몸이나 입으로 범하게 되는 종류의 가장 거친 번뇌도 제거 할 수 없고, 또한 선정, 집중이라고 하는 팔정도와 관계된 세 가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 정도의 번뇌인 마음에서 생겨나는 거친 번뇌들도 제거 할 수 업습니다. 또한 빤냐, 지혜이라고 하는 팔정도와 관계된 법, 두 가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하고 잠재적인  번뇌도 제거 할 수 업습니다. 그래서 이 세 종류의 거칠고, 중간이고, 미세한 이 잠재적인 번뇌들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상을 주시함으로서 그 것들을 바르게 볼 수 있다면  그 안에 계율과 관계된 팔정도 요소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거친 종류의 번뇌인 몸이나 입으로 저지르게 되는 번뇌도 제거되어지며, '사마디'집중과  관련된 팔정도의 요소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중간 정도의 번뇌도 제거되어지며, 빤냐, 지혜이라고 하는 팔정도와 관계된 법, 두 가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번뇌도 제거되어 집니다. 그래서 팔정도를 수행하면 세 가지의 순환이 언제나 제거되어 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수행해서 세 가지의 순환이 언제나 끊긴다고 하는 것은, 내일 이 것에 대해 연결해서 이론과 실제를 조합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한시간 반이 다 채워졌으니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경구 하나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알아차림이 존재하면 앎이 분명하니 빛을 얻은 것이다." 라는 경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