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과 조연

2008. 8. 7. 22: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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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과 조연

-주객의 의미



무진당 조정육




어디서든 주인공인 사람이 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굳이 눈에 띄는 사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몇 토막 안 되는 그 말이 값지고 귀한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주인공이라 부른다.

주인공은 멋지고 아름답다. 매력적이어서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미색이 아니어도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다. 대개 주인공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람은 어디서든 돋보인다. 영화 속 주인공은 허름한 옷을 입어도 주인공이다. 때로 일자리를 잃고 소줏병을 든 모습으로 한강변에 앉아 있어도 주인공은 바뀌지 않는다. 벤츠를 굴리고 높은 빌딩을 소유한 부자가 아니어도 주인공은 넉넉해 보인다. 멋있는 주인공은 어디가 틀려도 틀리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주인공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림에서도 주인공은 있게 마련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을 알아내기는 누워서 식은 죽 먹기만큼이나 간단하다. 주연을 맡은 주인공과 조연을 맡은 객들이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행여 누워서 식은 죽 먹기조차 힘들어할까 봐 화가는 더 쉬운 장치를 고안해놓았다.


중국의 염립본(閻立本약600-673)이 그린 <제왕도권(帝王圖卷)>을 보면 주연과 조연의 관계가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다. 당나라 때의 우승상이었던 염립본은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그림을 맡아 그렸던 사람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인물화법을 잘 그렸다. 육조 시대 이래의 여러 왕들의 모습을 두루마리로 그린 <제왕도권>은 당나라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된 계획 중의 하나였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자세의 왕을 그린 <제왕도권>은, 왕은 크게 그리고 신하는 작게 그린다는 옛날 방식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다. 왕의 모습을 신하의 다섯 배 정도로 크게 그린 것은, 왕이 매 끼니마다 다섯 그릇의 밥을 먹고 신하가 더 적게 먹어서가 아니다. 왕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지금 보면 다소 유치해보이기까지 한 이런 방식은 고대 예술작품에서 지역을 불문하고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인물화법이다. 조각과 회화에서는 물론 종교화와 인물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발상의 근저에는 주연과 조연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주연과 조연을 그림에서는 주(主)와 객(賓)이라고 부른다. 시대가 흘러 사람의 크기로 주와 객을 구분하던 표현방식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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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립본, 제왕도권 부분, 당, 두루마리, 비단에 채색, 보스턴 미술관


 

그렇다면 조연이나 객은 필요 없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그 역할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림에서 주가 있고 객이 없으면, 화면은 변화가 없어서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다. 반대로 주가 없고 객만 있으면 산만해져서 정신사납다는 말을 듣게 된다. 행여 주가 너무 겸손해서 주인 자리를 비우고 구석에 서 있게 되면 화면은 안정감을 잃게 된다. 주인이 아무리 볼품없는 존재라 해도 그 자리를 객이 차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주인은 주인 자리에, 객은 객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균형을 이룬다. 내가 우리 집에서 주인이라면 다른 사람 집에 가면 객이다. 우리 집에서 주인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 집에서도 주인 노릇하려고 하면 자칫 꼴불견이 되기 쉽다.


그런데 어디서든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장소에 상관없이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챙겨주기를 원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전화했을 때 상대방이 당장 전화를 받지 않으면 모욕당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태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전화는 무조건 받아야 되는 것이다.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현재 병원에서 링겔을 꽂고 누워 있을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면박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에게 그런 사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화가 날 뿐이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 없이 자신을 강요하는 사람은 피곤하다. 그런 사람 곁에는 사람이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만 봐도 슬슬 피한다. 주인공이라 해도 외면당한다. 결국 스스로가 주연의 자리를 버리고 조연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주인공일까.

그 해답을 안성 청룡사 대웅전에서 찾을 수 있다. 대웅전은 사찰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그래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면서 최고의 정성이 들어가는 건물이다. 그 안에 모셔지는 부처님이 아미타여래든 석가여래든 상관없이 대웅전은 대목수의 손길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이다. 지붕은 가장 멋들어진 팔작지붕을 올리고 기둥과 대들보는 가장 잘 생기고 좋은 목재를 골라 쓴다.

그런데 청룡사 대웅전은 그런 선입견을 간단히 뛰어 넘어버린다. 앞쪽에서 보면 반듯한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건물처럼 보이는데 옆면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맨 앞에 서 있는 기둥을 제외한 나머지 기둥들이 하나같이 전부 어딘가 모자라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 청룡사에 가서 옆에 세워진 기둥을 보았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심하게 휘어진 기둥을 보고 내가 눈이 피곤해서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도 기둥의 생김새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대웅전 기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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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청룡사 대웅전의 옆 모습



대목수는 나무를 고를 때 잘 생긴 나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나무가 어떤 형태로 생겼던 상관없이 그 나무의 쓰임새를 생각한다. 잘 생긴 나무는 잘 생긴 대로, 못 생긴 나무는 못생긴 대로 제각각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목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청룡사 대웅전의 못생긴 기둥들은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몸으로, 이렇게 비틀어지고 휘어진 몸으로도 감히 대웅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 나같이 모자라고 보잘 것 없는 몸으로도 무엇인가 값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세상에는 쓸모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청룡사 대웅전의 기둥은 절절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뭉클해진다. 앞쪽에 세워진 기둥이 아무리 듬직해도 뒤쪽에서 받쳐주는 기둥이 없으면 집은 지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주연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다. 주연을 맡든 조연을 맡든 모두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연을 맡아도 조연보다 못하는 사람이 있고, 조연을 맡아도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 있다.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내야 되는가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낼 때 그 사람은 빛난다. 주연을 맡았을 때는 주연을, 조연을 맡았을 때는 조연을 충실히 해내는 사람이 진짜 주인공이다. 조연 없는 주연은 날개 없는 새와 같다. 주연 없는 조연은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병졸과 같다. 조연과 주연이 이와 잇몸처럼 움직여줄 때 그들이 출연한 작품은 명작이 된다. 그림이든 영화든 오케스트라든. 인생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런데 우리들은 가끔씩 주연이 되지 못하고 조연이 될 때 소외감을 느낀다. 때론 조연밖에 되지 못하는 내가 쓸모없는 인간은 아닐까 자조적인 기분이 들기까지 않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 주연과 조연은 똑같이 중요하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스스로 자족적인 사람이 되면, 타인을 주연으로 만들고 자신은 기꺼이 조연이 될 수 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타인의 칭찬과 박수소리를 원하지 않는다. 아무 장소에서나 꼭 주연이 되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내 자신의 내면이 공허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스스로의 빈 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할 일이다. 그리고 자족하라. 청룡사 대웅전의 휘어진 기둥처럼.


(2008년 7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