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갚는 법/성철스님

2008. 12. 2. 12: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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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갚는 방법 / 성철 스님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觀波怨家 如己父母)


이것은 원각경 (圓覺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하고 대도(大道)를 성취 못하는 것은 마음 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가지 번뇌망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대도를 성취 못하고 성불 못합니다.
그러면, 팔만 사천가지 번뇌 가운데 무엇이 가장 근본되는 것이냐?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 (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증애심만 완전히 떨어지면 대도(大道)가 명백하다.(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증애심이 실제 완전히 떨어지려면 확실히 대오(大悟)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느니 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큰 원수 그런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면 너무나 무리한 요구 같습니다.


실제로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부처님이나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 보면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면 잘못하는 사람과 같이 싸우라는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저 연화대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있는 지옥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꼭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랑이라도, 곁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 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가장 죄 많이 지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있는 지옥중생도, 부처님같이 부모같이 존경하라 이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부처님 일생을 통해서 따라 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써서 괴롭힌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제바닷타(調達)입니다.
보통으로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隔地獄)하는 말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했던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 있어선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그러면 부처님은 제바닷타에게 어떻게 원수를 갚았느냐?


성불(成佛),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深達罪福相 偏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 이해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 아닙니까 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자성(自性)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가 한 몸뚱이면서 이름이 다를 뿐(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곁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떨어진 옷 때묻은 옷, 좋은 옷 등 온갖 옷을 다 입는데 좋은 옷을 입었으면 “아 당신은 참으로 거룩하다”고 하고 또 그 사람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으면 “에이 이자식 거지 같다”고 하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어도 그 사람이 더 나은 것도 없고 아무리 안 좋은 옷을 입었어도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 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해서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수기(授記)하지 않았습니까.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나한테 조금 잘한다고 해서 “허허” 하고 조금 잘 못한다고 해서 “저놈의 자식” 하고 주먹으로 안되면 칼을 들고 달려드는데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 바로 이것이 근본 조건인데,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소나 돼지같은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을 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 이것입니다. 사람은 꼭 같지 않느냐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천국의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 때 어떤 스님 한 분이 생활을 검박하게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 들어가려 할 때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 하면서 얼른 저 윗자리로 모신다 말입니다.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다 들이 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보고 주는게 아니야 옷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원 근본은 지옥중생이나 미물 곤충이나 악한 맹수나 점잖은 사람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근본자성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불성(佛性)만 보고 서로 존경하며 살지,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천대하거나 멸시하면 안된다 그 말입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오고 칼이 나오는데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를 몇 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 첫번째 이야기
예전에 현풍 곽씨 집안의 한 사랑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이 행실이 단정치가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가 않아,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해보고 별 수단을 다 써봐도 별무 효과였습니다. 그렇다고 양반 집에서 마누라를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孟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귀절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이 없이 착하다. 악한 이고 착한 이고 간에 누구든지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孟子道 性善 言必 稱堯舞)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활연히 깨닫고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까지 마누라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쁘다고 때리고 구박을 많이 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는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해야겠다.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전 양반 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祠堂)에 가서 자기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부처님께 예불하듯이.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 입고 큰 갓을 쓰고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절을 하고 나와서는, 제일 먼저 마누라한테 넙죽 절을 하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가만히 보니 남편이 미쳐버렸단 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도포 입고 큰 갓 쓰고 절을 넙죽넙죽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갑자기 미쳤나 하고 생각하는데
-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
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하는 것입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면서 절을 하며 뭐라느냐 하면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요.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리기도 했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을 해야겠습니다.
하면서 자꾸 절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를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
-왜 자꾸 이러십니까? 이제는 나도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제발 절은 그만 하십시오.
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당신이 요임금 순임금과 꼭 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 안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 남편의 여전한 기색에, 결국 그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날더러 요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면서 서로가 요순이라고 존경해 가며 살아가게 됐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내가 했던 말은,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두번째 이야기
내가 6 ·25 사변 뒤 통영 안정사 토굴에서 자고 있을 때 이야기 입니다.
하루는 진주에서 신도들 30여명이 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한 신도가 30년동안 자기 영감하고 말을 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름은 들먹이지 않겠습니다. 내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불교 믿는 부처님 제자라고 하면서 딴 사람도 아니고 아들 딸 낳고 함께 사는 영감하고 30년이나 말을 안하고 산다니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 딸 몇을 낳고 난 후에 남편이 작은 마누라를 얻어 나가고 자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살림이고 뭣이고 싹 쓸어가 버리고 남은 자식들 데리고 먹고 살며 공부시키려니 그 고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평생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분이 북받쳐서 말도 하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다 듣고 난 다음에 내가 물었습니다.
-나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까?
-예, 하겠습니다.
-그러면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3000배 절을 하되〈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꼭 하겠습니다〉하는 원을 세우고 절을 하시오.
했더니 밤을 세워서 3000배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길
-지금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 작은 부인을 얻어서 나를 이렇게 만들고 괄시를 했다 하는 원한이 맺혀서, 30년 동안 말도 안하고 원수같이 지냈는데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영감도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착한 사람이니까, 오늘 돌아가는 길로 당신 집으로 가지 말고, 가게에 가서 술하고 좋은 안주 사가지고 작은 부인 집으로 찾아가십시오.  부엌에 가서 손수 상을 차려서 영감님께 올리고 큰 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길 〈영감님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영감님이 참으로 부처님 같다고 했는데, 내가 그것을 모르고 이제껏 말도 안하고 지냈습니다. 그 허물이 너무나 큽니다마는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당신이 참으로 부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했더니,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영감이 보니 마누라가 미쳤단 말입니다. 아무리 얘기를 하려고 해도 막무가내던 사람이 술 받고 안주 만들어 와서, 절하며 잘못했다고 비니 하도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토굴에서 공부하시는 스님께 가서 영감 이야기를 하고 법문을 들었는데, 영감같이 착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영감이 부처님과 똑같은 어른이라고 하십디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영감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영감이
-아!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하고는 그만 크게 발심(發心)을 했습니다. 그 후로는 철저한 불교신도가 되어서, 부인이 새벽으로 기도하러 갈 때도 꼭꼭 같이 다니고, 나중에는 진주에서 신도회 회장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은 상대방을 보되, 겉모습만 보지 말고 본래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살계(菩睡戒) 서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넓게 바치는 진로업혹문이 모두 보현보살의 진법계다."〈普照塵勞業感門盡是普賢眞法界〉
진로업혹문이란 중생의 나쁜 짓을 총망라 한 말인데, 아무리 중생이 나쁜 짓을 한다 할지라도 겉보기만 그럴 뿐 실제는 전부 보현보살 진법계다 이 말씀입니다.
겉모양은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성품만 보고 살면,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하여 부처님이나 지옥 중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옷은 보지 않고 사람만 보고 살면, 자연히 원수라도 부모같이 안 섬길래야 안 섬길 수 없습니다. 원수도 원수가 아니고 부처님이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부모와 같이 부처님과 같이 섬겨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잘 알아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예전 인도에서는 조석(朝夕)으로 예불시간에 꼭 지송(持誦)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一百五十護佛頌)이 그것입니다.
의정(義淨) 법사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 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은심과부재 배덕기심원 존관원극경 유여극중은
(恩深過覆載 背德起深怨 尊觀怨極境 猶如極重恩)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갚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한다 말입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어존전해 존어원전친 피항구불파 불이피위은
(怨於尊轉害 尊於怨轉親 彼桓求佛過 佛以彼爲恩)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존어원전친(尊於想乾親) !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 해주는데 상대방은 내 잘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저쪽을 받들고 더 섬긴다 이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
이것이 부처님 근본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배 절하러 왔길레 절을 할 때 그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그렇게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겠다고 하면서 절 삼천배 다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 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모두 지옥간다. 이렇게 되면 참 곤란합니다.


우리 불교는, 부처님은 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착하게 살면 다 좋은 데 간다. 부처님 믿고 안 믿고 할 것 없습니다. 착한 일을 하기만 하면 좋은데 간다고 하지, 우리 부처님 믿어야만 극락세계 간다는 소리는 안 한다 말입니다. 그건 신사가 아닙니다. 우리 스님네들이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욕하는 사람이, 극락세계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에 있어서 “저 원수를 보되 부모같이 섬겨라”이 말인 것입니다. 원수를 부모같이 섬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또 자꾸 그렇게 해 나갈 것 같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일체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부처 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 그 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참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 큰일났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느냐 말야,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이 나서 도망갈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을 가지고 일상생활에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상대가 주먹질 한다고 맞주먹질하고 달려드는 것보다는, 저쪽이 주먹질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부모와 같이 부처님같이 섬기고 그렇게 생활할 것 같으면, 그만 모든 사람이 그것에 다 감동이 되고 감복이 되고 해서, “불교가 그런 것인가 ! ” 하고,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라, 부처님 가장 욕하고 스님네 가장 공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사람이 가장 먼저 극락세계에 가도록 그렇게 발원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 불교는 실제 온 천하를 다 덮을 것입니다.
그럼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놓는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기 때문에 안됩니다. 저쪽에서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가지고 달려드니까 함께 타버리고 말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단 말 입니다. 어찌 당하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이기는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成佛)은 그만두고 전술(戰術), 이기는 전술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달려들어야지 불로써 달려들어서는 안됩니다.


첩실(妾室)을 아주 미워하는 사람보고 첩실을 섬기라는 말보다도 “첩실 떼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할 때, 이것은 전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전술대로 하면 결국 첩살이는 도망가 버립니다. 이것도 일종의 방편인데, 흔히 전술로써 이렇게 말해주기도 합니다.
근본은 어다 있느냐 하면,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법문의 총결산을 하겠습니다.

살상무구상청정(實相無垢常淸淨)
귀천노유사여불(貴廳老幼事如佛)
극중죄인극존경(極重罪人極尊敬)
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모든 일체만법의 참 모습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有情) 무정(無情)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성불(本來成佛)이란 말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자세 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 만큼 우리 서로 서로 노력합시다. (끝)

 


    사랑전쟁 전쟁이 종전된다는 것은 고요함이다 사랑의 종전은 이별이다 잘 참아내고 기다릴 줄 아는 이는 사랑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만 하고 행이 따르지 않으면 망상으로 끝나고 폭탄소리가 곧 사라진다 이론서 읽듯이 앞뒤 짜맞추기는 사랑이 아니라 명분 쌓기다 이유를 붙이면 엔돌핀 소모량이 증가하여 깔딱 고개들를 몇번이고 넘어야 한다 사랑에는 두서가 없고 논리적이 못된다 사랑은 전쟁이다 속앓이 하는 초조과 긴장감의 계속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어야 하고 당신을 포위하는 점령군이 되어야 한다 폭탄에 맞아서 속 터지는 아픔이 겪으면서도 말없이 견디어야 하는 고통들도 많다 사랑은 믿음이 아니다 기 겨루기다 가슴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다 맞으면서도 폭탄 하나로 상대의 간을 철렁하게도 한다 침묵의 간격 앞에서 온갖 지략이 다 나온다 둘다 모두 삼국지를 읽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날들이 점점 늘어난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사랑의 쟁취가 아니다 사랑에는 휴전이 없고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도 없다 주간, 야간도 없이 오색단풍 타들어 가듯이 온 가슴을 다 태우고 피해상황을 알리지 못하고 가슴앓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