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법문

2008. 12. 24. 20: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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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성찰있는 믿음

이제 그 소란함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대학입시는 우리나라 전 국민이 울고 웃는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입시의 가장 큰 관문이 수학능력 시험이라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시험 때가 다가오면, 인생의 모든 것이 마치 그에 달린 듯, 수험생은 물론이고 온 가족의 생활 패턴이 그것을 중심으로 변화됩니다.

수능시험에 대해서는 곡절도 많고 논란도 무성하지만, 최소한 그 이전의 대입 시험 형태보다는 진일보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외워진 지식이라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스스로가 합리적으로 사고해야 풀 수 있는 문제들로 시험 문제의 성격이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전환의 이유로는, 무비판적으로 주입되어 고정된 지식으로 포장된 사람보다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지혜를 갖춘 사람을 요구하는 미래 사회의 요청을 들 수 있겠습니다.

철지난 입시 이야기를 새삼 꺼낸 것은, 대학 입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그와 같은 전환이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사회적인 변화의 보폭을 맞추지 못하는 종교는 더 이상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기능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낙후되고 고루한 신념으로 치부되어 외면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시대적인 변화의 물결을 오히려 앞서 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내용, 제시된 교의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나 의심도 없이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자세는 불교의 본래 정신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요인으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같은 깨달음을 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턱대고 믿어버려서는 깨달음의 ‘깨’자에도 다가갈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스스로의 내면적인 성찰 없이 무조건 믿으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그 순간에 부처님의 진심에 등을 돌린 제자로 전락했다고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큽니다. 아마도 우리들 생활의 모든 영역에 믿음이란 요소가 없다면 인간의 삶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순간에도 ‘파란 불이니까 차는 멈춰서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깔려있는 것이고, 내일이 올 것을 믿기에 오늘 열심히 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인간생활의 바탕이요, 전제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고 필요 불가결한 요소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스스로 이치를 생각해보지 않고 남의 말만 믿고 의지했을 때, 불행한 결과를 맞이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지요. 사기를 당해서 망해버린 사람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허위광고에 넘어가 물건을 잘못 사는 사람, 그리고 친구의 꼬임에 그만 본드에 중독되고만 청소년들도 알고 보면 습관적인 믿음, 맹목적인 믿음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속이고자 한 사람들이야 당연히 나쁘겠지만 속임을 당한 사람들 역시 스스로 이치를 생각하는 자세가 모자랐다는 점에서 반성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그런 믿음의 양면성은 종교적인 믿음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 종교의 교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함께 퍼져있는 경우엔 자기 종교의 정당성과 신자의 확보를 위해 그런 믿음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기 마련이죠. 특히 인간의 의지나 지적 능력보다는 신의 섭리를 세계와 역사의 근원적인 원동력으로 여기고 있는 유일신적 종교에서는 그러한 신에 대한 믿음이 구원의 유일한 길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기적과 같은 현상이 『성경』이나 『코란』 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깨달음과 짝을 이룬 믿음

물론 불교라고 해서 완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화엄경》에서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여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가하면, 《아함경》에서도 불제자들이 우선적으로 지녀야 될 마음으로 부처님과 그 가르침, 그리고 성스러운 제자들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구비유경》에는 믿음과 관련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깊은 강물을 건너오는데 물이 그 사람의 발목에까지밖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행인이 하도 이상해서 어떻게 깊은 강을 그렇게 걸어오면서도 빠지지 않았는가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내가 강을 건너기 전에 옆 사람에게 강의 깊이가 얼마쯤 되는가 물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발목 정도밖에는 안 된다고 하여 믿고서 건너온 것뿐입니다.”고 하였답니다.
이 이야기를 비록 표현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만, 불교에서도 믿음의 힘을 무척 중요시했음을 전해주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예화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분명히 인간의 삶에 커다란 힘으로 작용합니다. 깊은 병이나 우연한 변고로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친 사람에겐,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자신을 살필 만한 여유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겐 더욱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믿음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한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듣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믿음이 불자들의 기본요건이고 때로 상식적인 이해 이상의 힘을 발휘하여 우리를 돕는다 해도 그것으로 불자의 도리를 다했다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자비는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믿음 이상의 선물을 중생에게 주시려 한없는 세월을 애써오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깨달음이지요. 깨달음과 짝을 이루지 않은 믿음, 곧 스스로 이치를 생각해보지 않은 믿음은 소경이 무턱대고 길을 건너는 것과 같아 끝내 미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큰일을 당하고야 마는 법이지요.

예컨대 입으로는 석가모니불을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불법(佛法)의 이치는 안중에도 없다면, 선생님 이름만 알고 수업 시간에 멍청히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결국 시험은 망치고 혼이 나고야 마는 것처럼 부처님께 칭찬들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전 세계적으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종말론 신앙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종말은 오지 않았고, 수많은 추종자들은 예외 없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종말론은 마치 연례 행사처럼 일어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길을 택했고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을 겪었습니까? 물론 사회적인 요인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치를 살피지 않은 소경 같은 믿음으로부터 초래된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이치를 생각하여 깨달아 나아가라는 입장은 부처님이 제자들을 대하신 기본자세입니다. 부처님이 비록 온 중생을 향한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었다 해도 우리에겐 언제나 우리 자신만의 몫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을 로봇이나 꼭두각시로 생각해 버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조종당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즉 자기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건만 어떤 사람은 그 당연한 이치를 불교에서 중시한다하여 불교를 어려운 종교라 하고 심지어는 종교가 아닌 철학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한심하고 답답한 노릇이지요.



칸트가 불법을 만났다면

이런 와중에 철학자의 이야기를 한다면 어떨까 모르겠지만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엄밀한 사변적 탐구에 지치기 쉬운 이성은 곧잘 하늘의 구름을 베개로 잘못 알고 드러누워 쉬고 싶어하고, 유혹적인 감각경험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도 확보한 듯이 안도에 빠지지만, 그것은 단지 태만한 이성의 착각 내지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성실한 이성은 확실한 앎을 얻기 위해 하늘에 매달리지도 않고, 땅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칸트가 그의 『도덕 형이상학 정초』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의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귀찮다고 하여, 때로 힘들다고 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구름을 베개로 착각하여 드러눕는 것과 같아 궁극적으로는 삶의 파멸에도 이를 수 있다는 경고를 칸트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실한 이성은 피곤하다고 하여 환상에, 착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의 이 말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자세와 일맥상통 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마도 이성이란 단어를 보리심이나 구도심으로 바꾼다면 칸트는 훌륭한 불제자가 되었겠지요. 혼자 생각으로는 만약 칸트가 다음 생에 불법을 만났다면 반드시 부처님께 귀의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수긍해야하고 또 수긍할 수밖에 없는 부처님의 이런 입장에 여전히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깨달음의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너무나 먼 길이고 도저히 이 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불경에서도 3아승지 100겁을 지나서야 성불한다고 하는 말은 어디서 들었는지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허물 많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볼 때 당연한 의심이라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자신만만하게 나온다면 그?痼? 오히려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설사 성불에 이르는 시간이 3아승지 100겁이 걸리다 하더라도, 그 세월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긴 시간이라 할지라도 내가 서있는 시간이 그 처음이라고 해야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3아승지 100겁의 시간을 이미 지나와 이번의 생이 그 끝 순간이라 여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결코 억지가 아닙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만 해도 눈 먼 거북이가 망망대해에서 구멍 뚫린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어렵고 귀한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온전한 몸과 정신을 갖추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다면 그 인연의 씨앗이 얼마나 귀한 것이겠습니까?

《화엄경》에서 “보살마하살이 보리심을 내어 한량없는 아승지겁에 보살의 도를 이미 닦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았지마는 오히려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처음으로 보리심을 내어 보살의 행을 행한다’하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말씀이 어찌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중생들이 스스로 못난 마음을 일으킬까 염려해 법당보살은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한 번 도에 대해 마음을 내었거든 그대는 부디 의혹을 내지 말라. ‘내가 과연 부처를 이룰 수 있을까’ 하고.”
이쯤 되면 스스로 깨닫기를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왜 그렇게 믿음을 강조하였는가 하는 의문도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두 개념은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부처님은 그 둘을 더불어 중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미 불교의 믿음은 불, 법, 승 삼보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 하나를 더 첨가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바로 ‘나는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너희들은 해야 할 일을 하여야 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제자들이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갈 때 이미 이 믿음은 전제로 깔려있는 것이지만, 살아가면서 또 수행하면서 부딪치는 숱한 어려움은 그 믿음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대승불교, 특히 《법화경》이나 《열반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가 될 성품이 있다는 불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지요.

불교신앙을 자력(自力)신앙이라고 하여 초월적인 절대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타력(他力)신앙과 구별하는 이유도 이젠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분을 함에 있어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불교에서의 믿음을 ‘자력’이라는 범주로 포괄해버리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반성입니다. 열반에 앞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언제나 ‘법에 의지하라’는 말과 함께 설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부처님을 향해 ‘법의 주인’이시며, ‘법의 근본’이라며 존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법의 주인은 모든 중생과 함께 그 법을 나누고자 하여, 정성스레 그 주인 되는 길을 환히 열어주셨습니다. 어찌 그분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사무치는 은혜로움으로 절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힘은 이미 부처님의 힘이고 부처님의 힘인 채 나는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일러 ‘나는 길을 가리키는 자’라고만 말씀하셨지만 우리들에겐 부처님은 단순한 표지판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때로는 따지며 대들어보기도 하지만 늘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어버이와도 같은 분입니다. ‘뭇 생류의 자비로운 아버지(四生慈父)’이란 이름을 듣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리심을 일으켰을 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문에 그 대를 이어갈 아들로 태어난다”고 《화엄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린 엄청나게 많은 형제를 가진 셈이지요. 형제가 많다보면 싸울 일도 많겠지만 뜻하지 않는 변고를 당했을 때는 서로가 큰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또 그 가운데에서는 유난히 마음이 맞는 형제도 있기 마련이지요. 스스로 살아가되 어려움이 닥치면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힘있는 형에게 의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는 게 지옥같이 느껴질 때면 지장보살처럼 내 아픔을 나눠줄 수 있는 형을 찾아가도 좋겠지요.

형제간에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통한다는 것은 아버지로서도 바라는 바이겠지만 늘 의지만 하려는 아들을 보시노라면 가슴도 아프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깊은 바람은 모든 아들이 스스로 독립하여 가문을 빛내주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잡아함경》 제 1079경의 법문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비구여! 내가 제자들을 위하여 해야할 일은 안타까이 여기고 가엾게 생각하여 진리로서 편안케 하는 것이다. 너희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해 마쳤노라. 너희들도 해야 할 일을 하여야 한다. 무엇인가. 숲 속이나 빈집에서 풀이나 나뭇잎을 깔고 앉아 고요히 생각하여 방탕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뉘우침이 없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니라.”

 

  

                    청량사 에서 가져옴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란다면 .. 기쁨을 원한다면 다른사람에게 기쁨을 주라 사랑받고 싶다면 다른사람에게 사랑을 주라 주목받고 싶다면 다른사람을 주목하고 인정하라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란다면 다른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는 것이다 디펙초프라줌의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