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우주를 만들었는가?/숭산 스님

2009. 2. 18. 10: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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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는 법상에 올라앉아 한참 양구(良久)하다가 법상을 한번 치고 말했다.
“저 태양이 언제부터 시방세계를 비추기 시작하였는가?”

또 한참 있다가 주장자를 한 번 치고 말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언제부터 돌기 시작하였는가?”

또 한참 있다가 다시 주장자를 한 번 치고 말하였다.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이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다.

이 세상 만물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이 있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다. 머나먼 시간을 씨줄로 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 즉 공간을 날줄로 하여 거기 인과의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아진다.

불란서 파리에 가면 일류 화가들이 걸레쪽지 몇 개를 드리워 놓고 헌 신짝 두어 개 모아 놓고 천하제일의 예술이라 자랑한다. 굴러가는 개똥이 우리가 볼 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 자리 그렇게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여건이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법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 이 세 가지에 의해서 존재한다. 보잘것 없는 예술이지만 그것을 높이 음미하여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교훈 아닌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캐나다 토론토에 왔다가 자동차와 부딪쳐서 다리가 부러졌다. 관상가나 점쟁이가 보고 '당신은 그렇게 병신이 되게 되어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 사주 팔자를 누가 만들었는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찌하여 토론토에 왔으며, 어떻게 길을 가게 되었나, 물론 아들 딸 사위가 있어 그 힘에 의하여 토론토에 왔고 일가 친척을 찾아보려고 거리에 나갔다. 하지만 내가 없는데 어떻게 아들 딸 사위 친척이 있어 차사고가 날 것인가. 내가 없으면 차 사고는 커녕 캐나다라는 명자까지도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원인은 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근본은 바로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태양이 언제부터 떠서 언제 질는지 모르지만 그 태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면 태양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태양이 시방세계를 비추기 시작한 것도 내가 존재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산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도리를 안 다면 도리어 환경을 지배하고 살 수 있다.

지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런 질문을 던졌으니 망정이지 지구가 1초 동안에 1.5㎞ 씩을 달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고 둥글둥글한 공처럼 생겨 허공 가운데 둥둥 떠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지구 밑 쪽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땅 밑으로 떨어지고 말 것인데 어떻게 거꾸로 떨어지지 않고 살고 있느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지구가 얼마나 큰 존재라고, 우리의 인력을 능가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사람은 이미 허공의 가운데 팽개쳐져 이 지구처럼 돌고 있을 것이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중세기에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지구가 돌고 있다는 말을 한 사람들이 종교재판에 의하여 산화된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지구가 언제부터 돌기 시작하였는가? 지구 그 자체는 한번도 돈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돈 까닭이다. 시계가 언제부터 ‘땡’하고 쳤는가? 사람이 맞추어 놓고 치기를 기다림으로 친 것이다. 그러니 시계는 한번도 친 일이 없다. 치게 만든 것도 사람이고, 치는 소리를 들은 것도 사람이며, 쳤다고 생각한 것도 사람이다.

시간과 공간이 이미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누가 만든 것인가? 경전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전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사는 것을 보면 알고, 미래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사는 것을 보면 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간 또한 누가 지어 주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짓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날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야기이다. 쓰이는 것은 모습뿐이므로 모습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들은 판단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다.

내 눈, 내 코, 내 입, 내 몸뚱이지 진짜 내가 아니다. 나는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나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 형상이 있는 것이라야 변질되는 것이지, 이미 나지 않는 것이라면 죽음도 없을 것이니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시초이다.

오뚝이를 일본 사람들은 ‘다르마'라 부른다. 달마대사가 9년 면벽을 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넘어지지 않았던 그 꿋꿋한 의지를 표한 것이다. 오뚝이가 되려면 염불 참선을 해야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계속 부르다가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불러도 좋고 ‘코카콜라’ ‘세븐업’을 불러도 상관없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보고 ‘콜라’ ‘세븐업’이라 하여 먹고 싶어하면 곤란하니 법신의 체상(體相)으로 인격화하여 부르는 것이다.

부를 때도 입으로는 부르면서 생각은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해서 쓰겠느냐. 자꾸자꾸 교섭하면 하나가 되지 않는다. 사람 생각, 돼지 생각, 소 생각, 뱀 생각 모두모두 놓아버리고 관세음이 되면 관세음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하나가 될 것이므로 세상이 한세상이 되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길이요, 세계와 내가 하나되는 길이며 모든 인류가 한 식구가 되는 길이다."

 

기자 “지금 미국에서는 선의 선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숭산 큰스님께서도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셨던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일이 있으면 들려주시지요.”

스님 “그곳 미국에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아들 친구를 붙들고 우리 아이를 제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모양이에요.

브라운대학, 하버드, 예일, 콜럼비아, 버클리…. 아무튼 이렇게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다는 이 친구는 아는 것이 많은 데다가 얼마나 오만한지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말을 잘 붙이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은 이 박사의 친구가 ‘얘, 너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양선사가 일본에 계시다가 오신 분이 있는데, 너한테 질문이 있다고 한다더라.’ 그러니까 그 친구 말이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해.’하며 자신이 만만해 가지고 대답하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결국 그 선사와 박사가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지요. 그때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버클리 젠 센터’라는 꽤 큰 선방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은 예불하고 법문을 마치고 질문을 받는 시간인데 그 친구가 말한 만물박사가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질문을 하러 왔으면 질문을 하라.’ 했더니 ‘내가 언제 질문이 있다고 했느냐? 선사가 질문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오.’하면서 그만 화를 벌컥 내더란 말이야.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놈이 서로 만나게 하려고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럼 좋다. 내가 질문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해놓고는 ‘네가 100% 믿고 있는 자신있는 말을 한 마디만 일러다오.’

그랬더니 이 녀석이 머리를 컴퓨터식으로 회전하면서 그 말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참을 지나도 대답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네가 100% 믿는 말을 안다.’ 그랬더니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느냐?’고 큰소리를 치더군요. 그래 내가 다시 물었지요.

‘하나에 둘을 보태면 몇이냐?’
‘셋이 아닙니까?’

‘그래 맞다.’
‘그거야 국민학생도 아는 거 아닙니까? 나는 좀더 고상한 말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상하고 고상하지 않은 말이 어디 있느냐? 네가 100% 믿는 말이면 됐지….’
‘그렇지만 내가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받은 사람인데 하나에다 둘 보태면 셋이라는 말을 해야겠습니까?’

‘너는 나보다 하나 더 몰라.’했더니
‘무얼 더 아느냐?’고 반문을 해와요.

‘나한테 물어봐. 하나에다 둘 보태면 몇이냐고?’ 그랬더니
‘도대체 하나에다 둘 보태면 얼 맙니까?’하고 물어왔어요.

‘없다. 제로다.’ 그랬더니
‘내가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땄어도 하나에다 둘을 보태면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왜 그렇게 되느냐.’고 하면서 화를 벌컥 내요. 내가 대답해 주었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사과를 한 개 주었다. 내가 먹었지, 그 다음에 사과를 또 두 개 주었지. 그런데 그것도 또 먹었어. 그 사람은 분명 나에게 사과를 세 개 주었는데 사과는 없어졌어.

그러니까 제로가 되지 않았느냐, 숫자라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다는 도리다. 우리 불교는 유치원생이 하는 것이야.

내가 또 하나 묻겠는데 하나 더하기 둘은 셋과, 하나 더하기 둘을 제로라는 것 중 어느 것이 맞느냐?"
"둘 다 맞지요."

"그게 틀린 거다. 나는 다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어디서 나왔느냐? 둘은 또 어디서 나왔느냐? 셋은, 제로는 어디서 나왔느냐? 누가 만든 거냐? 개가 셀 수 있느냐? 닭이 셈을 할 줄 아느냐?

너의 생각이 하나, 둘, 셋을 만들었고, 너의 생각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지. 본래는 하늘도 땅도 없고, 하나, 둘, 셋도 없는 거야. 자 예를 들어보자. 저 눈(雪)이 무슨 색깔이냐?"

"흰색입니다."
"그것 틀렸다."
"왜 그것이 틀립니까?"
"네가 눈한테 물어보아라."
"눈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대답을 안한 걸 보니 눈이 희다는 말을 안한 것 아니냐? 네가 눈이 희다고 했지 눈이 언제 내 색깔이 희다고 얘기하더냐?"고 했더니 한대 얻어맞았다고 하더구만 하하…(웃음)

"해를 너는 썬(SUN)이라 하고 나는 해라고 한다. 물론 자기 멋대로 지은 거지, 태양이라는 것은 본래 이름이 없어…. 이 모든 것은 네 생각이 만들었을 뿐이야.

네 생각이 만들었으니까 네 생각이 없어지면 하나 둘 셋이 있겠는가? 이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무색(無色) 무공(無空)으로 넘어가는 도리라는 거야.

네 생각이 태양하고 끊어질 때 어떻다고 생각하겠는가? 자 어떤가? 생각 이전의 세계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없다."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나라는 것도 생각에서 나온 거야. 내 생각이 딱 끊어져야 내가 없어지는 거야.

내가 없다는 것은 내 마음이 텅 비어지고 대허공 같이 되고, 대허공 같이 되면 대원경이 되어가지고 맑은 거울 같아서 산에 비추면 산이 되고, 물에 비추면 물이 되고 비추는 그대로야.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고, 개는 멍멍 짖고,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고…. 이것이 실상이라는 거다."

이렇게 《반야심경》의 도리를 설명하자 박사학위 다섯 개라는 것도 아무 쓸모가 없음을 알았는지 ‘선생님 제자가 되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이런 쟁쟁한 놈을 굴복시켜 놓으니 그 밑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서양 사람들은 한국 수좌들처럼 윽박지르며 시키면 통하지가 않아요. 머리들이 논리적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가르쳐서 자기들의 이론이 밑받침되지 못하는 곳까지 끌고 가야 해요.

하나하나 따져서 합리적인 옳은 답이 나와야 믿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이 출가해 스님이 되었고 지금 화계사 국제선원에 많은 스님들이 동안거 참선 정진하고 있어요. 아주 열심입니다.

이렇게 먼 외국에서도 부처님 법을 찾아 화계사로 오는데 우리 화계사 불자님들도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부처님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기자 “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백꽃

입춘이 지나니 벌써 저~기 타지방에서는 동백꽃소식도 들리더군요..
동백꽃말이 뭔지 아세요?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동백꽃을 참 좋아합니다.
동백꽃을 보면 저는 왠지 강한 의욕이 솟구칩니다..
얼음이 살포시 덮인 활짝 핀 동백꽃을 보면 저 추위에서도 꽃망울을 터트리는 강한의지가

아름다워 보이거든요.

나약한 모든 이들이 얼음에 덮인 예쁜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
그 어떤 시련도 다 이겨내고 다시 활짝 웃을 수 있을꺼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아름다운 동백꽃을.... ^^     - 간결한 염원>님이 올린 글




얼음속의 꽃송이가 너무 예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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