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그 서글픈 중생의 자화상

2009. 3. 6. 11:24일반/생활일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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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그 서글픈 중생의 자화상]

 


워낭 소리에는 주인공격인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늙은 소 외에 여러 조연(?)들이 나옵니다. 열심히 늙은소와 함께 힘들게 논을 갈고 있는 할아버지 옆으로 최신식 기계를 모는 이웃집 농부 아저씨. 할아버지를 애처롭게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래서 한 푼이라도 더 소값을 드리려는 소장수 아저씨들. 동네 이웃 분들, 그리고 추석 고향길 다녀온 김에 부모님 걱정이 되어 소를 팔자는 아들, 며느리 내외들까지 여러 사람들이 조연으로  나옵니다.

 


조연 중에 또 하나, 사람 아닌 소들이 있습니다. 농사 짓기 힘들다는 수의사의 말에 늙은소를 대신하여 농사를 짓기 위해 들여온 암소 한 마리와, 그 암소가 할아버지 집에 온 다음 낳은 암송아지 한 마리가 그들입니다. 영화를 보는 한 시간 동안, 저는 모든 출연진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현실에만 매달려 사는, 우리 모두의 서글픈 자화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젊은 암소는 힘이 좋습니다. 식성도 좋아 할어버지와 늙은소가 애써 베어온 풀을 먹기 바쁩니다. 그러나 일은 할 줄 모릅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길을 들이려 해도 소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암소는 그저 먹고 쉬기 바쁩니다. 늙은소가 꼴을 먹을라치면 젊은 암소는 뿔로 늙은소를 밀어내고 자신이 먹기도 합니다. 늙은소는 그런 암소에게 힘에 부쳐서인지, 아니면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인지 자기 몫을 슬그머니 암소에게 양보합니다.

 


제가 보기에 암소 얼굴엔 괴로움이 없습니다. 젊어서 그런지 생기도 넘칩니다. 그 정도 나이면 다른 동료들은 이미 도살장에서 쇠고기 신세가 되었을 터인데, 늙은 할아버지 소 옆에서 젊은 삶을 마음껏 구가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제게는 얼마나 슬프게 보이는지...

 


지금은 젊어 모르지만, 늙은소의 저 처량한 모습이 곧 바로 자신의 모습일 터. 그것을 모르고 늙은소 옆에서 자신의 젊음을 만끽(?)하는 그 모습이 제게는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 늙은소가 삶을 마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서야 옆에서 늙은소의 임종을 지켜보는 젊은 암소의 눈망울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뒷날 또한 저러할 것을, 그 때서야 안 것일까요...

 

 

늙은소의 먹이를  빼앗아 먹는 젊은 암소를 보고 우리는 혹시 젊은 암소를 나쁜(?) 소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 장면에 어? 저 나쁜 녀석!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으니까요. 그러나 본래 선악이 없는 법! 선악은 단지 우리가 짓는 우리의 생각에 불과할 뿐, 순박한 눈망울을 굴리는 암소에겐 악의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먹이를 보는 순간 암소의 어리석음이 발동하여 위아래(?)도 없이 그저 먹이를 뺏은 것뿐, 비록 잘한 일은 아니지만 암소에게 선악의 개념은 없습니다. 우리가 붙이는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주관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 모릅니다.  

 

 

 

젊은 암소와 함께 또 하나의 아픔을 준 것은 암소의 새끼, 암송아지였습니다. 젖 먹을 때 빼고는 어미보다 오히려 늙은소를 더 좋아하는 송아지. 그 모습을 보는 할머니도 어찌 지 애미보다 늙은소를 더 좋아하는지 참 신통하다며 신기해 하십니다.

 


암송아지는 생후 3 개월 때 소장수에게 팔려가는데, 그것은 늙고 병든 할아버지 부부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암송아지는 어린 새끼들 특유의 자유분방함으로 가득 찼는데, 고삐를 매어 놓아도 가만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고삐를 풀고 옆 마을로 이리저리 뛰놀기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송아지를 보는 할머니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행여나 그 송아지가 남의 밭에 들어가 농사를 망쳐놓기라도 하면 큰 일일터. 마침내 날뛰는 송아지를 잡으려는 할아버지를 달려들어 쓰러 넘어뜨린 날, 할머니는 결국 송아지를 소장수에게 팔기로 합니다.

 

 

이별은 언제나 슬픔으로 다가오는 법. 더구나 가족끼리의 이별, 특히 부모-자식 간의 이별은 더욱 그러합니다. 어미와 이별하는 송아지인들 어찌 그 운명을 알겠으며, 비록 늙은소에 비해 지금은 젊음이 넘치는 어미소이지만, 어찌 어미로서 자식과 이별하는 아픔이 없겠습니까.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새끼 잃은 어미소의 비통함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축생으로 태어난 죄이며, 팔려가는 송아지 또한 자신이 만든 일의 결과인 것을...

 

 

생명체는 영성이 낮을수록 감정 표현이 둔해지지만, 희노애락 그 자체는 생명체가 모두 같습니다. 자식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 헤어지기 싫은 마음은 인간이라 해서 더 뛰어난 것도 아니고 미물이라 해서 더 약한 것도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다만 생명체 구조 상 표현 능력이 떨어질 뿐입니다. 마치 자동차가 달리는 것은 똑같지만, 고급일수록 달리는 기능이 더 뛰어난 것과 비슷합니다.

 

 

 

두통이 심한 할어버지를 진찰한 읍내 의사는 할아버지에게 쉴 것을 권합니다. 고혈압이 있는 몸으로 일을 너무 많이 해 몸에 무리가 왔다며 자짓하면 중풍이 올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일을 그만 하시고 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할머니는 또 늙은 소를 탓하십니다. ‘저 소새끼만 아니면 영감이 이 고생 안 할텐데...’하면서 말입니다.

 

 

 

러나 어찌 아실까! 그 늙은소가 바로 할아버지의 생명 줄인 것을...

 

 

사람은 무엇엔가 마음을 붙잡고 있으면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 법. 군대에서 사격이나 유격훈련 등, 위험한 훈련을 앞두고 바짝 군기를 잡는 것도 이 때문인데, 늙은소와 함께 언제나 일을 향한 그 마음이 늙은 할아버지를 이 정도라도 건강이 유지되게 하는 것을, 보이는 세계만 전부인 줄 아시는 분들이 과연 짐작이나 하실는지... 과연 소가 없고 농사 일을 안 하면 할아버지는 더 건강해 지실 건지...

 


추석 날 고향을 찾아온 아들 며느리 부부들은 한가위 달을 두고 이렇게 할아버지께 권합니다. 이제는 아버님 농사 일을 그만 두시라. 아버님이 농사 일 한다고 건강치 못하시니 우리도 신경 쓰여 안 되겠다. 용돈 드릴테니 이제 그만 편히 지내시라. 그리고 저 소를 팔아라. 소가 없어여 농사를 안 지으신다... 이렇게 말이 나온 끝에 아들 형제들은 올해는 소를 팔기고 그 날 아주 결론을 짓습니다. 아들 형제들도 인정하듯, 9 남매를 모두 먹여 키워 장가 시집 보낸 늙은소와 할아버지는, 이런 아들과 며느리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습니다. 아무 말 일체 없이...

 


어느 새벽 이른 아침, 늙은소는 평소보다 많은 곱빼기의 아침 식사를 받습니다. 소시장에 가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는 식사를 일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굶은 채로 자신을 팔러가는 할아버지 수레를 끌고 시장으로 향합니다. 그런 소를 향해 평소 구박스런 말만 하시던 할머니는 ‘소야, 거기 간다고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다’라며 애처롭게 바라보십니다.

 

 

소시장에 가신 할어버지는 한사코 소값으로 500만원을 고집하십니다. 소장수들이 기가 차는 것은 당연지사. 할아버지, 이 소는 누가 거져 줘도 안 가져 가요!라며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소 상인들. 어떤 분은 이 소는 잡아봐야 (고기값이) 60 만원 어치 밖에 안 나온다며 혀를 잡니다. 거기다 이 소는 고기가 질겨 먹지도 못한다는 말까지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상인들의 말에 할아버지는 일찍이 볼 수 없던 노기를 얼굴에 띠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500만원을 고집하십니다. 결국 ‘이 소 때문에 다른 소도 안 팔린다’는 상인들의 하소연에 할아버지는 소를 끌고 다시 집으로 옵니다.

 

 

이 대목에서 저의 눈길을 끈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야박한 말을 하기도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짓기도 하지만, 어떡하든 한 푼이라도 더 후하게 소를 팔아 드리려는 상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를 헐 값에 사서 득을 보려는 상인들의 상술일 수도 있겠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늙은소를 오죽하면 파실까, 하는 연민의 마음에서 가능한 한 한 푼이라도 더 드리려는 사람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이 제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하랴! 60만원짜리도 안 된다는, 거져 줘도 안 가져 간다는 소값으로 100 만원을 넘게 드리려 해도 500만원에서 꿈쩍도 않는 할아버지를...

 

 

또 하나는 흥정할 동안의 늙은소의 모습이었습니다. 감독이 일부러 그런 모습을 찍었는지는 모르나, 이런 소를 시장에 가져오다니..하면서 웃음짓은 상인들 말소리에 늙은소는 자꾸 얼굴을 소말뚝 옆으로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소들은 늠름히 얼굴을 들고 서 있는데, 유독 늙은소는 얼굴을 자꾸 감추는 것이, 아마 상인들의 말을 다 알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이 늙은 몸이 할아버지에게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팔려가는 것도 안 되는 구나...하는 자괴감이 소에게 밀려오는 것 같은 모습을 이 늙은소가 보이는 것입니다.

 

 

소가 눈물을 흘린 것은 어느 장면에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를 팔아라는 말이 나온 추석 날인지. 아니면 소시장에서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쨌든 소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었습니다. 축생에겐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꼭 유의해서 보셨으면...하는 장면입니다.

 

 


다시 가슴 아픈 장면은, 앞서 추석날의 자식들 모습입니다. 소를 파는 것이 말은 부모님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제게는 자신들의 힘든 것을 덜어버리려는 마음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신경쓰여 안 되겠다는 그 말씀...아! 어찌 알지를 못하실까, 부모님의 건강은, 자식들의 정성과 비례하는 것을...

 

 

애써 농사 지은 쌀을 추수 후 자녀들에게 보내시며 하던 할머니의 말씀,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거 하고 자식 입에 밥들어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있노”라는 말씀처럼, 자식이 건강하고 잘 살며, 그리고 그런 자식들이 늘 부모님을 챙기며 멀리 있어도 늙으신 부모님들 위해 어떤 형식이든 정성껏 기도를 드릴 때, 부모님 건강은 저절로 지켜지며 천수 또한 저절로 누리신다는 것을 우리 자녀들은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이별할 때가 왔습니다. 40 여년을 함께 한 할아버지가 아무리 말해도 일어나지 않는 소. 워낭을 떼어놓음과 거의 동시에 숨을 놓은 소를, 할아버지는 약속대로 장례를 치러 주십니다. 그리고 첩첩산중의 오랜 절, 청량사에 올라 가셔 동고동락한 늙은소의 왕생을 빕니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출연진은 역할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리고 인간이든 축생이든 모두가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ㅎ게 합니다. 영화(榮華)든 오욕이든, 깨치지 못한 중생의 삶은 언제나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그리고 그러한 것을 모르고, 괜스리 누가 가엾다느니 누가 행복하다느니 그렇게 스스로 생각을 짓고 살고 있을 뿐...

 

 

또한 우주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중생의 슬픔이 없을 수가 없는 법. 우주는 중생의 아픔 속에 성장하니, 중생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중생의 삶. 그 아프고 슬픈 자화상이 그려진 영화, ‘워낭소리’였습니다.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 다른 건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 당신이 편지를 시작하며 썼던 그 한마디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뒤 벌써 셀 수 없이 많은 봄이 들판의 냉이꽃을 피우고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냉이꽃을 보며 나는 집을 나와 계절이 바뀌는 철길을 따라 끝없이 걷곤 합니다. 문득 지난가을 벗들과 어울려 찾아갔던 산수유 마을의 정경이 떠오르는군요. 지천으로 매달려 있던 산수유 붉은 열매를 보석인 양 바라보며 당신이 보냈던 그 편지를 생각했습니다.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세월이 가도 사랑은 그렇게 가슴에 따뜻한 그림 하나 남기는가 봅니다. 김재진의 "먼산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중에서 ----------------------------------------------- 겨우내 얼어있던 땅속에서도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된 봄입니다 3월 하면 무언가 좋은 일들이 있을 것같고 희망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 그런 달입니다 그 느낌처럼 파릇파릇 희망적인 일들이 님들의 가정에 살며시 찾아들길 바라며 3월의 안부를 전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평안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