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향상을 알수 있는 방법은?

2009. 3. 9. 09:1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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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1) 가정에서 매일 작정하고 수양 실행 했을때 공부의 향상을 알수 있는 방법은 어떤것이 있나요.

 

(답-1) 공부도 시작하기 전에 잘 될지 못 될지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걱정같습니다만 일방적으로 생각하면 대단히 필요한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공부가 잘되나 못되나를 알고자 하기 전에 먼저 공부를 잘하나,

잘하지 못하나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한다」는 말은 원인을 말하는 것이요「된다」는 말은 결과를 것이니 잘하면 잘될것이요, 못하면 못될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잘한다는 것은 옳은 방법으로써 바르게 잘한다는 뜻이니

만일 옳지 못한 방법으로써 바르지 못하게 잘한다고 하면 그 결과는 잘하면 잘할수록 더욱 나빠지고 잘못된 것을 고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보통 말하기를 잘안다(선지善知). 잘한다(선행善行)는 말은 선지와 선행이라는 뜻이지만 반드시 좋은 일이요 착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선지와 선행으로 잘했다는 일이 나쁜 영향과 나쁜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행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은 사람의 지혜와 판단력이 부족한 까닭으로 시비선악을 잘 분간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잘못한다는 의미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정법에 의하여 옳은 방법으로 바르게 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수도에 삼난(三難)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조기난(早期難)이니 젊어서 일찌기 수도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젊었을 때는 혈기방장하여 세욕에 애착이 심한 까닭에 수도심이 박약하므로 허송세월하다가, 노년에 당하여 수도에 힘쓰고자 하면 정신이 혼미하고 신체가 쇠약하여 정진의 힘을 낼 수 없으니 그러므로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 하여 청년시대의 독공(篤功)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기난(大器難)이니 큰 그릇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큰 그릇이라는 말은 육신이 크다는 말이 아니요, 정신 즉 마음 그릇이 크다는 말이니 마음의 자체는 본래 대소가 없지마는 사람에 따라서 국량이 깊고 큰 자도 있으며 소견이 좁고 얕은 자가 있음은 곧 마음그릇의 대소 즉 용심하에 따라서 차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기(志氣)가 고상(高尙)하고 심지(心志)가 바르며 의지가 태산과 같이 부동하는 대인의 심성을 가진 자라야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선천적으로 위대한 성격을 가진 자도 있으나 후천적 수양으로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택사난(擇師難)이니 공부하는 데 제일 곤란한 것이 스승을 잘 만나고 못 만나는 데 성공여부가 달린 까닭입니다.

 

자고로 학업성공이 전혀 스승의 지도에 달려 있는 까닭에 스승의 은혜를 부모의 은혜와 같이 알며 공경하는 것이니 하물며 대도를 성취함에 있어서 스승의 은혜는 생명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는 법맥상전(法脈相傳)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대한 책임으로써

엄중한 선택을 요하게 되므로 법인을 주고 받는 사제의 관계는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중대한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바른 법을 알기위하여, 잘 지키기 위하여, 잘 행하기 위하여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이 한량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공부가 잘 되도록 힘쓰려고 하면 먼저 정도(正道)를 정지(正知)하여 정행으로 정정진을 해야만 정과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말로는 쉽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심히 어려운 까닭에 생사를 초월한 대용맹과 대결심을 갖지 않고는 도저히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정신과 방법으로써 수양(修養)에 전심하여 일취월장으로 진행하게 된다면 그 수양하는 성적의 결과는 다음에 몇 가지 방법으로써 스스로 증험하여 알게 되며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자연히 판명이 될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자아自我)를 알게 됩니다. 과연 내가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내가 나를 인식하고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면서도 내가 내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수수께끼와 같은 우스운 문제라고만 생각해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요 인생의 가치를 몰각(沒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가장 중대한 나라는 문제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세상일은 전부 저 혼자만 아는 것 같이 자기의 의견만 고집하고 주장하니 참으로 망상이요 착각이요 모순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자기의 중대한 인생관의 나라는 것은 무슨 방법으로써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보편적 학문의 지식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불타의 교리에 의하여 자기의 심성을 수양하므로써 얻은 자각의 지혜로만 확철대오한 참나(진아眞我)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양하는 정도에 따라서 자각하는 지혜가 점차로 밝아지고, 지혜가 밝아지는 정도에 따라서 나라는 정체와 진상이 점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그러면 나라는 것은 대관절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하면,

 

나(我)

육체(肉體)-생리적 조직(生理的)(안. 이. 비. 설. 신과 피육. 근골 등 사대로 조직)

정신(精神)-심리적 작용(心理的 作用)(수. 상. 행. 식과 지. 정. 의의 심리적 작용)

 

이상과 같이 원래 나라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결합하여 된 것인데 정신은 사람의 심리적 작용을 말하는 것이요 육체는 생리적 조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 나를 볼 수가 있지마는 정신적 나는 보기가 어려우며,

생리적으로는 자기 육체가 병드고 쇠약하여 가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자기의 정신이 병들고 썩어가는 것은 슬퍼할 줄을 모르니

이것은 보통 우리가 육체의 나를 나라고만 생각하고 정신의 나는 잊어버린 까닭에서 나온 자기의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정신수양이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주신 좋은 약을 먹고 정신의 병을 고친 후에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 즉 완전한 인격자가 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병을 고치게 되면 심성이 자연히 밝아지게 되고 심성이 밝아짐에 따라서 마음의 체상이 점점 커지고 넓어지는 것을 알게 되며,

마음의 용도가 더욱더욱 확대해지고 발전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흡사 우리의 육체가 발육됨에 따라서 어린아이가 소년으로 청년으로 장년으로 점점 성장해 가는 것과 같이, 우리의 정신도 수양함에 따라서 소아에서 무아로,

무아에서 대아로, 대아에서 진아를 발견하는 경계에까지 심아(心我마음의 나)가 확대되고 발전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육체의 발육성장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정신의 향상 발전도 마음의 눈으로 볼 줄을 알게 되는 것이 약을 먹은 효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체성과 형상과 작용은 어떠하며 그 발전되는 형태는 어떠한가를 다음에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마음의 체성은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은 그 당체가 공허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이 허공입니다.

없는 것이 있다고 하면 말에 모순이 된는 것과 같이 생각이 되지마는 사실상 허공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요 없으면서도 있다고 할 수 있는 수수께끼 풀이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언제까지나 있게 될런지 시와 종을 알 수가 없으며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무엇으로써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인증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허공은 분명히 있습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像)은 물론 나의 일신(一身)까지라도 허공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으니

허공은 분명히 있으면서도 있는 것이 아니요 없으면서오 없는 것이 아니라는 유비유 무비무(有非有 無非無)의 이치로써 해득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체성도 허공성과 같이 시종이 없고 변제(邊際 갓)가 없으며

담연상적(湛然常寂)하여 한 물건도 없이 허공한 까닭에 모든 이치와 지혜를 갖추고 있으며 생멸이 없고 구정(垢淨)이 없고 증감이 없고 취사(取捨)가 없으므로 한 법(法)도 얻어 볼 수가 없는 것이 마음의 체성입니다.

 

둘째, 마음의 형상(形狀)은 어떠한가. 어떠한 형상과 모양으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의 형상입니다.

그 형상이 푸르기만 하다면 붉은 빛 누런 빛과 같은 다른 빛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여 그 모양이 둥굴기만 하든지 모나기만 하다고 하면 그 밖에 모든 모양과 형상은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형상은 무형무색하여 일정한 형상을 갖지 않았으므로 청황적백과 방원장단의 천태만상(靑黃赤白과 方圓長短의 千態萬像)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인이 말씀하기를 천상천하에 심지무적(尋之無跡)이라 백초두상에 역력가견(百草頭上에 歷歷可見)이라고 하였으니천상천하에 두루 다니며 마음의 형상을 찾아 보아도 자체가 없더니 일백 가지 풀 머리에서 역력히 볼 수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형상은 주관적 심리(心理)만으로는 볼 수가 없고 객관적 사물에 비추어 비로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마음의 작용은 어떠한가. 원래 마음의 자체가 공허하고 일정한 형상이 없으므로 마음의 자용도 역시 고정불변하여 일정한 것이 아니요 시시각각으로 천변만화의 심리적 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물을 접촉할 때에는 안. 이. 비. 설. 신이라는 다섯 가지 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이게 되며 받아들인 것을 생각해 보게 되며 생각해 본 결과에는 행하게 되며 행해본 결과에는 우리의 지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이라는 순서로써 얻은 바 우리의 지식은 단순한 감각적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서 지각적 심리로는 진가를 구별하고 분석하되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찾고자 하는 학술적 지식이 발달이 되고 정적 심리로는 미(美)와 추(醜)를 가리고, 낙과 고를 분별하여 추한 것과 괴로운 것은 버리고 아름다운 것과 즐거운것을 구하려는 예술적 감정이 발달이 되며,

의지적 심리로는 시비와 선악을 분별하여 그른 것과 악한 것은 버리고 옳은 것과 착한 것을 선택하려는 도덕적 의지가 발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 미. 선(眞. 美. 善)을 구하려는 지. 정. 의(知. 情. 意)의 심리적 작용은

종교. 철학. 과학. 문학. 예술 등 각 방면으로 연구하여 정신의 향상과 생활의 행복을 얻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구하는 바가 뜻과 같지 않으므로 여러 가지 번민과 고통을 당하게 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뜻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은 일층 더 무서운 탐. 진. 치 삼독심으로 변하여 갖은 죄악을 짓게 되며 십악과 팔사를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어서 심성수양의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니 마음의 자체가 공한 것이요, 아무 형상이 없다는 심성의 근본을 밝혀 보게 되며 자연히 번뇌망상을 일으켜 갖은 죄악을 지어가며 스스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죄악을 참회하고 오계와 십선을 닦으며 삼학과 팔정도를 수행하게 되면 수행하는 정도에 따라서 심아(心我 정신精神의 나)가 점점 향상 발전이 되어 소아에서 무아로 대아로 진아의 경계에 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현공 윤주일대법사 설법자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