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생활불교란 무엇을 뜻하는가

2009. 3. 10. 00: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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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생활불교란 무엇을 뜻하는가?
- 사회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
채장식 기자, 2009-03-04 오전 09:46:21  
 

생활종교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사회 전반에 걸려 가히 종교의 천국답게 많은 신앙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비판을 하지만 종교는 비판으로 될 사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와 닿고 생각이 따라가면 그 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것보다는 사회와 더불어 존재하는 종교가 바로 생활종교가 아닌가 합니다.

불교계에도 생활불교라는 말들이 태어나고 범 불교계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생활불교라는 의미는 몇 가지가 있지만 우선 중생과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아픔을 함께 걸머지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찾아보겠습니다.

천주교는 1965년 전라 광주에서 생활종교로 거듭 태어남을 선포하여 지금까지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민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데 그 의미를 찾아야할 것입니다. 민중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은 예배당을 중심으로 성직자가 민중의 생활 현장에 뛰어 들어가 생노병사를 함께 실천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실례를 들면 임종을 맞이한 주민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면 모든 절차는 성직자와 신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전국적으로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지난 IMF때에는 잘 보이지 않는 예배당 한쪽에 단지를 하나두어 있는 신도는 절미를 하여 갖다 놓으면 필요한 사람은 필요한 만큼 가지고 가서 연명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가져다 놓는지 누가 가지고 가는지를 몰라 붙여진 이름이 “주인없는 쌀단지”였습니다.

또 호스피스 제도를 두어 질병으로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을 곁에서 지켜주는 일입니다. 신도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이 제도는 세계적으로도 소개가 될 정도로 정성을 하다고 있습니다.

종교가 민중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차별이나 규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관습과 풍습을 존중하고 민중의 생각 높이에 맞춰 편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가식(假飾)이 있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불교의 홍교를 위하여 도시에 많은 포교당이 들어서고 인법당이 자리를 잡았으나 발전의 힘을 나타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유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홍교를 위해서는 기다리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법당이지만 중생이 편안하면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24시간 개방된 종교시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단차원에서 체계적인 계획과 재정적 지원이 과감히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불교인식으로 불교를 빙자한 여러 가지 행태의 업종이 자리를 잡는 것도 문제입니다. 간단한 불교의식으로 불교를 홍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주위를 바라보면 불교의 만(卍)자가 들어가 있는 간판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나 붙이면 되는 줄 알지만 이는 부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로써 불법이 낮추어지고 종교가 매도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홍교는 성직자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른 종교에서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종교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직자가 있습니다.
돈이 들어가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말”입니다.
말로 가슴을 녹여주고 행동으로 감싸 안으면 최고의 종교라고 칭찬을 할 것입니다.

나눔의 문화는 우리 고유의 풍습입니다.
이를 활용하여 홍교에 접목을 한다면 어떤 어려움에 처한 종교도 회생할 것입니다.
성직자에게 돌아가는 노후보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보장되어야 합니다.
한판 싸우고 먹고 살기 위하여 인법당을 차린다고 중생이 저절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의 마음이 열렸을 때 비로소 찾아가는 것입니다.

불교가 생활종교로 주장하는 것 중에는 조석예불 수행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생활여건 상 출퇴근 시간의 문제와 바쁜 일과 속에서 불자로서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져야 되느냐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명확한 수행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간나면 절에나 가면 되지” 이런 분위기가 현실입니다.
찾아오는 불교가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자들은 방황을 하게 됩니다.
스님은 조석예불을 드리면 그만이지만 중생은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중생의 현실을 외면하고 스님만 수행하는 불교라면 아무리 2천만 불자하고 외친들 한 낱 숫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생의 생활 속에 들어가 생노병사를 함께하는 불교가 되었을 때 생활불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만든 납골당이 불자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지는 않는지 또 장묘문화의 개선으로 수목장이 시행되고 있지만 부담은 없는지도 살펴야할 문제인 것입니다.
가사장삼을 바라보는 중생의 가슴 속에 저절로 존경과 감사의 예(禮)가 우러나오면 불교는 민중과 같이 숨 쉬는 종교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들어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어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나누어 주어라.


- 마더 데레사의 시 '그래도 사랑하라'에서 -


* 사람들은 말합니다.
뜨거우면 너무 뜨겁다고 말하고,
조금만 식으면 차갑다고 말합니다.
부드러우면 좀 더 강해지라고 말하고,
강한 면모를 보이면 더 부드러워지라고 말합니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완벽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완벽하면 너무 완벽해서 무섭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