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제10분) 장엄정토분

2009. 4. 28. 07: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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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제10분) 해설 / 정토를 장엄하다. (第十 莊嚴淨土分) 佛 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불 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석재연등불소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어법 유소득부 불야 세존 여래 재연등불소 於法 實無所得 어법 실무소득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 불야 세존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 爲大不 須菩提 言 甚大 世尊 何以故 위대부 수보리 언 심대 세존 하이고 佛說非身 是名大身 불설비신 시명대신 정토(淨土)란 불교가 꿈꾸는 이상 세계(理想 世界)인 부처님 세계입니다. 이러한 정토를 장엄(莊嚴)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커다란 사원을 곳곳에 세우고 화려한 불상을 많이 만들어 거리에다 늘어 놓아야 우리가 바라는 불국토 건설이 된다고 보장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국민 모두 모두가 경을 보란 듯이 들고 큰 소리로 부처님을 부르고 다닌다고 저절로 정토가 약속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이 진정한 불국 정토가 되려면 보살이 많아야 합니다. 그것도 반야바라밀 실행자가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연기(緣起)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고,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보살들이 마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 이 세상은 정화되는 것입 니다. 정화했어되 정화했다는 마음조차 없는 그 마음이 되었을때 우리들 세상은 아름다운 불국토(佛國土)가 장엄하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佛 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불 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석재연등불소 於法 有所得不 不也니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어법 유소득부 불야 세존 여래 재연등불소 於法 實無所得 어법 실무소득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생각하는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얻은 것이 있는냐." "이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실로 얻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금생(今生)의 수행을 반야의 안목에서 살펴보았는데 더 나아가 부처님의 과거 수행까지도 반야의 거울에 놓고 봅니다. 수보리 는 보지도 못한 부처님의 과거 일임에도 불구하고 실로 얻은 것이 없다고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부처님과 제자 수보리는 진실로 이심전심(以心傳心) 을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진실로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으로 계합된 것 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불 회상에서 수기(授記)를 받았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 아주 오랜 세월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살로 있으면서 수행을 할 때 그 당시의 부처님이신 연등(燃燈) 부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뵈오러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연등불께서 지나갈 자리에 흥건하게 물이 고여 진흙이 질퍽 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엎드려 머리를 풀어 가지고 진흙을 덮어 연등불께서 젖지않고 지나갈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갸륵한 보살행을 보고서 연등불이 수기를 주셨습니다. "그대는 깨달은 성자를 위하는 그 보살행으로 해서 장차 석가족에 태어나 출가 성도 하여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은 매우 희기적이고도 대단한 자부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등불 회상에서 수기 받은 것도 참지혜의 안목에서 보면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토록 그 당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 즉 깨달음, 설법, 『금강경』 수행의 열매, 수보리의 수행, 심지어 부처님 의 과거 수행까지 모든 것을 철저하게 상을 제거해 갑니다. 여기서 또 한번 우리의 경안(經眼)을 열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부처님의 명호가 연등불(燃燈佛)입니다. '등불을 켜신 부처님' 이라는 뜻입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승은 바로 등불을 켠 부처 라는 것입니다. 이 등불은 과연 무슨 등불이겠습니까. 결국 지혜고 반야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만 뚫리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지혜의 등불을 밝혔을때에는 바로 부처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른 부처님의 명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락세계가 성취되게한 아미타 부처님은 ' 무량광(無量光)' 부처님입니다. 한량 없는 빛, 지혜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 인해 밝은 눈이 생기면 부처가 될 뿐만 아니라 극락 세계(極樂 世界)도 바로 뚫린다는 것입니다. 또,『화엄경』의 주된 부처님인 비로자나 부처님은 바로 '광명변조(光明 邊照) 부처님', '대일 여래(大日 如來)'입니다. 광명이 두루 비추인다는 뜻이며 동시에 거대한 태양과 같은 빛덩어리의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에도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이 이만 번이나 반복하여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전 곳곳에서 밝은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만 있으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보고 자기 인생에서 이익이 되는 것만 집어 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야의 밝은 지혜만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고 화장 장엄 세계도 펼쳐지고 극락 세계도 곧바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이렇게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면 더욱 더 바르고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연등불이 몇천 년 전의 부처님이고 어느 지방에서 교화하였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승이니 더 훌륭하겠네, 그러니 조각으로 만들어 모셔야겠네 등 중요하지 않는 말에 쫓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자에게 돌을 던지면 돌보다는 사람을 쫓아오고, 삽살개는 돌을 쫒아가는 법입니다. 그래서 '의의불의어(依義不依語)'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순수한 신앙에다 이런 올바른 안목을 가진다면 가장 바람직한 불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4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다가 그동안 계속하여 부처님의 성도(成道)와 교화(敎化)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여기서 마음을 머무르는 문제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들도 긴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새어 나갔다가 "무슨 이야기 하려고 했지?" 하면서 본 줄기를 찾는 것처럼 다시 한번 마음을 머무르는 문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청정(淸淨)한 마음이란 바로 텅 빈 마음,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마음, 거울과 같은 마음입니다. 사상(四相)과 선악 시비(善惡 是非)를 모두 다 떠나 보낸 수승한 마음 입니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이나 육진 경계에 머물러 주착하여 마음을 내어서는 그 마음밖에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 머문다는 것은 바로 상(相)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상이 있으니까 머물게 됩니다. 상이 없다면 머물러지지 않습니다.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상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위의 온갖 물질이나 현상, 감정에 치우쳐 살아가는데 우리들이 믿는 만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무심히 안 넘기고 전부 다 보고 생각을 붙이고 시비를 걸어서 스스로 상처받고 가슴아파합니다. 거울이 온갖 사물을 비추지만 애착(愛着)이나 의지(意志)를 갖고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예쁜 사람이고 거부 장자라 하여 더많이 비추어 주고, 못났고 비천하다 하여 적게 비춰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서 있을 동안 무심히 비출 뿐입니다. 꽃이 오면 꽃을 그대로 비추어 주고 꽃이 가 버리면 가 버리는 대로 또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이 청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컴컴하거나 거울에 때와 먼지가 쌓여 있다면 가까이 오는 것을 비추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그 어떤 것에 집착을 해 있다면 먼지가 쌓인 거울처럼 지혜가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 떠 오르는 바이고 어제 오늘의 태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생달이면 초생달 만큼만 반달이면 반달만큼만 보름달이면 보름달만큼 빛을 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엔가 머물러 고정 관념을 갖고 살아갈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맞게 슬기를 발휘하여 언제나 적극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不應住色生心)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응당 머문 바 없이 (應無所住) 그 마음을 낼지니라.(而生其心) " 이 구절은 제 2사구게로서 육조 혜능(慧能)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육조 스님이 낫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시절, 나무를 팔아 홀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어렵게 꾸려갔습니다. 어느 날 손님에게 나무를 배달하고 복도를 걸어나오다 어느 스님이 방 안에서 『금강경』 중 바로 이 대목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그것이 견성(見成)인지 성불(成佛)인지 육조 스님 자신은 그 말조차 몰랐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스님의 소개로 황매산으로 가서 오조홍인 대사를 찾아 뵙고 거기서 더욱 『금강경』에 정진하여 마음밭을 활짝 일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사와 발우를 전수받아 우리가 아는 육조 혜능대사가 탄생한 것 입니다. 그 뒤부터 더욱더 『금강경』이 선종(禪宗)의 소의 경전(所依 經典)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일화 오엽(一花 五葉)'이라 하여 육조 스님 밑의 우수한 제자들에 의해 선(禪)의 오종 가풍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항상 육조 스님의 일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 爲大不 須菩提 言 甚大 世尊 何以故 위대부 수보리 언 심대 세존 하이고 佛說非身 是名大身 불설비신 시명대신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몸이 큰 수미산만 하다면 어떻게 생각 하는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실 작은 것을 부정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것, 또 억만장자 같은 살림살이를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미산 같은 몸뚱이를 가져다가 붙여 큰 것을 더욱 강조합니다. 수미산만한 몸이니 왕(王)자까지 붙여 큰 것을 더욱 강조합니다. 수미산 만한 몸이니 당연히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매우 큽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익혀온 바로는 아무리 몸이 수미산만큼 크다고 해도 역시 한계가 있고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몸 아닌 것'은 유루의 몸, 즉 육신이라는 제한이 있는 것이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계가 없이 무한히 큰 몸이기 때문에 온 우주에 변만(邊滿)해 있으므로 실로 그 몸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으로 된 것이 아닌 마음의 몸인 까닭에 상이 없고 툭 트였으므로 진실로 큰 몸이라 이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한히 깊고 큰 마음의 몸이 참으로 큰 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사원을 크게 짓고 요란하게 장식을 하고 불상을 천만 개씩 만들어 늘여 놓고서는 예배를 올리는 그런 장엄이 아니고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 마음의 몸으로 시원하고 크게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너무나 그리워질 때
       
       
      보고싶은만큼 나도 그러하다네
      하지만 두 눈으로 보는것만이 다는 아니라네.
      마음으로 보고
      영혼으로 감응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함께일 수 있다네.
       
      곁에 있는다는것은
      현실이 내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한 하늘아래,저 달빛을 마주보며
      함께 한 호흡을하며 살고 있다네.

      마음안에는 늘 항상 함께 라네.
      그리하여 이밤에도 나는 한 사람에게 글을 띄우네.
      그리움을 마주보며 함께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네.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보고싶다고 욕심을 가지지 마세.
      내 작은 소유욕으로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그의 마음을 보살펴 주세.

      한 사람이 아닌
      이 세상을 이 우주를 끌어 안을 수 있는 욕심을 가지세.
      타인에게서 이세상과 아름다운 우주를 얻으려 마세.
      내안에 두 눈과 마음문을 활짝 열고
      내안에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내 우주를 들여다 보게.

      그것은... 그것은 두 눈에 보이는 저 하늘과 같다는 것을
      이 우주와 같다는 것을 깨달게 될걸세.
       
      그안에 이미 내 사랑하는 타인도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더이상 가슴 아파 할것 없다네.
       
      내 안에 그가 살고 있으니.
      내 우주와 그의 우주가 이미 하나이니.
      타인은 더이상 타인이 아니라네.
      더이상 바랄게 없다네.
       
      주어도 아낌이 없이 내게 주듯이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한 마음으로
       
      어차피,어차피 사랑하는것 조차,
      그리워하고,기다려지고,애타해하고
      타인에게 건네는 정성까지도.
      내가 좋아서 하는일 아닌가.

      결국 내 의지에서 나를 위한것이 아닌가
      가지려하면, 가지려하면 더더욱 가질 수 없고.
      내 안에서 찾으려 노력하면 가지게 되는것을

      마음에 새겨 놓게나.
      그가 내게 관심이 없다해도.
      내 사랑에 아무런 답변이 없다해도.
      내 얼굴을 바라 보기도 싫다 해도.
      그러다가 나를 잊었다 해도.
       차라리 나를 잊은 내안의 나를 그리워하세.
       
      원성스님

       

      명상음악;인연의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