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의 용맹정진법

2009. 7. 17. 21: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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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들의 용맹정진법



   서울 전등사 前 회주 해안 스님 - ‘크게 한번 죽는(大死一番)’ 용맹심이 절대적

 
서울 전등사 전 회주 해안 스님.

‘7일 안에 깨우치라’, 사람들은 정진을 오래 해야만 깨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견성은 단시일을 두고 결정내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은 아무리 미련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7일이면 도를 성취한다고 했다. 만일 7일안에 깨치지 못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공부하는 사람의 정신자세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기간이 짧아서 깨치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나 깨나 화두가 성성적적한 일여(一如)의 경지가 되면 1주일 안에도 화두가 타파된다. 수행자는 오직 화두 일념에 사로잡혀 옆에서 뇌성벽력이 쳐도 듣지 못해야 하고, 찬 바람이 뼈 속에 스며들어도 추운 것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정작 생명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그리하지 못한다. 때문에 부처기 되려면 ‘크게 한번 죽는(大死一番)’ 용맹심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부처가 되려면 한번 죽어야 한다. 눈도, 귀도, 입도 죽어야 한다. 단 7일간이니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해도 아주 죽지는 않다. 죽기로써 대들어야 영원한 살 길이 열리지 어설피 살려고 버둥대면 오히려 죽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 결심으로 한다면 7일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요, 생사 일대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용맹으로 정진하면 성스러운 지혜 얻을 수 있다”
<불본행집경>에서 본 부처님의 성도
 
양산 통도사가 소장한 팔상도에 표현된 부처님 성도의 모습.

보리수나무에서 마군 파순의 항복을 받고 깨달음을 성취하는 싯타르타의 성도 모습은 ‘드라마틱’하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다룬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보살항마품 상에 따르면, “하늘 마군의 군사들이 모여 곳곳에 북을 치고 땅을 흔들었다. 또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뿌리채 뽑아 던졌다. 하지만 싯타르타는 놀라지도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파순은 원한만 더했다.”

싯타르타는 온갖 방해에도 마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경전은 이렇게 묘사한다. “마왕의 항복을 받자 대지는 진동했고, 대성의 빛은 널리 비췄다. 하늘과 땅이 열려 허공에 만다라 등의 가지가지 꽃비가 내렸다”고 표현한다.

이에 깨달음을 얻은 싯타르타는 성무상도품(成無上道品)에서 “지난 옛적 지은 공덕의 이익으로 마음에 생각한 것이 다 이뤄졌다. 또 선정의 마음을 증득해 열반의 언덕에 이르렀다. 만약 용맹으로 정진해 성스러운 지혜를 구한다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이미 모든 괴로움을 끝까지 다 없애고 일체 모든 죄를 다 멸했다”고 게송을 읊었다.

6년의 긴 고행, 그 구도여정에 마침표를 찍고 싯다르타께서 부처님이 되신 성도절(成道節). 1월 17일(음 12월 8일)은 싯다르타께서 스스로 중생의 옷을 벗고, ‘부처의 법의(法衣)’를 갈아입은 날이다. 치열한 자기수행 끝에 깨달음을 선언한 기념일이기도 하다.

그럼 성도절은 불자들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줄까? 메시지는 분명하다. ‘너도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또 성불을 향한 ‘자기다짐’의 동기 부여다. 때문에 성도절은 불자들에게 용맹정진의 강렬한 분발심을 일으킨다. 불자들은 전국 사찰 및 시민선방에서 짧게는 3일, 길게는 1주일간 용맹정진에 들어간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다.

성도절을 맞아 큰 스님들의 말씀하시는 용맹정진법을 간추려 봤다. 이 시대를 살고, 살다간 성철, 법전, 청화, 원담, 해안 스님. 이 큰 스님들의 법문에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봤다.



조계종 前 종정 성철 스님
下心 등의 수도팔계(修道八戒) 강조

전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철석같은 의지와 서릿발 같은 결심이 용맹정진법의 핵심이다. 혼자서 만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듯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는다는 각오로 스스로를 새롭게 해야 한다.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각오로 정진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바로 ‘수도팔계(修道八戒)’다. 첫째로 절속(絶俗)으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세속을 끊어야 한다. 때문에 인정(人情)은 부처가 되는 데 원수다. 인정이 농후하면 도심(道心)이 성글어진다. 둘째가 금욕이다. 욕정을 끊지 못하고 도를 닦겠다는 것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셋째로 대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칭찬과 숭배는 나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것이다. 무서워해야 한다. 넷째가 하심(下心)이다. 좋고 빛나는 일은 남에게 돌리고 욕된 것은 내가 뒤집어쓰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항상 나의 허물, 잘못을 보고 마음을 더욱 낮춰야 한다.

다섯째는 정진이다. 수행은 부처가 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화두 일념이 돼야 한다. 다름이 고행이다. 수행자의 병 가운데 가장 큰 병이 게으름 병이다. 정진을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고행이다. 일곱째는 참회다. 일체중생의 잘못은 모두 나의 잘못이니 매일 백팔참회를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타행(利他行)이다. 결국 수행의 목적은 마음으로 물질적으로 남에게 봉사해야 한다.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마음을 내라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백천간두에서 진일보할 수 있는 마음이 용맹정진의 자세다. 칼날 위를 걷고 살얼음을 타고 계단이나 사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절벽 위에서 갑자기 손을 놓아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바로 그 것이다. 벼랑에서 손을 놓아 버려야 그 자리에서 살길이 생긴다. 일체의 집착, 자신과 자신의 생명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또 용맹정진을 제대로 하는 방법이 두타행이다. 법을 위해 몸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 앞에서 한쪽을 팔을 자른 것도, 자명 스님이 송곳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른 것도, 혜통 화상이 간절한 마음으로 생사의 일대사를 밝히고 불조 혜명을 이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조계종 前 원로의원 청화 스님
묵언과 하루 한 끼로 용맹정진
생각을 부처의 마음에 간단없이 밀어붙여라

전 조계종 원로의원 청화 스님.
용맹정진은 집중적으로 간단없이 번뇌를 공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할 때, 했다가 쉬었다 하면 잠재의식이 또 나오게 돼 망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낮에는 그런대로 괜찮다가도 밤에 잠잘 때는 꿈속에서 잠재의식의 발동돼 이상야릇한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생놀음이다. 그래서 용맹정진을 하는 것이다.

용맹정진은 화두나 염불, 혹은 주문을 통해 오직 부처님께 지향하는 마음을 순간 찰나도 쉬지 않고 지속시키는 수행법이다. 입으로는 먹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부처님, 즉 본체를 지향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용맹정진 기간 동안에는 원칙적으로 묵언을 지켜야 한다. 말을 하면 개념이 나온다. 개념이 발동되기에 분별시비가 있게 된다. 따라서 말을 안 한다. 식사 또한 하루 한 끼를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 생각을 부처님 마음에다 딱 머물게 해서 간단없이 밀어붙인다. 그렇게 정진할 때 비로소 우주본체의 진여불성 자리가 훤히 앞에 나오게 된다. 그러면 자기 마음과 몸이 온전히 그 광명과 하나가 돼 버린다. 그러면 자기라는 생각도 초월해 버린다.

구체적인 용맹정진법은 참선이다. 참선을 잘하면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미운 사람, 좋은 사람도 없어진다. 우리 마음은 나다 너다 좋다 궂다 시비를 천지우주의 순수 에너지인 부처님만을 생각하는 것이 참선하는 마음 자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고 염불도 그 자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 자리는 훤히 빛나는 자리다. 행복도 지혜도 자비도 능력도 원만히 갖춘 무한의 공덕과 가능성을 입력한 컴퓨터, 이것이 우리 마음이다. 그 자리를 계발하는 데 가장 요령 있고 쉽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참선이다.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석가여래가 별보는 그놈을 봤듯, 화두드는 그 놈을 봐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석가모니 부처가 도를 통한 까닭이 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별을 보는 놈, ‘별을 보는 놈’ 여기에 있다. 석가모니가 본 것은 별이 아니다. 바로 별을 보는 놈을 봤다. 분명히 이것은 내가 비록 지옥으로 화살같이 가는 구업을 짓는다고 해도 다시 이보다 가깝게 할 말은 없다. 석가여래가 별을 본 것이 아니고, 별 보는 놈을 봤다.

그래서 별로 인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문득 꿈을 돌이킨 것이다. 꿈이라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그게 꿈이라고 하는 거다. 마치 한 장군이 지혜를 발휘해 사막 한 가운데 목마른 백만대병의 갈증을 한번에 해결한 것과 같은 이치다. 매화의 신맛을 상기시켜 병사들의 마음에 갈증을 해갈해줬다. ‘시다’고 하는 것이 그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그럼 불교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 바로 ‘내가 불교’다. 불교라는 것은 무엇이 필요해서 믿고 닦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내 근본을 찾기 위해서 찾아 들어가는 법이 불교다. 그 이치를 깨달을 것이 바로 성도절이다. 석가여래는 반짝거리며 허공에 있는 별을 본 것이 아니다. 별을 보는 ‘놈’을 봤다. 마치 화두를 들 때, 그 화두를 쫓아가지 말고, 화두 드는 그 놈을 돌이킬 줄 알아야 한다.

참선은 생각으로써 생각을 하는 거다. 생각을 잡고 그것을 연속하는 것이 참선이 아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참선한다는 하는 생각은 생각으로써 생각이 다한 곳을 돌이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