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흥망필부유책天下興亡匹夫有責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데에는 한낱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고증학으로 유명한 청대의 유학자 고염무의 말이다. 천하가 융성하고 쇠퇴하고, 일어나고 망하는 데에는 한낱 밭갈고 나무를 하는 농부초자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항상 천하의 일을 염려하고 궁구하여 바른 길을 찾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시민이 스스로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그 책임을 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것이다.
히틀러가 독일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이른바 맥주홀 폭동이라고 하는 별 것 아닌 난동사건이었다. 당시 이 난동을 주도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인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가 나중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재판정에서 한 연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불평불만이나 일삼던 찌질이 백수히틀러가 비로소 독일 국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히틀러가 재판정에서 한 일장연설은 사실 별 것 아니었다. 기껏해야 바이마르 정부는 무능하고, 베르사이유 체제는 부당하며, 그렇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이리 결심을 하고 일어섰다고 하는, 참으로 상투적인 문구였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과 베르사이유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 민중들은, 심지어 재판장과 검사마저도 그 연설에 감복하여 내란죄로 체포된 그에게 고작 징역 9월을 선고하고 만다.(원래는 독일 군부가 좌파적인 바이마르 정부에 불만을 품고 히틀러를 비롯한 불평불만세력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그리고 그 9개월간의 수감생활 동안 평생을 울궈먹고도 남은 역작 "나의 투쟁Mein Kampf"를 저술한다.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독일 민중이 안고 있던 방향을 모르는 불만과 원망에 편승했기 때문이었다. 논리? 필요 없다. 근거? 필요 없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가치판단? 그런 것도 상관없다. 필요한 것은 당장 자신이 처한 불만을 배설할 수 있는 무언가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 하기보다는 누군가 무언가를 해주기만을 바라는 비겁하고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감정을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대리배설해주기만 된다. 그것이 타당하든 타당하지 않든.
그렇게 불만을 증오로 바꾸고, 원망을 증오로 바꾸어 증오하고 증오하고 증오하게 함으로써 히틀러는 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증오에 도취하게 함으로써 독일국민들의 열광어린 지지 속에 통령이 되고 총통이 되어 마침내는 독일을 지배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난 것이 2차세계대전... 도대체 몇 명이 죽어갔던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던가.
만일 당시 독일 국민들이 조금만 더 냉정했다면, 당시 독일 국민들이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그랬다면 그들은 그 끔찍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말하는 그 증오가 무엇인지, 히틀러 스스로조차 알지 못하고 떠들어대기만 하던 그 의미없는 증오가 무엇을 낳을 것인지 조금이라도 냉철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면 수많은 목숨이 스러지고, 수많은 재산과 문화재가 파괴되고, 심지어 영토마저 잃는, 그러면서도 아직까지도 주위의 경계와 의심과 비난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답답한 처지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히틀러를 선택했다. 패전이라고 하는 결과를, 베르사이유 체제가 가하는 여러 압박들을,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의 안이함을,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와 그리고 증오에 휘둘려 히틀러라고 하는 말만 번드르르한 미치광이를 선택함으로써 그들은 가장 끔찍한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의 목숨과 재산과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쟁이 끝나자 모든 책임을 나치와 히틀러에게 돌렸다. 자신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듯, 모든 것은 나치와 히틀러가 저질렀지 독일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며, 아예 나치 독일은 독일이 아니라는 듯 그들의 역사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엄밀히 말해 독일이 2차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전쟁범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한때 독일을 지배했던 독재자와 그 추종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죄를 하고 배상을 하는 것이지, 독일인 스스로에게 그 책임이 있고 따라서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선택해 놓고, 자신들이 선택한 정권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선택한 그 사실은 깡그리 잊은 채 그들이 무도하고 악랄한 독재자였음을 강조하여 독일은 독일, 나치는 나치라는 식으로 속 편하게 빠져나간 것이다. 그래서 나치 독일에 부역한 장교들이 여전히 서독 군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고,
나치 아래에서 부를 축적한 기업들 역시 전쟁 이후에도 독일 경제를 이끌어가는 지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과거사를 청산했다고 하는 것은 과연 진실성이 있는 것일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지지한 것이 뭐가 잘못인가?"라는 말을 곧잘 듣게 된다. 어느 한 쪽만이 아니다. 모든 지지자들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는다. 욕먹는 것이 싫고, 비난을 듣는 것이 싫고, 조롱당하기 싫으면 지지하지 마라. 그것을 감수해가면서까지 모든 책임을 함께 할 각오가 섰을 때 지지한다고 하라.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지지한다고 하는 기본자세다.
지금 자신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과연 그 결과에 대해 함께 책임질 수 있을 것인지, 어떠한 결과가 돌아오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자신이 있는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한 때 충동에 못이겨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될 재앙을 불러들인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볼 때다. 나는 오롯이 천하, 아니 이 나라와 이 사회의 흥망을 걸고 책임질 각오로 지금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천하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바로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잊지 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