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박사님의 법정 최후진술 전문

2009. 8. 25. 21:27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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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박사님의 법정 최후진술 전문 

 

 

 

시골피디  http://blog.daum.net/pd-diary/17201822

 

 

※ 지금 이시각 대서특필되고있는 황우석 박사 구형소식에 관심있어 이 글을 보시게 될 네티즌 여러분, 그리고 기자분들께 우선 말씀드립니다.

검찰의 4년 징역 구형은 검찰이 재판부에 요구한 말 그대로 '검찰쪽의 판단'일 뿐 헌법이 규정한 재판부의 판단이 아닙니다.

황우석 박사 변호인단은 검찰구형항목에 대해 '모두 무죄'를 변론했습니다.

그리고 법의 판단은 오는 10월19일(월) 1심 선고를 통해 내려지게 됩니다.

법조인들에 따르면 검찰과 피고인측의 판단이 유죄/무죄로 극명하게 갈리기에 검찰이 비록 4년구형을 요구한다고 해도 재판부가 무죄로 판단하면 무죄입니다. 검찰구형량은 유죄판단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2심,3심으로의 항소는 불가피해보입니다. 7~10년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이 과학자들에게 '연구'로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황우석=사기꾼' 단정짓는 글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모르시는 분이거나 아니면 사심있는 분들이기에 점잖게 타이르시거나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국민들끼리 싸울 시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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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증인에 대한 모든 심리가 끝나고 검찰이 일어나 구형문을 낭독했다.
 "이러한 일이 향후에 재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구형을 합니다. 황우석 징역 4년"
 
 그때 방청석에서 한 남자가 외쳤다. "헛소리마. 국민이 바보로 보이나?"
 황우석 박사와 변호인은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변호인의 마지막 변론이 시작되었다.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판부의 관용을 당부하는 정상참작 요건을 읽어내려갈 때였다. 

모든 과오는 줄기세포 수립을 위한 연구에의 열정에서 비롯되었고 충분히 반성하고 있으며 개인사재를 털어 연구에 사용해온 점을 참작해달라는 황우석 변호인(이봉구 변호사)는 마지막 정상참작 항목에서 잠시 낭독을 멈췄다. 울먹이고있었다.
 
 "황우석 피고인은 서울대 교수직 등 모든 것을 잃고 죽음보다 더한 절망속에서도 오로지 환자맞춤형 줄기세포 수립으로 국민에게 진 빚을 속죄하기 위해 법정과 연구실을 오가며 노력하고 있음을 살펴주십시오." 라는 대목이었다.
 
 잠시 후, 피고인 석에서 일어난 황우석 박사는 최후 진술을 시작했다. 다음은 필자가 방청석에서 속기한 황우석 박사 최후 진술 전문이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동안의 과오를 자숙하는 의미로 최후진술을 사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 피고인 3분에 대한 구형과 증언을 들으며 (제가) 아무 이야기도 없이 그대로 있다면 너무 비겁한 사람이라는 악평을 들게될까봐 조심스레 최후진술을 합니다.
 
 저는 이 사건 수사가 끝나고 (검찰에 의해) 기소된 뒤 억지로 잠이들었다가도 새벽녁이 될 때 '사기횡령'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소스라치게 잠에서 깨어나 결국 뜬 눈으로 지새우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20년간 나름대로는 금욕적인 생활과 스스로 정한 생활의 범주를 넘지 않으며 많은 노력을 했었습니다. 남들 다가는 노래방이라는 곳에도 가본 적이 없고, 아침햇살이 환히 비출때까지 잠자리에 누워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연구생활을 나눠 온 저와 저의 연구팀의 등에 '사기꾼 집단'이라는 낙인을 맞게 되면서부터 극심한 고통과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63일 동안 서울지방 검찰청 1235호실에서 8명의 검사님과 수십명의 수사관들에게 심문을 당할 때, 그 이후 약 3년에 걸친 재판과정을 겪어오면서, '왜 수사 또는 재판 과정에 있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이해와 동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체가 저의 운명이고 이 세상에서의 수행과 수양과정이자, 제가 그토록 꿈꾸던 과학도로서의 자세에 다가가지 않을까 다름대로 생각해봅니다.
 
 오늘 저 자신에 대한 변명보다 상 피고인들에 대한 저의 소회를 말하고자 합니다.
 
 먼저 장상식 피고인....제가 오늘 맞고있는 중압감과 고통보다도 장상식 피고인이 법정에 저렇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에게는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안규리 교수의 소개를 받아 장원장을 뵈었을 때 흔쾌히 (연구용 난자제공을) 도와주겠다는 한 말씀에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난자제공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마치 빚 받아가듯이 또박또박 받아가던 어느 분과는 다르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2005년 1월까지만 해도 저는 장 원장님이 자발적 난자기증을 해주신 분들께 개인 사재를 털어 어느만큼의 시술비를 감면해주셨는지 몰랐습니다. 2005년 3월에 이르러 (장원장님) 개인의 비용이 어느 정도 들어가느냐고 여쭤봤더니 이러저러하다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도 (제가) 과배란 주사만이라도 공급해드리겠노라 말씀드렸더니 장원장님은 '됐다'고 거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원장님께서 저에게 '모든 힘을 다할테니 (난자제공이) 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을 달라'고 요청해오셨습니다.

 

저는 그 뒤 의사로서 법학을 다시 공부해 법대교수가 된 당시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위원이시던 정규원 교수님을 수차례 만나 법적 자문을 구했습니다. 일주일 뒤 그 분께서 (당시 방식이) 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장원장님께 그대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만일 검찰의 구형을 받아들이시어 장상식 원장께 탓하실 것이 있으시다면 (그것을) 저에게 몰아주십시요. (당시) 장상식 원장님의 행위는 널리 알려지고 칭송받을 일이지 범법자 낙인찍힐 일이 아니라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강성근 교수....가슴 아픕니다. 강성근 교수는 원래 저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총장께서 국제연구를 잘하기위해 너의 연구실에 교수를 1명 더 뽑을 수 있는 T.O 를 주겠다고 하셨을때 총장께 저는 저의 제자가 아닌 국제연구를 잘 할 수 있는 훌륭한 전문가를 영입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후 이병천 교수와 상의해, 이병천 교수의 고등학교 후배인 강성근이 좋겠다고 해서 (당시) 여러 명 대기하던 저의 제자들을 뒤로 하고 강 교수를 신규 교수로 채용했습니다. 강교수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 성실성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만일 그 때 제가 강교수를 뽑지 않았더라면 강 교수는 (아마) 이 불행한 사태를 접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몇 달전 강교수가 입원해 수술을 받은(강성근 전교수는 사태 이후 위암초기로 판명, 수술받았음) 삼성병원에 (제가) 병문안을 갔을 때 저를 붙잡고 강교수의 부인은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저도 23년 전 간암으로 한쪽 간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던지라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이러한 강 교수에게 법의 온정을 베풀어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윤현수 교수...훌륭한 사람입니다. 모교의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던 윤 교수를 위해 제가 당시 한양대 의대 학장님과 해부학 교실 주임교수님을 만나 간청했고 그 뒤 윤교수가 임용되었습니다. 만일 윤 교수도 저와의 이런 인연이 없었더라면...그대로 미즈메디 연구소장으로 있었더라면 아마도 (저와 같이 피고인석에 서는) 이런 불행한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 분의 교수...훌륭한 교수들...이 분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김선종 박사.....
 제가 매일 아침 5시50분에 연구실에 출근하면 꼭 10분 전에 그것도 1년 365일 김선종 박사가 먼저 출근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김선종 박사처럼 성실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런 범죄행위에 가담했거나 실행에 옮겼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모르고서 (저는) 김 박사를 서울대 의대 교수로 받아주실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만일에...만일에 김 박사가 과거의 일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 성실성을 더욱 배가시켜 참회의 여생을 살아가겠다고 한다면...저는 (그를) 제 연구팀에 합류시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국민들이 꿈꿨던 그 과학의 열매를 김 박사와 함께 따고 싶습니다.
 
 의례적 인사치례도 아니고, 여기 계신 재판부와 방청석에 호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지난 2006년 1월12일 서울대를 떠나며 드렸던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국민들 앞에 드렸던 대국민 약속....(환자맞춤형 줄기세포의 존재) 그 약속을 지키도록하겠습니다. 그리 머지않은 어느날 그 약속을 실천하는 것을 맞으시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습니다. 만일 재판장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저의 마지막 열정을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쏟아붓고 싶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날이 오면, 10대 여중생 민지가 그 추운 겨울날 청와대 앞에서 오돌오돌 떨며 외쳐왔던...그리고 그 추운 겨울철 어느날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일면식도 없는 저의 이름을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한 선생님의 유가족을 찾아나서고자 합니다. 그 가족들과 민지와 함께 어느 날 이 서울중앙지법 417호를 둘러보는 그 날이 되기를...
 
 이선봉 검사님, 그리고 ***검사님...고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어려운 재판을 장기간 끌어오시게 된데 대해 사죄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베푸실 온정이 있다면...저 때문에 불행하게 된 상 피고인들에게 좀더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 황우석 박사 법정최후진술(2009.8.24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훌쩍이던 방청석에서는 커다란 박수가 터져나왔다. 법원 관계자들이 이를 제지하려했지만 그 박수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법원의 1심 판결 선고는 오는 10월19일이다.

남아공 웨스턴 케이프주 케이프 타운 풍경
배후에 테이블산(1,087m)과 라이온즈헤드가 솟아 있으며 테이블만(灣)에 면하는 천연의 양항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의회의 소재지로서 행정부가 있는 프리토리아와 더불어 수도의 지위를 나누어 맡고 있다.기후는 온대의 지중해성기후로 1월 평균기온 20.3℃, 7월 평균기온 11.6℃이며,연강수량 526mm로 겨울인 5~8월에 비가 많다.주민의 약 35%가 백인이며 유럽풍의 대도시 경관을 이룬다. 1652년 4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 무역의 보급기지로서 건설하여 처음에는 네덜란드어로 카프스타드(Kaapstad)라고 하였으나,그 후 영국계 식민활동의 기점이 되었다. 1860년 창설된 독은 수에즈 운하 폐쇄 중에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남극 관측의 보급기지로서도 알려졌다. 조선·기계·냉장·농수산물 가공·제분·제과·가구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상업·금융업도 활발하다. 백인 전용으로 세운 케이프타운대학(1829), 유색인 전용으로 세운 서(西)케이프대학(1960)을 비롯하여 각종 전문학교, 박물관·미술관· 도서관·식물원·동물원 등이 있다.정비된 항만시설이 있는 외에 항공로·철도·도로 등의 기점을 이루는 교통상의 요지로 여름 철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1666년에 기공한 성곽과 1699년에 기공한 네덜란드의 신교 교회 등 역사적 건축물이 많다.


2010 월드컵이 열리는 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계의 해안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케이프 반도



1652년 얀 반 리벡(Jan Van Rie beeck)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보급 기지를 건설한 것그 후 영국계 식민활동의 기점이 되었다
이 케이프 타운의 시초가 되었다



케이프 타운 뒤에는 테이블 마운틴(1,087m)과 라이온즈헤드가있으며
앞에는 천연의 항(港)이 자리하고 있다 지중해성 기후로 1월 평균기온 20.3℃, 7월 평균기온 11.6℃이며,
연 강우량 526mm로 겨울인 5~8월에 비가 많다.주민의 약 35%가 백인이며 유럽풍의 대도시 경관을 이룬다



아프리카 속의 지중해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관광의 하이라이트인케이프 타운에 어둠이 내리고, 거리의 조명들이 더욱 빛을 발할 쯤,
테이블마운틴에 조명이 쏘아지면 황홀함이 극치를 이룬다



아침이 되면 산책하기 좋은 온화한 유럽의 한 도시로 변한다



개척시대 부터 세워진 유럽풍의 건물들과 잘 정리된 거리,
그리고  현대화 된 고층빌딩들 속에 사람들의 활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담한 단층 건물들이 푸른 녹음과 어울려
지중해 유럽의 한 곳에 온 듯한 인상을 준다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으로 세계적인 관광 도시이며,유럽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곳 중 하나다



연간 강우량은 산 정상이 1,525㎜, 산기슭이 526㎜로 아래쪽보다 정상쪽에서식물의 성장이 활발하다. 난(蘭) 실버트리 등의 식물이 많이 분포하며 데이지는 250여 종에 이른다. 야생 번식한 히말라야타르가 서식한다



케이프 타운의 유명한 명소인 테이블 마운틴 ,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로 연결 되어있다
그 외에도 산을 오르는 여러코스와 방법이 있다. 1503년 안토니오 데살다냐가
 최초의 등정에 성공하였으며, 등정하기 좋은 시기는 10월∼3월이다



많은 여행객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이곳 케이프 타운도 한때는 각축장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17세기 이후 유럽열강들이 자신들의 영토확장을 위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그로인해 소외된 원주민들이 생기고, 흑백갈등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평화와 안정으로 정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