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수행의 의미

2009. 10. 4. 23: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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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기도 수행의 의미 1. 왜 기도해야 하나 진리는 영원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자비하시고 자재하시며 또한 증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부처님으로서는 실로 추가로 제도할 중생이 없으며 가히 끊어야 할 번뇌도 없으며 가히 얻을 열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범부들이 본래 없는 가운데서 꿈을 꾸고 중생 세계를 환작(幻作)하며 거기에 갇힌 듯이 느끼는 것입니다. 진리에 변고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은 오직 깨닫기를 바랄 뿐입니다. 깨닫는 것은 착각된 눈을 바른 곳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 스스로가 지닌 자주의 영역이며 권능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자기 세계를 벌려 가는 자주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부처님은 우리에게 강제적 요구를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주 의지를 존중하며 스스로의 자주 능력을 일깨우고 창조적 자각을 촉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길, 깨닫는 방법, 깨닫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자비하신 인도는 항상 우리 곁에 와 있으며 소리 없는 소리로써 우리에게 설법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돌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기에게 원래로 충만한 생명의 진리, 부처님의 진리에 눈뜨고 자기를 회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道文 혜산스님의 기도수행법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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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무를 더 사랑하는 까닭

                     _ 소광리 소나무숲

 

우리가 생각 없이 잘라내고 있는 것이 어찌 소나무만이겠습니까.

없어도 되는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될 것들을

마구 잘라내고 있는가 하면 아예 사람을 잘라내는 일마저

서슴치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의 유일한 생산자는 식물이라던

당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동물은 완벽한 소비자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소비자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생산이란 고작 식물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나

땅 속에 묻힌 것을 파내어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쌀로 밥을 짓는 일을 두고

밥의 생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생산의 주체가 아니라 소비의 주체이며

급기야는 소비의 객체로 전락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자연을 오로지 생산의 요소로 규정하는 경제학의 폭력성이

이 소광리에서만큼 분명하게 부각되는 곳이 달리 없을 듯합니다.

 

산판일을 하는 사람들은 큰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올라서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잘린 부분에서 올라오는 나무의 노기가 사람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어찌 노하는 것이 소나무뿐이겠습니까.

온 산천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 신영복의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