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이는 그럼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2009. 10. 11. 21: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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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은 곽암의 '심우도'의 열가지 중에서  다섯가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백담사에 그려진 벽화를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심우도의 열가지는

 ①심우(尋牛) ②견적(見跡) ③견우(見牛) ④득우(得牛) ⑤목우(牧牛) ⑥기우귀가(騎牛歸家)

 ⑦망우존인(忘牛存人) ⑧인우구망(人牛具忘) ⑨반본환원(返本還源) ⑩입전수수(入廛垂手) 

 입니다. ^^ _()_ ]

 

 

 

 

 

 

[질문]깨달은 이는 그럼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어떻게 살아가는 분을 깨달은 이라 봐야 할까요?

 

 

[깨달은 이는 어떻게 살아 가는가]
 --- 깨달은 이의 궁극의 모습은 보현행자!

 

 

 

깨달음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곽암의 심우도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에 소의 발자국을 보고 소를 찾아 옥신각신 하던 목동은

오랜 방황 끝에 입전수수,

결국 완전히 소를 찾고는  저자 거리에 들어 가 중생을 돕는 것으로 끝납니다.

 

 

소를 완전히 찾았는 줄 알지만 알고 보면 찾은 것이 아니었고,

소 고삐를 잘 죄어 모든 조복을 받았는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어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알게 된 것은 소도 나도 둘이 아닌 도리!

그래서 목동은  소 등에 몸을 싣고 한가로이 피리를 불며

중생이 사는 거리로 들어 갑니다.  

 

이것이 수행의 종류에 관계없이 누구나 예로부터 인정하는

깨달은 이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러면 저자 거리에 들어 간 깨달은 이는 어떻게 살아 갈까요?

 

 

깨달음을 생계의 방편(?)삼아 나는 깨달았다, 며

깨달음을 온 동네방네 말하며 살아 가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중생들과 똑같은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 가겠습니까?
깨달은 이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깨달았다, 고 무슨 말인지 알아 차리지 못하는 중생 앞에

자신의 깨달음만 알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깨달음을 남에게 물건처럼 팔면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신 오늘도 내일도 시장 거리를 한가로이 멤돌다가,

뛰어가다 넘어지는 아이가 있으면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주고  

길잃고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를 달래어 부모님께 데려다 줄 것입니다.

 

한 나절이 되면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께 가서

막 삶아낸 뜨끈뜨근한 국수 한 그릇 맛있게 사 먹고,

시장 파할 무렵엔 거나하게 술 한 잔 취해

무애한 법계를 노래하며 집에 갈 것입니다.

 

 

가다가 문득 아직도 다 팔지 못한 ,

시든 나물을 앞에 두고 추위에 호호 손을 불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면,

주머니를 뒤적여 남은 돈 털어 할머니 나물을 몽땅 다 사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기분 좋으면 한 마디 덧붙이시겠지요,

 

할머니, 어서 집에 가세요!

이 돈 갖고 손자하고 뜨끈한 고깃국이나 끓여 드시고요...

 

 

깨달음은 무엇이고 중생은 무엇입니까?
이 모습 그대로가  정토 아니겠습니까?
깨달은 이는 이렇게 살아 갈 것입니다.

 

심우도에서 보이는 이러한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화엄경 맨 끝에 나오는 '보현보살의 십대원행' 입니다.
결국 깨달은 이는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으로 회향'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이 깨닫든 못 깨닫든 나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나눠 드리는 것' 입니다.  

 

 

깨치지 못한 저 중생들 앞에서 내 깨침만 자랑함 없이,

또는 무작정 깨쳐라고만 외치지 않고

무명 중생과 함께 웃고 울면서 깨달음을 그들에게 나눠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 보리심을 일으켜 다함없는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그들과 똑같이 범부의 삶을 살며 깨달음을 나눠 드리는 것입니다.

그 나눠 드리는 방법이 바로 보현행 입니다.
그러므로 보현행은 위대한 것 입니다.

 

보현행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깨달음에 상관없이

우리는 깨달음의 공덕을 중생들에게 나눠 드리게 됩니다.

 

 

 

또한 깨달으면야 보현행이 저절로 나오겠지만

깨닫지 않아도 보현행은 할 수 있습니다.

즉, 깨닫지 못하더라도 깨달음을 가불(?)해서

'부처님 공덕을 미리 나눠 쓰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깨달음이 완전치 못하고 일천하다 하더라도,

보현행을 함으로써 우리는 깨달은 분과 동격 을 이루며

부처님의 말할 수 없이 크나큰 공덕의 바다 로 들어 가게 됩니다.

중생은 또한 보현행으로써 부처님 공덕을 같이 입게 되는 것 입니다.

 

 

일체 중생을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원!
그것은 바로 모든 깨달음을 중생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게 하며

깨닫지 못한 중생들도 부처님 공덕의 바다로 이끌어 주는  

큰 배와 같은 수행법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보현보살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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