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스님

2009. 10. 15. 21: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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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스님

“말문 끊어지고 머리 텅비어야 진정한 참구”

계율지키기는 깨달음얻기위한 필수조건

‘돈수냐 점수냐’ 논쟁도 괜한 알음알이…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스님>
비 내리는 화엄사는 비경이다. 돌은 숨쉬고 법당은 흐른다. 뻑뻑한 운무를 뚫고 금방이라도 지리산이 걸어 나올 태세다. 빗물엔 가슴이 떠다니고 가슴엔 샘이 고인다. 법우(法雨)란 말이 실감난다. 각황전 왼편으로 난 돌길을 밟아 오르면 만나는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玄山)스님의 수행처 탑전. 비경을 몇 껍질은 벗겨야 맛볼 수 있는 진경이다. 100안거 성만이라는 경이적인 수행경력보다도 스님의 웃음에 기가 질렸다.

천성이 순한 스님은 오돌또기 화두와만 싸운 것 같다. 스님은 시심마(是心) 화두와 45년을 씨름했다. 화두. ‘말’ 또는 ‘이야기’란 의미의 화(話)와 뜻 없는 접미사 두(頭)로 구성돼 있다. 그저 말이란 뜻이다. 그러나 선사들이 쓰는 특별한 말이다. 말 이전의 말, 생각 이전의 뜻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속성은 차이와 분별입니다. ‘있다’는 ‘없다’와, ‘나’는 ‘너’와, ‘좋다’는 ‘나쁘다’와 맞서야만 자신의 존재가 보장되죠. 결국 이런 언어에 기초해 구성되는 사고는 끊임없이 대립과 한계를 양산하며 제 손으로 감옥을 만듭니다. 말과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본질과는 멀어지는 셈입니다.” “한 찰나에 900번의 생각이 일어났다 꺼집니다.” 생각은 장애이자 스스로를 옭아매는 병이다. 화두는 그러한 사슬을 끊기 위한 칼이다. “예컨대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화두를 들이대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판자 이빨에 털이 나는 이치’라 … 일상적 언어습관에 길들여진 사람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넌센스죠. 말문이 끊어지고 머리가 텅 비게 되는 순간에서 진정한 참구(參究)가 출발합니다.” 화두 참구의 시작은 의심이다. 불신이 아니라 의심이다.

판치생모가 ‘어처구니없는 거짓부렁’이라고 내쳐버리면 참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믿음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리고 ‘어째서’라는 의문을 새기며 화두 안으로 파고들어야 하죠.” 위기가 기회이듯 생각은 장애이자 힘이다. “외부현상에서 자기 본래자리로 방향만 되돌리면 삶을 갉아먹던 생각은 굉장한 생명의 에너지로 승화합니다.” 정진이 무르익으면 삼매에 든다. 머릿속이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해진 성성적적(惺惺寂寂)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의심덩어리만이 남는다. 그야말로 덩어리다. “뇌리 전체가 꽉 찬 느낌이 납니다. 그것이 터져버릴 때가 바로 깨침이죠.” 화두에 빈틈없이 깨어있는 성성적적은 화두 참구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이기도 하다. “화두를 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병통이나 이상현상 혹은 아무 생각이 없는 무기(無記)에 빠지는 것도 제대로 화두가 들리지 않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입니다.”

화두 참구 시 나타나는 갖가지 병통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탐욕의 유혹이다. “수행이 어느 정도 진척되면 점술과 비기 등 신이를 얻게 됩니다. 다만 식(의식)이 맑아져 생기는 현상일 뿐인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에 현혹돼 수행을 그르치고 종내는 삶을 망치고 맙니다. 견물생심 때문이죠. 수행으로 고통을 떨치려다 도리어 고통의 근원인 욕망만을 더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하기 전 왜 수행하고 싶은가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간화선 수행에서 정견(正見)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먼저 자신이 부처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부처라는 사실을 잊고 고통 속에 방황했던 예전의 삶을 뼛속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자비의 원력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연기의 법칙에 따라 내가 부처이면 모든 중생이 부처입니다. 나만 잘되겠다는 생각으론 절대 성불할 수 없습니다. 바른 믿음으로 걸어가다 보면 내가 걷는 길이 곧 진리의 길입니다.”

정견에 따른 수행으로 도달하는 깨달음의 세계는 어떠한 것인가. 끊임없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와 대립이 지워진 본래자리로의 회귀다. “의심덩어리가 깨지면 온 세계가 신령스러운 빛으로 감싸진 확철대오에 이릅니다.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 하나가 되지요. 주객관의 경계가 사라지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그냥 물이 아닙니다. 있다고 해서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요 없다고 해서 참으로 없는 것이 아님을 똑똑히 체험합니다. 나라고 할 만한, 너 혹은 저것과 다른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아는 무아(無我)를 체득합니다.” 요컨대 자신을 구속하던 시공간, 개념, 알음알이 모두로부터의 해방이다. “입으로는 부처와 조사를 삼키고 눈은 하늘과 땅을 덮는 구탄불조 안개건곤(口呑佛祖 眼蓋乾坤)이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느낄 수 있는 현실이 됩니다.”

‘입으로는 부처와 조사를 삼키고 눈은 하늘과 땅을 덮는다.’ 무지막지한 도력에 기가 죽는다. 하지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내가 부처’라는 확신 그리고 약간의 준비운동만 하면 된다. 깨닫기 위한 준비운동. 그것은 지계(持戒)다. “깨달음의 필수조건이 계율입니다. 청정한 불성에 도달하기 위해선 몸도 마음도 깨끗해야죠. 많은 사람들이 계율을 구속이라고 느끼는데 그런 생각으론 깨달음과 손잡을 수 없습니다. 견성의 길 가는 노자로 쓰려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적금통장이라고 여기십시오.”

40년 구참 수좌답게 선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에 스님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선가의 역사적인 이슈가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논쟁. 돈오돈수는 한번 완전히 깨달으면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고, 돈오점수는 깨달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닦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오랫동안 꼬여버린 갈등이지만 스님은 단칼에 얽힌 매듭을 풀어버렸다. 다만 “사람의 개인차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법에는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과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 구별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에 따라 근기가 달라 단박에 닦는 이가 있고 점차 닦아가는 이가 있을 뿐이죠.”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과 점차가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다.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는다’라는 육조 혜능스님의 충고와 다르지 않다. 어쩌면 돈수냐 점수냐에 연연하는 것도 깨달음에 몰두해야 할 힘을 공연한 알음알이에 소진하는 셈이다.

스님은 말씀 중에 한시도 웃음을 ‘놓지’ 않았다. 평온한 얼굴엔 인생을 원만하게 견뎌낸 노옹의 넉넉함이 배어있다. 스님은 고등학교 재학 시 불교와의 인연을 만났다. 목포 문태고 시절, 대흥사 스님이었던 한문선생님에게서 수업시간에 한역 〈반야심경〉과 〈능엄경〉을 배우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자구를 해석해 보니 부처님 법같이 좋은 게 없더군요.” 당시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과 부정부패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아무리 무술이 뛰어나도 총 한방이면 그 자리에서 송장이 되지 않은가. 하지만 부처님은 도를 통해 어떤 악인도 능히 제도하지 않았던가. 그 길을 따라가자.”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산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후 45년, 화두를 적이자 친구로 삼아 평생을 부딪치고 끌어안고 살았다. 그저 열심히 살다 보니 평화가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생각. “만중생을 교화한다는 부처님도 세 가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연이 없는 중생을 제도 못하고, 중생의 업을 대신 받을 수 없고, 결국 중생계를 다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 부모님이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 부처님도 위대하고 소중한 ‘남’일 따름입니다. 내 삶은, 거기서 오는 절망과 고통은 오직 내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 하염없는 매듭도 스스로 풀어야 합니다.”

비에 젖은 지리산은 더욱 짙푸르다. 천재에 혹은 인재에 아랑곳 않고, 수 천년을 견뎌낸 숲의 ‘오기’가 전하는 그윽한 냄새. 게으른 자에겐 평화가 발붙이지 않는다.

화엄사=장영섭 기자 flowergirl@ibulgyo.com


■ 현산스님은…

100안거 성만 ''영원한 수좌''…


현산스님은 작은 암자의 주지 한번 지낸 적 없다. 거의 100안거에 달하는 수행경력이 말해주듯 스님은 출가 후 오로지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몰두한 45년 수좌다. 선지식이 있다는 절을 찾아 전국을 돌며 고된 발품을 마다하지 않기도 했다.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한 선지식들도 많이 뵈었다. 동산스님 경봉스님 전강스님 구산스님 금오스님 등 한국 근현대불교사를 장식한 불세출의 고승들은 오늘날 현산스님의 구법의 길을 터준 은인들이다. 스님은 스승들의 특징을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산스님은 계행이 남달랐다. 오후불식을 철저히 지키고 아침저녁으로 사찰의 모든 법당에 예불을 올릴 만큼 신심도 두터웠다. 경봉스님은 오랜 강사생활로 참선은 물론 경학에도 뛰어났다. 특히 통도사 주지를 오래 맡아 살림살이의 맺고 끊는 바가 정확한 이사무애의 대명사였다. 구산스님은 7바라밀 운동을 전개한 생활불교의 선구자. 전강스님은 소탈하고 매사에 걸림이 없는 분이었다. 평생을 걸망맨 수좌로 기억되는 금오스님은 제자교육에 엄격했다. 현산스님은 이같이 뛰어난 스승들이 제시한 길을 열심히 믿고 따랐다. 결국 35세에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모든 선방 수좌를 지휘하는 유나를 맡을 만큼 젊은 나이에 이미 법력을 인정받았다.

스님은 이들 선지식들의 공통점을 소욕지족과 한량없는 자비라고 꼽았다. “사심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고 마음에 우주를 품고 있는 듯한 분들”이었다. 제자도 그런 경지에 올라섰을까. 분명한 건 스님의 웃음이 더없이 넉넉하고 청빈하다는 사실이다. 1960년 보광사에서 도천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현산스님은 현재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1996년부터 화엄사 선등선원장으로 있으면서 후학을 제접하고 있다. 장영섭 기자


[불교신문 2141호/ 6월28일자]

2005-06-25 오전 9:29:54 / 송고
 

 

 

우리네 人生이란...

   

우리네 인생이란 

보이지 않은 승차권 하나 손에 쥐고 떠나는

기차 여행 과 같다 합니다.
연습의 기회도 없이 한번 승차하면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되돌리지 못 하고 절대 도중에 하차할 수 없는 길을 떠나지요.
 
가다 보면~
강아지풀이 손 흔드는 들 길이며
푸르른 숲으로 둘러진 산들이며
금빛 모래사장으로 눈부신바다도 만나게 되어
밝은 아름다움이 주는 행복감을 .........
 
때로는~
어둠으로 찬 추운 터널 과 눈보라가 휘날리는 매서운 길이며
때로는 뜨겁게 숨막힐 듯한 험한 길을
지나갈 때를 맛보기도 합니다.
 
허나~
고통 과 막막함이 느껴지는 곳을 지난다고 해서
우리의 손에 쥐어진 승차권을 내팽개쳐 버리거나
찢어버릴 수는 없는 거겠지요.
 
지금 빛이 보이지 않은다고 해서
목적지에도 채 도착하기 전에 승차권을 찢어버리고
도중하차 하려는 어리석은 인생은 없겠지요.
인내하며 가야겠지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보다 아름다운 햇살이
나의 머리맡에 따스하게 내릴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한주먹 밖에 안되는 손으로 그 대는 무엇을 쥐려 하는가?
한 자 밖에 안 되는 가슴에 그 대는 무엇을 품으려 하는가?
길지도 않은 인생 속에서 많지도 않은 시간 속에서
그 대는 무엇에 허덕이는가?
 
일장춘몽 공수래 공수거이거늘
우리네 덧 없는 인생을 비유 했던가.
오는 세월을 막을 수 있는가.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있는가.
원통의 눈물을 거두소서.
통곡의 애환을 버리소서.
 
녹는 애 간장이 있거들랑
흐르는 강물에 던져 버리고
타는 목마름이 있거들랑 한 잔 술로 씻어 버리세.

피는 꽃이 예쁘다 한들 십일이 가리오
지는 꽃이 슬프다 한들 내 마음보다 더 할소냐.
오시는 자 욕심없이 오시고
 가시는 자 미련없이 보내고
모든 것이 허망하고 부질 없어라.

그러나 오늘도 숨을 쉬고 있기에
씨앗든 망태기 짊어지고
산으로 들로 씨를 뿌려야 하지 않겠소.
 
고즈넉이 들려오는 풍경소리에
잠들지 않은 상념은
소리없이 깊어만 가네!
 

어차피 人生은 一場春夢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