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6. 23:0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염불 불보살 이야기
명부전(冥府殿)의 명(冥)자 위에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저 점은 공점(空點)이겠지요?
어두운 우리 마음의 전각을 공점으로 장엄하는 것이 좋은 날을 사는 것입니다.
좋은 날
과거를 좇아서도
미래에 기대를 두어서도 안됩니다.
과거의 일은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어떠한 상태일지라도
바로 거기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똑똑하게 살피십시오.
미혹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그 마음가짐을 닦으십시오.
오늘 해야 할 일을
성심껏 하십시오.
내일은 죽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죽음과 그의 권세 있는 군대와는
흥정할 수 없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간단(間斷)없이,
그렇게 성심껏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좋은 날을 진정으로 성취하였습니다.
나는 존경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나는 칭찬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나는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나는 대접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남을 이기고 남의 위에 서겠다는 생각을 버리겠습니다.
나의 참생명은 부처님 생명입니다.
내 생명은 따로이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 생명인 부처님 생명이 나의 참생명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에게는 남이 없습니다.
모두가 나일 뿐입니다.
남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나인 그 모든 형제들에게
언제나 심부름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법회 때 한탑 스님을 따라서 합창했던 내용입니다.
괴로움은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절망은 나를 상대유한의 존재로 규정했을 때이므로
본래부터 영원한 아미타 절대생명이 드러나는
염불에 의지하라고 따뜻하게 일러주십니다.
공포스러워해야할 것은 본래 없다구요.
바꿔야 할 남은 없다.
내가 바뀌면 남도 바뀐다.
내가 바뀔 때 가정이 바뀐다.
내가 바뀔 때 나라가 바뀐다.
내가 바뀔 때 세계도 바뀐다.
무엇으로 바뀌느냐?
나무아미타불로 바뀐다.
법문 감사합니다.
오늘도 집과 직장과 거리에서 만나는 일체 모든 부처님 생명,
그러나 저는 제가 맞다고,
제가 본 것만 옳다고 우기면서 괴로워하네요.
불쌍하게 봐 주세요.
나무아미타불
『중부경전-주석서;Majjhima Nikaya Atthakatha』에 의하면, 기억에 의한 단순한 과거 회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다시 체험하려는 갈망과 연관된 행위를 경계합니다. 이 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끄리슈나무르띠와 같이 기억 차체를 악이라고 보는 시각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보디Bodhi스님 영역본.역주)
부처님 자신에게 야소다라와의 사랑의 기억이 어찌 악이 되겠습니까? 갈망의 족쇄에 갇힌 사람에게는 그 기억이 자신을 태우는 번뇌의 불이 되겠지만, 그 추억을 공점(空點)으로 장엄한 현자의 가슴에는 아련한 기억이 소담스러운 연꽃으로 피었을 것입니다.
[2] 야소다라와의 사랑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 라훌라가 소따빤나(Sotāpanna,예류預流), 싸까다가미(Sakadāgāmi,일래一來), 안아가미(Anāgāmī,불환不還), 아라하뜨(Arahat,응공應供)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를 부처님이 어찌 두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그 기대 속에 자신과 아들을 결박하는 사슬이 없었을 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1~2구는, 과거 그리고 미래와 단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집-멸-도』는, (1) 현실관찰, (2) 원인분석, (3) 목표설정, (4) 세부시행 을 그 틀로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지극한 현실에서 과거와 미래를 열린 마음으로 섭수하여 무욕의 정신으로 현재를 성심껏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부처님 깨달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보다 좋은 현재를 위해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의 계획을 현재의 삶에서 유기적으로 조화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실과 맞서는 용기와, 번뇌의 씨앗이 되는 갈망을 놓아버리는 무욕의 정신이 필수조건입니다.
사성제의 사고 프레임은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로 그 도(道)의 길을 걷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 법과 율이 무엇이든지 간에 팔정도가 없는 길에는 소따빤나(Sotāpanna), 싸까다가미(Sakadāgāmi), 안아가미(Anāgāmī), 아라하뜨(Arahat,응공應供)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들 수행자가 없는 법과 율은 이교도의 것입니다.(D.ii.151) 불교의 시작은 『팔정도(八正道)』의 길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고, 여기에서 정(正)은 말할 것도 없이 번뇌를 낳는 탐욕을 떠나는 방향성을 지시합니다.
불교는 이 방향을 지시하는 표지판 역할이 존재 의의이고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그 마침이 없습니다. 여래께서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도, 아난다가 열반에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마음집중’이라는 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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