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하는 법 (2)/성철스님

2009. 10. 23. 00: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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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공하는 법 (2)

        진리적으로 볼 때 남의 종교를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가 안 됩니다.
        그것은 양심 있는 학자는 모두 다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에서 볼 때 예수교가 별것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제 3자가 참으로 양심적인 면에서 말할 때는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상대가 안 됩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워 같은 사람은 어떻게 평했느냐하면
        “예수교와 불교가 싸움을 한다고 가정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두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느니,
        “절벽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는 것”과 같다고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니 극단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진리로 보면 그러한데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교 사람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예수교 사람 못 따라 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차리는 것이 무슨 자비가 있는가?
        참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중노릇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아마 승려가 봉사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이 승려에겐 없다고 본단 말입니다.
        예수교 사람을 보면 참으로 봉사활동 많이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깔멜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무슨 제비인지 아십니까?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 자나 깨나 양로원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도대상 분담 제비인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하면 내내 고아원,
        교도소에 해당하면 내내 교도소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만 사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합니다.
        조금도 안합니다.
        1년 내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아무리 남의 종교이지만 잘하는 것은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먹고 사는 것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 내팔아서 먹고 산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해서 먹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 기도하고!

        그런데 불교에서는?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든 말든.

        우리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다면 안 되겠지만
        아마 99%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계산이 틀렸는지 모르지만.

        우리 불교 하는 사람들은,
        더구나 승려들은 봉사정신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고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남을 돕는 데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에서는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대상은 절밖에 있습니다.
        불공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중생이 불공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방향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가 구태를 벗어버리고
        참다운 중흥의 길, 사는 길을 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복(福) 빌어주는 이것이 불공 아니고
        남을 도와주는 이것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것을 참으로 실천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의 새싹이 트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속)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

        늘 보고싶게 만든 그대는 누구십니까 차를 마시는데 소리없이 다가와 찻잔에 담기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낙엽 밟으며 산길을 걷는데 살며시 다가와 팔짱끼고 친구 되어 주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비를 보고 있는데 빗속에서 걸어 나와 우산을 씌워주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바람 없는 강둑을 걷는데 물 위에 미소 짓는 얼굴 하나 그려놓고 더 그립게 하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푸른 내 마음에 그리움을 꽃으로 피우고 꽃과 함께 살자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커다란 별을 따서 내 가슴에 달아 주며 늘 생각해 달라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바람 타고 달려와 내 마음에 둥지 짓고 늘 보고 싶게 만든 그대는 누구십니까?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보고 있는데도 더 보고 싶게 만드는 그대는 그대는 진정 누구십니까? 바로 바로 당신이랍니다... 【 출처 : 좋 은 글 중 에 서 】 해마다 지나치는 사람도 그자리에서 흔들림 없는 저 만물도 늘 똑같은데... 아침을 알리는 소리도...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숨결도 ... 늘 똑같은데... 변한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가슴 깊이 에서 들려오는 이 그리움의 소리는 무엇인가요? 마치 눈을 감고 뜨니 없어진 그림자였을까요? 보이지 않을 것 같으나 마음으로 그려지는 따뜻한 속삭임이 귓가에서 손끝으로 전해지네요 영원한 나라의 꿈이 다가오네요 ... 그때가 되면 자유롭게 날 수 있겠지요 하늘의 새가 되어 내 마음의 깊은 곳에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그때는.... 그때는 같은것은 없겠지요.... 그곳에 당신이 있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