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지혜로운 마음 비우기

2009. 11. 23. 20: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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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일 없는 사람은 가는 세월이 늦다고 할 것이고 바쁜 사람은 너무 빠르다고들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변함이 없는 자연의 섭리건만,

중생들의 인간관계는 모두가 자기의 입장과 자기의 눈높이에서만 바라보고 이해하려들기에 가장 가깝다는 부부사이만 보더라도 자신의 인연이 악연인지 선연인지도 모르고 생판 남으로 살던 처지들이 이삼십이 다되도록 키워준 부모님도 마다하고 님이 되어 죽고 못 사는 사이로 변해 살아가지만, 어제까지 한 지붕 밑에 살던 부부도 모음에 점하나 변했다고 웬수로 변해지고 주변의 인관관계도 서로가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고 이해하고 아껴주기 보다는 우선 자기의 욕구에 끄달리고 자기가 옳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서로 부딪치고 떠밀리며 악다구니를 쓰고 서로가 원망하고 비방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일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깐 부시와 빈 라덴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부시와 빈 라덴의 공통점은 독실한 종교인이라는 점입니다." 

유일신 종교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가, 자신이 믿는 신념체계는 절대자가 친히 내려주신 절대 계시이므로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주의자들에 대해 사회학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종교를 잘못 믿음으로 해서 받을 수 있는 피해 중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서 잘난 이 나를 낳아주시고 존재하도록 길러주었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조상님과 부모님이 예수 안 믿었다고 지옥에 갔다는데 그 분들이 죽으면 귀신이 됐다고 제삿날은 고사하고 명절차례에 나를 낳아주신데 대한 감사의 절도 하지않는 그런 좁은 소견머리로 자기의 뿌리는 외면하면서도 기필코 천국에는 가겠다는 그 마음이 지옥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법회 때마다 지장전에 독송하시는 지장본원경 약찬게에 나오는 지장보살님의 서원에 “지옥 아니 비면 성불하지 않으리라' 하신 지장보살의 마음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사회학자가 말했듯이, “우리가 종교를 잘못믿음으로 해서 받을 수 있는 피해 중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상식적으로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론 이슬람의 종교는 마호메트가 말하기“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을 들라.” 코란을 믿지 않으면 모두 죽이라는 것이 마호메트의 이슬람종교라고 옛날 윤리시간에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요즘 기독교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과 다를 것이 하등 없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서양식 종교관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받으며 진실로 옳고 그름이 없이 서양의 기독교 종교학자들이 써놓은 종교학을 예전의 선생님들은 무비판적으로 제자들에게 무책임하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등종교”라는 등식이 성립하면서 생긴 오류는 세계사 책에 나오는 “종교개혁”이란 것도 정확히 말하면 “교회개혁”인 것이지 어찌 종교의 개혁이 될 수 있습니까?

종교가 기독교 하나밖에 없었습니까?


제가 보았던 글에는 “한 손에 검, 한손에 코란”이란 문구에 대한 오해를 설명해 놓았는데, 흔히 해석되는 마호메트의 “믿을래, 죽을래”는 서양인들이 기독교적 편견과 증오심에서 곡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검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한 손에는 코란을 들어라. 만약 코란을 들지 않고 검만 든다면 너희는 짐승이 될 것이다”라는 게 원뜻이라고 합니다.

마호메트 시절 이슬람교가 번성한 것은 이슬람 군대의 힘이 아니었고 이슬람 군대가 가는 곳마다 자비가 실현된 것이 정복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들여 먹힌 것이라고 합니다.


또 불교에 대해서는 한 스님이 쓴 글을 읽고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일화도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스님은 “오늘 엄청난 교회에 가서 부처님을 만났다. 설교하는 부처님, 듣는 부처님...”이라고 썼다며 “과연 어떤 목사가 이런 생각을 가진 적 있는지 묻고 싶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목사님들에게는 스님들은 모두가 다 사탄이요, 불상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그런 사고를 가지고 모여든 기독교 신자들의 정신세계에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신자들의 영혼의 양식을 편식에 빠져들게 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그릇된 기독교관입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 금생에 다행히 불법을 만나 이렇게 모든 사물을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여기 마음이 찔리는 글을 좀 들려드릴까 합니다.

 

“복이 적은 사람이 욕심을 크게 가지면 과욕으로 인해 사업이 망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지어야 재물이 따르는 것이라,”

 

“죄업장이 많은 사람은 마음을 넓게 쓸 수 없고, 인과가 많은 사람은 그릇된 성품을 참지 못하는 것이며 죄업이 많은 사람은 언행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깨닫지 못하면 행복은 행복이 아니며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닐세. 행복인가 하면 괴로움이요, 사는 것인가 하면 죽음이라,”

 

“남을 이겨야만 산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산다는 생각을 가지라, 그러면 지고서도 이기는 복록이 올 것이니,

 

“자신의 죄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을 원망하지 말아라. 나의 죄업이 없으면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조차 않느니라.”

 

“남에게 재물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거나 일확 천금으로 욕심을 부리다 사기를 당하는 것이나 남을 위하여 보시를 하는 거나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거나 하는 재물은 일체가 전생 빚을 갚는 것이니라.

 

그러나 성현의 도량에 시주하는 시주금이나 보시금은 내생에 복을 쌓는 것이니 소원을 이루고 성취를 하는 재물이 된다는 이치를 알아야 하느니라.” 

끝에 대목은 우리절에 시주 많이 하라는 소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지장본원경 약찬게 71쪽 하단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비리로써 옳지 않게 상주물을 받아쓰면 나고 죽음바뀌면서 그 과보를 모두 받는다는 대목 말입니다.

바로 선업의 씨앗을 금생에 심고 인연을 지어두라는 것입니다.


“극선극악은 당래인과”라 하듯이 인과의 도리가 대단하다면 당래에 그 과보가 있다고 했지만, 요즘은 다르다고 봅니다.


지구촌에서 온갖 문명의 이기들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듯이 사람들의 삶도 인터넷이라는 온라인을 통해 지구촌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공유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전 상의 여섯가지의 신통들도 이제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한 제자가 부처님의 도량을 빠져 나와 혼자서 독각수행을 하다가 물 위를 걷는 신통을 얻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세존과 여러 대중들에게자랑하고 싶어서 세존께서 이웃마을에 법문을 가시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세존의 일행들이 나루터에 다다르자 호수를 뛰어들어 자랑스럽게 물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를 보시더니 한동안 보이지 않던 제자임을 알아보시고 그를 불러 묻습니다.

“너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더냐?” 수행자는 자랑스럽게 “예! 저는 혼자서 수행을 하여 이러한 신통을 얻었습니다. 이제 저도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여깁니다.” 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동안 혼자서 수행을 했다는 것이 고작 은자 몇 잎의 공부를 했더란 말이냐!” 하며 탄식을 하십니다.  이와 같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도 돈만내면 비행기가 날도록 해주고 돈만 내면 물속도 물위도 심지어 우주까지도 갈 수 있는 세상이 됐습니다.

중생의 눈에는 물위를 걷는 신통력이 대단하게 보이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마외도들도 여섯 가지의 신통 중에 다섯 가지는 이룰 수 있느니라, 그러나 일체의 번뇌를 끊고 윤회를 벗어나는 누진의 신통은 여래의 법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쉽게들 마음을 비운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마음들을, 어디에있는 줄도 모르는 마음들을,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마음들을 어찌 비운다는 말입니까? 

이 얼마나 뜬 구름 잡는 말입니까?

 

이름을 마음이라 불러서 마음인 것이지 그게 어찌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까?

허나 마음은 있습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본디 청정하기 이루 말할 수 없고 삼천대천세계를 다 품어도 남는 것이긴 하지만, 볼래야 볼 수 없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 입니다.

맹자는 사람의 성품이 선하다 하고 순자는 성품이 악하지만 교육에 의해 결정지어진다고 했지만, 둘 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본디 마음은 본질이고 마음을 포장한 포장지는 성품이라 부르며 포장지의 질에 따라 성격은 결정지어지는 것이고 일상은 그에 따라 세월이 흘러 인생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애버리는 누진수행으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 한번에 원수도 증오도 미움도 다 용서할 수 있고 생각 한번에 한 지붕 밑에 살던 몇 천겁의 인연도 서로 점하나 붙여 웬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사랑할땐 별이되고 / 이해인

 

 

친구야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을 볼수 없을때

나는 잠시 네가슴에 내려 앉아

하늘 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는

고운 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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