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부처 (2)/성철스님

2009. 11. 25. 20: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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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중생과 부처 (2)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예전의 고인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볼 것 같으면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儒佛仙) 삼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서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싹 닦아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 불, 선, 이 꼭 같다고 한다면 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 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불·선 삼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뜻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치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바로 알려면 망상을 완전히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경계(佛境界) 이외에는
    전부 다 사지사견(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 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치고
    무엇이든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고 정지정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칠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正行)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알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다 이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 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서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떼야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말해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다 닦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비치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치는 것을 불멸(不滅)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차이가 있습니다만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 날 만 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 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 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땅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낼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
       
      (끝)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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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얻기 위해 샘에 가면 

    샘물을 길어올립니다.
    그때 샘물만 길어올리지 말고

    지혜도 같이 길어올리도록 하소서.

    갈 곳을 가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그때 길의 목적지만 생각하지 말고

    내 인생의 목적지도 함께 생각하게 하소서.


    열매를 얻기 위해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때 나무의 열매만 따지 말고

    내 이름의 열매도 많이 얻게 하소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을 오릅니다.

    그때 산을 오르는 고통만 참지

    말고 내 생활의 어려움도  함께

    극복하도록 하소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찻집에서 기다립니다.
    그때 친구만 기다리지 말고

    내 마음이 참으로 만나고 싶은 것도

    같이 기다리게 하소서.

    차를 운전하기 위해 도로 표시판을 봅니다.
    그때 도로의 표시판만 보지 말고

    내 생각의 표시판도 같이 보게 하소서.

    반짝이는 별을 보기 위해 

    어두운 밤하늘을 봅니다.
    그때 별만 찾지 말고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내 희망도 찾도록 하소서.

    비가 올 것인가를 알기 위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때 구름만 보지 말고

    내 삶에도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릴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좋은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