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치기로만 살아가는 삶

2009. 12. 9. 21: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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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신심으로 일상을 살아갈 때, 큰일은 작아지고 작은 일은 소멸되고 피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번 주에는 “증사작반에 증미작반”이라 모래를 쪄서 밥을 하려들지 말고 쌀을 쪄서 밥을 하는 “남는 장사들을 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법문을 했습니다만, 이번 금주의 법문은 “본전치기로만 살아가는 삶”라는 주제로 법문을 열겠습니다.


나름대로 종교들을 가지고 계시고 신앙생활을 하신다는 분들의 말하는 것을 보거나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 세간의 도인들인지라 말들은 부처님, 예수님을 쏘옥 빼닮은 언변들이고 나오는 말마다 법문들이고 무릎 닳아지게 절을 하거나 독경을 하는 것을 보면 지극정성에 목소리들은 낭랑하게 잘들도 하건만, 막상 이해타산이 발등에 떨어지거나, 자기와 생각이 쬐~끔 다르고 눈에 거슬린다 싶으면 그 좋은 입에서 마왕 파순의 종자들이 쓰는 남에 가슴에 바늘을 꼿는 말들이 난무하게 나오고 관세음보살님 닮았던 얼굴은 온데 간데 없어져버리니 이런 삶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삶일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을 살아간다면 이러한 삶이 바로 본전치기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마음의 허구를 드러내놓고 여기서 벗어나 진실로 자기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종의 2조 혜가대사와 초조 달마대사의 관심론에서 나오는 문답을 들려드리면서 그 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제목은 관심론(觀心論)이라 “마음을 보는 법”입니다.

제자 혜가(慧可)가 묻기를, “불도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가 답하기를, “오직 마음을 관(觀)하는 법이 모든 행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다시 혜가가 묻기를 “어째서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거두어들인다 하십니까?” 하자, “마음이란 모든 것(萬法)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예들어, 여기큰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나 잎이나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본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을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도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도한다면 부질없이 헛된 공만 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마음 밖에 따로 구할 도가 있다면 옳지 않은 말이다.” 하자 혜가가 다시 묻기를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하십니까?” 달마가 재차 “보살이 반야 바라밀다를 행할 때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밝게 하며, 또 자기 마음을 쓰는 데 두 가지 차별이 있음을 분명히 본다.


두 가지란 맑은 마음(淨心)과 물든 마음(染心)이다.

맑은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진여(眞如)의 마음이요, 물든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無明)의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은 본래부터 갖추어 있어 비록 인연 따라 화합하기는 하지만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맑은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을 즐기고, 물든 마음은 악한 업을 생각한다.


만약 진여의 마음을 깨쳐 그것이 물들거나 때 묻지 않는 것인 줄 깨달으면 이 사람은 성인이다.

그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물든 마음을 따라 악한 짓을 하면 온갖 괴로움과 어둠이 몸에 감기고 덮이게 되니 이를 범부라 한다.


범부는 항상 삼계(三界)에 빠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으니, 그것은 물든 마음으로 말미암아 진여의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십지경(十地經)에 말하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석처럼 굳은 불성(佛性)이 있어 해와 같이 밝고 원만하며 광대무변하지만, 오온(五蘊)의 검은 구름에 덮여 마치 항아리 속에 있는 불빛이 밖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고, 또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나 무명에 덮여서 해탈을 얻지 못 한다”고 하였다.


“불성이란 깨침이다.” 스스로 깨치고 깨친 지혜가 밝아 번뇌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善)은 깨침이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이 깨침이 근본이 되어 모든 공덕의 나무가 무성하고 열반의 열매가 여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마음을 관하는 것을 마음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혜가가 묻기를, “진여 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은 깨침이 근본이 된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명인 마음과 온갖 악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달마대사가 답하기를 “무명인 마음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와 정욕이 있어 악한 것들이 한량없으나 그 모두는 삼독(三毒)이 근본이다.

삼독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 삼독심에는 저절로 모든 악한 것이 갖추어져 있다.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나 가지는 수없이 많은 것처럼, 삼독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한량없이 많은 악업이 있어 무엇으로 비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삼독은 본체에서는 하나이나 저절로 삼독이 되어 이것이 육근(六根)에 작용하면 육적(六賊)이 된다. 육적은 곧 육식(六識)이다. 육식이 육근을 드나들며 온갖 대상에 탐착심을 일으키므로 악업을 지어 진여를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육적이라 이름한다.


중생들은 이 삼독과 육적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생사의 구렁에 빠져 육도(六途)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물이 원래 조그마한 샘물에서 시작하여 끊이지 않고 흐르면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는 만경창파를 이루게 되나, 어떤 사람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 된다.

이와 같이 해탈을 구하는 사람도 삼독을 돌이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이루고, 육적을 돌이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이루면 저절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혜가가 다시 묻기를 “삼독과 육적이 광대무변한데 마음만을 보고 어떻게 한없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삼계에 태어남은 오로지 마음으로 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에 있으면서도 곧 삼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삼계라는 것은 곧 삼독이다.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가 되고,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가 되며,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가 된다. 삼독심이 갖가지 악을 짓고 맺어 업을 이루고 육도에 윤회하게 되니 이것을 삼계라 한다. 또 삼독이 짓는 무겁고 가벼운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것도 같지 않아 여섯 곳으로 나뉘게 되니 이것을 육

도라 한다.


그러나 “악업은 오로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거둬 그릇되고 악한 것을 버리면 삼악도와 육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은 저절로 소멸되고,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고 말했다.


혜가가 또 묻기를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는 삼아승지겁(阿僧祗劫)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었다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오직 삼독을 제하면 곧 해탈이라 하십니까?” 하자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다. 아승지는 곧 삼독심이다.


아승지는 셀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 가운데에는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이 있고 그 낱낱 생각 가운데 다 일 겁씩 있으니, 삼독의 악한 생각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으므로 셀 수 없다고 말한다.


범부는 진여의 성품이 삼독에 덮였으니,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에서 뛰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탈이라 할 수 있겠느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만 제거해 버리면 이것이 곧 삼아승지 겁을 지낸 것이다.


말세 중생이 어리석고 둔하여 부처님의 깊고 묘한 삼아승지 겁이라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한량없는 겁을 지내야만 성불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어찌 말세에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잘못 알고 의심을 내어 보리도(菩提道)에서 물러나게 함이 아니겠느냐.” 


혜가대사가 다시 묻기를 “보살이 삼취정계를 가지고 또한 육바라밀을 행하여야 불도를 이룬다 하셨는데, 수행자가 오직 마음만 관하고 계행(戒行)을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가 이에 답하기를 “삼취정계란 곧 삼독심을 다스리는 것이니, 일독을 제하면 무량한 선(善)이 이루어진다.


취(聚)란 모았다, 모여있다 라는 뜻인데 삼독을 다스리면 곧 세 가지 한량없는 선을 이루게 된다.

널리 선을 마음에 모았으므로 삼취정계라 한다.


또 육바라밀이란 곧 육근을 맑게 하는 것이니 바라밀이란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뜻이다. 육근(六根)이 청정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곧 번뇌에서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되므로 육바라밀이라 한다.” 

혜가가 또 묻기를 “경에 말씀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한다고 하셨으니묘문(妙門)으로 성불할 것인데 어째서 마음을 관하여 해탈을 구하라 하십니까?” 하자,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염불하는 자는 반드시 정념(正念)을 닦아야 한다.

참된 뜻을 분명히 알면 정(正)이 되고, 참된 뜻에 분명하지 못하면 사(邪)가 되는 것이니, 정념은 반드시 서방정토를 얻지만 사념(邪念)으로는 피안에 이를 수 없다.

‘불이란 깨쳤다는 뜻이니’ 몸과 마음을 살펴 악한 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염(念)이란 생각하는 것이니 계행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잊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정념이다.

그러므로 염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기를 그물로 잡지만 잡고 나서는 그물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말에 의지하여 뜻을 알지만 뜻을 알았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염불의 실체를 행해야 한다. 염불한다 하면서 진실한 뜻을 모르고 입으로만 공연히 부처님 명호를 외운다면 헛된 공만 들이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외운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은 말과 뜻이 다르다.

외운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깨달아 행하는 문임을 알아야 한다. 외우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니 곧 음성의 모양이다.

마음에 없이 입으로만 명호를 외운다면 그것은 모양에 집착하여 복을 구하는 것이니 그릇된 짓이다.”  


달마스님이 말하기를,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기를 ‘무릇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또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사물이나 형체는 진실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모든 성인들이 닦으신 공덕을 말씀을 하실 때는 한결같이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음을 강조했다. 마음은 모든 성인의 근원이며 일만가지 악의 주인이다. 열반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에서 오는 것이요, 삼계 윤회의 고통도 또한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곧 세간을 뛰어나는 문이고 해탈로 나아가는 나루터이다. 문을 알면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고, 나루터를 알면 저 기슭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가만히 살피건대,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것이 얕아 겉모양만으로 공덕을 삼으려 한다.

힘써 공을 들여 작기도 손해보고 남도 또한 미혹하게 하며, 이러고서도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하니 어느 때에나 깨칠 것인가. 세간의 덧없는 유위법(有爲法)을 보고는 애써 애착하고, 상(相)이 없는 천진 면목을 말하면 아득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세간의 조그마한 즐거움을 탐착하고 다가올 큰 괴로움은 깨닫지 못한다.

이와 같이 공부해서는 헛되이 스스로를 피로하게 할 뿐 도무지 이익이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을 잘 거두어 안으로 돌이켜 깨치면 보는 것이 항상 맑아, 삼독심은 끊어져 사라지고 육적이 드나들 문은 닫혀 침범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때 비로소 한량없는 공덕의 갖가지 장엄과 무량 법문을 낱낱이 다 성취하여 순식간에 범부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깨침은 잠깐 사이에 있는 것인데 어찌 머리가 희기를 기다리랴. 참된 법문의 심오한 뜻을 어찌 갖추어 말할 수 있으랴. 여기서는 마음관하는 것만을 말하여 나머지 세밀한 일을 짐작케 하려는 것이다.” 하고 달마대사는 끝을 맺습니다.


이처럼 삼계가 다 마음 안에 존재하고 내 마음 안에서 내 생각 따라 일체의 시비와 선악과 분별로 인한 희노애락을 내가 만들어 가지는 것이고 일상은 거기에 매여 울고 웃고 괴롭고 슬프고 스스로 죽기도하고 다시 의욕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은 바로 순간순간 일어났다 꺼지는 일상의 내 생각임을 깨달으시고 항상 자기자신 스스로 자기생각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Song Woon Art Hall)



 (Song Woon Art Hall)

Song W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