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0. 19:1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백중기도 2재, 일요법회( 업은 바꿀수 없는 것인가) 07.07.22 광현스님
항상 반갑습니다. 벌써 오늘은 백중기도 2재이자 7월을 보내는 네 번째 주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보게되면 정부에서 위험지역이라고 가지 말라고 수십번을 넘게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제 3국을 통해 아프카니스탄에 봉사라는 미명으로 선교를 하러가자 정부에서 귀국행 비행기까지 보냈는데도 떠났던 분당의 샘물교회의 신도들이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반군들에게 붙들려 생사가 경각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무지할 만큼 어리석게 현실과 이상을 착각하는 신앙지상 주의자들이 전지전능한 주님의 능력을 외치고 유서까지 써놓고 정부에서 못 가게 하는 것은 종교탄압이라고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외치고 떠나더니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지금은 정부에서 늦장대처를 한다고 항의를 한답니다.
거기다 한국군을 철수해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입니까?
그들이 그렇게도 신봉하는 전지전능한 주님은 그들을 순교? 로 내몰고 있으니 당연히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모두 쓰임이 있어 천국으로 데려갈 차비를 하고 있나봅니다.
중생이 단견에 떨어지면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어지나 봅니다.
전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와 더불어 모두가 아침 녘에 눈 뜨면서 어젯밤에 계획했던 일들에 대한 일상적인 생각이나 자신의 직업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이 사실은 생각이라는 것에 지배를 받아서 이 몸과 입은 비즈니스를 해야 하고 기쁜 일과 좋은 일과 불쾌한 일과 괴로운 일들을 겪어내야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게 인생살이일 것이고 대부분의 중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자 현 주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상생활에서 항상 기쁜 일과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저 만나면 좋은 사람, 내게 이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만,
그런데 이 세상이 그렇게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데서 우리는 현대병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도대체 왜? 우리의 삶은 이래야만 되고, 그렇다면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1799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르 푸쉬킨”이라는 사람이 “삶”이라는 싯귀에서 말하기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이 가고나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하면서 결국에는 서구적인 새옹지마를 끝으로 시가 끝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운명에 매이지 말라," 일체가 인연과보에 따른다 해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업은 달라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의도적으로 업을 짓고 또 쌓아두었다면 그 과보를 받지 않은 채 그 업이 근본적으로 끝난다. 라고 나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 업의 과보는 현생에 받든지 아니면 반드시 내세에라도 받고야 만다.”
바로 업과 윤회에 관련된 내용으로 고타마 부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보면 “업”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업은 반드시 결과를 불러들인다고 말씀하고 또, 금생에서 과보를 받지 못하면 내세에라도 결과를 반드시 불러들인다고 밝히고 계십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생이라든가, 또는 내생, 전생이라고 하는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단어와 개념들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어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생 또는 전생, 내생이라는 말이나, 혹은 현세, 숙세, 내세라는 말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개념들 사이에 개입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생과 이생을 가르는 것도 죽음이고, 현생과 내생을 가르는 것도 죽음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전생에서 현생, 또는 현생에서 내생으로 넘어가는 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제가 항상 이해가 되기 쉽게 말씀드리는, 오늘 이 현재가 있다면 어제가 있었을 것이고, 죽지 않는 한, 내일은 올 것이고 금년이 있다면 작년도 있었을 것이고 역시나 죽지 않는다면 내년도 있을 것인데 이것을 과거 현재 미래라 한다면 왜 지금의 현생을 살고 있다면 어제나 작년 같은 과거생이 없었을 것이며 내일이나 내년같은 내생이 없겠습니까?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뇌의 한계로 다만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토록 빠르다는 전자계산기도 계산 수치한계를 벗어나면 한계초과라며 계산을 못하고 맙니다.
이처럼 우리의 뇌의 영역도 주어진 인식 가능한 현상계에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만을 인식할 뿐이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면 없는게 아니지만 인식이 안 되기에 이를 믿지 못하고 미혹할 미자(迷字)를 써서 믿을 수 없다 해서 미신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범부중생들이 자신들의 인식의 한계는 인정치 않으려는 아집 때문이지 결코 없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전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업을 받는 시기에 대해서 말씀드렸었고, 방금 말씀드린 부처님께서 “운명에 매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업과 윤회에 관해서 부처님의 말씀으로써는 가장 최초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얘기하다 보면 업이라는 표현은 분위기가 상당히 무겁고 어둡다는 겁니다.
또 과거전생의 죄업이라는 뜻으로 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이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길래…” 하든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고 한탄들을 하게 됩니다.
업이라는 것이 아주 무겁고, 또 죄스러운 것 등 죄업과 관련된 입장에서 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제로 부처님 경전 속에서 업의 가르침은 무겁고 어두움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과거 예속적인 죄업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은 가볍고 하얀 업을 이야기하셨고, 과거 예속적이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업을 이야기하셨으며, 죄업(罪業)보다는 복업(福業)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업의 본래 의미인 밝고 가볍고 미래지향적이고 복업으로서의 가르침들이 무겁고 어둡고 과거 예속적이고 죄업으로서의 분위기로 받아들여진 셈입니다.
정반대의 느낌이나 분위기로 업의 의미가 회전된 셈입니다.
희고 가볍고 경쾌하고 착한 업을 지어서 미래에 다시 말해 이생이나 다음 생에서 업을 지은 이후의 시간 속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은 업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악업을 경계하고 선업을 선양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업에 대한 가르침을 설할 때는 분명 가볍고 밝은 업을 지어서 미래지향적인 복된 삶을 추구하라는 뜻에서 업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업을 떠올릴 때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생각은 업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업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운명이란 말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혼자 힘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정해진 원리라고 할까요.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란 말 속에 담아서 사용합니다.
그것처럼 “업” 하면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즉,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무겁고 정해진 운명 같은 분위기와 무게를 업이라는 말에 부여합니다.
하지만 업이란 전혀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 바람이 분다 닻을 띄워라,” 남들은 바람이 분다고 포구로 돌아오는데 나폴레옹은 되려 거꾸로 바람을 이용하고 바람을 이기자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운명이나 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배 만배 절을 하다가 몇 백배 절을 하고 지치고 더 이상 힘이 들어 그만 두고 싶을 때 거기서 주저앉게 되면 자신의 업은 혹시나 가 역시나 가 되고 말지만, 기어이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정해진 횟수를 통과하게 되면 다해낸 것과 같이 우리가 매월 말에 철야로 자비참법기도로 삼천배의 절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스스로의 업은 스스로에게 달린 일인 것입니다.
이를 자작자수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지혜를 수반한 행위로 자신의 업은 스스로가 바꿀 수 있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불보살님들을 향한 지극한 신심과 원력에 따른 가피력인 셈인 것입니다.
요즘 정신없이 주변을 어지럽게 만드는 신앙지상주의에 떨어져 입으로는 주님의 곁으로 간다고 떠들다 막상 목숨들이 경각에 달리니 허겁지겁하는 어리석은 범부중생들의 나약함이 저 지경이란 말입니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번에 죽었던 김선일 씨는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국가도 원망하고 자신의 종교마저도 회의를 갖지 않습니까?
자신의 능력을 오판하는 과대망상으로 아니면 너무 쉽게들 생각하는 관념들이 자신의 생명을 사지로 끌고 간 것입니다. 이런게 바로 어리석은 의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아름다운 열대풍과 외래인들을 환대해주는 주민의 성격에매료된 업무에서나 일상 생활에서나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이
사회생활의 기본인 커뮤니케이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공통분모'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그래서 그에게 관심을 갖고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을 이끌 수있고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항상 상대방으로 부터
루스벨트는 항상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으로 부터 저자는 강조합니다.
루스벨트는 어떤 손님과 만나기로 하면
그의 직업이나 취향을 미리 파악하고 찾았고
사람은 자신과 닮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위글은 어느 심리학 교수의 저서를 토대로
유럽인들은 타이티를 "남해의 낙원" 비너스의 섬"이라 불렸다.
특히 바다와 석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있다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매즈러면 공통분모를 먼저 찾아야한다.
그런데 누구를 만나든 기를쓰고 차이점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서해안의 석양,정말 아름답네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직 타이티의 석양을 못 보셨군요"라고 하면서 초를 치고 김을 뺀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촛점을 마추지 못하고 공통분모를 찾아내지고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등을 돌린다.
있는 반면
항상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미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려면
그에 대해 고민한 뒤 공통분모를 찾는 사람은
항상 타인으로부터 환영받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며,
따라서 업무성과도 좋기 마련입니다.
차이점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합니다
저자(著者)는 "서해안의 석양이 참 아름답네요"라는 말에 대해
"아직 타이티의 석양을 못 보셨군요"라고 김빼는 사람을
'트러블 메이커'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이 존중받았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노력에서 비릇된 것이었다고
그가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에 대해 자료를
그 공통분모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살아잡았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려면
상대를 배려하고 공통분모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님이 요약한 글을
환상적인 "타이티" 섬사진
사이 사이에 옮겨적어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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