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0. 19:2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생명에 대한 예의*** -강 제윤-
“일본의 한 어부는 최근 돌고래를 죽이는 것을 그만 두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고래는 죽기 전에 눈물을 흘립니다.
…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제인 구달‘생명사랑 십계명')
내가 육식을 끊은 것은 5년 전이었다. 육식을 하지 않는, 하지 말아야 할 종교적, 사회적 이론은
수없이 많다. 또한 무슨 이유에서건 실제로 육식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랜 세월 육식을 해 왔었다. 그것은 어떤 이론도 나를 온전히 설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에게는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개인적인이유도 없었다. 육식이 건강이나 생태계에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육식을 끊지는 않았다.
육식과 자발적 가난이 조화될 수 없는 삶의 방식임에도 그랬다.
나는 집을 버리고 유랑 걸식하며 살아온 지 오래다. 그래서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 했었다.
또한 육식을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음식이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약으로 먹는다면 육식이든 채식이든 무관한 것이다.
그렇게 기름지고 값비싼 음식을 먹는 행위를 옹호하고 합리화 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값비싸고 기름진 음식들을 아무 죄책감 없이 얻어먹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까지 한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어째서 나는 베푸는 사람에게 가장 적은 부담을 주고 얻어 먹는
입장에서 가장 몸 가벼운 음식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얻어먹는 처지니 주는대로 먹는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이다.
나는 분명 가장 가난하고 소박한 음식을 달라고 요구했어야 했다.
이제 나는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다. 미몽에서 깨어나게 해 준 것은
제인 구달이었다. 나는 제인 구달의 육식금지의 이론을‘정의의 관점에서의 육식 금지’혹은
‘생명의 관점에서의 육식 금지’라 이름하고 싶다.
“가축에게 곡식을 먹이는 것은 심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고기를 먹고 낼 수 있는 에너지는 가축을
먹일 곡식을 재배하는데 드는 에너지의 7분의 1에 불과하다. 따라서 곡식에서 고기로 에너지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지구의 총 1차 생산량의 7분의 6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손실 되는 것이다.
어빈 래슬로우는 이러한 사실로부터‘육식에 의존하는 식습관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
육식은 인간 집단 전체를 먹이는데 꼭 필요한 자원을 낭비하려는 사람들의 소비 심리에서 나온
식습관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 제인 구달‘생명 사랑 십계명’)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희생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어떠한 존재도 타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육식은 악이고 채식은 선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채소하나 가꾸기 어려운 사막의 유목민들이 생존을 위해 육식을 하는 것을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고통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가 음식을 선택해야 할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떠한 식습관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느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고기 1킬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16킬로그램의
곡물이 소요된다. 밀 1킬로그램의 재배에는 물 4리터가 들어가지만 소고기 1킬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10만 리터의 물이 낭비된다.
인류가 고기 소비의 10%만 줄여도 곡식 1200만톤이 절약된다. 이는 기아로 죽어가는 6000만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양이다.
한 사람이 1킬로그램의 소고기를 먹음으로 인해 16명의 사람이 굶어 죽게 되는 것이다.
육식을하지 말아야 될 이보다 더 절실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 사람이 소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16명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소고기 1킬로그램을 먹지 않는 일만으로도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육식을 금지해야 할 이보다 더 분명한 이유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다른 먹거리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더 맛있는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인간들의 탐욕이 이 세상을 궁핍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단지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지구 저쪽의 형제들에 대해 무관심 하지는 않았는가. 엘리 위젤의 말처럼‘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인 것을.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저주인 것을. 육식금지는 단지
사람들만을 위한 행동은 아니다.
우주의 어떤 생명체도 그 자체로 살아야 할 이유와 존엄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생명들을 소중히 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의무다. 그것이 생명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씩 사람인 것이 부끄럽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생명에 대해 무례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개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주인을 위로 하는 경우가 흔하다. 생체해부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수술자의 손을 핥아 준 개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수술자는 가슴이 돌이 아닌
다음에야 죽을 때까지 회한을 가슴에 안고살아 갈 것이다.”
<코끼리가 울고 있을 때>(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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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님은 일정한 거처 없이 살아가는 떠돌이 시인이다.
10년 동안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500여 개)을 순례할 계획이다. 3년간 10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청도 한옥 학교’를 졸업했다. 1988년 <문학과 비평>을 통해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숨어 사는 즐거움》,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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