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2. 20:4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시린 새벽을 울리는 염불소리
나는 승려이지만 일반 재가불자보다도
전국의 사찰이나 중국, 미얀마, 인도 등의 성지를 가본 곳이 많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바로 전해야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는 말에 어려서부터 세뇌(?)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 결과 출가 전이나 출가 후나 각종 법회에 매달리느라 조금은 여유 있게 성지순례할 틈이 없었다.
성지순례와 관련해서 두 가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천주교의 성지라고 알려져 있는
천진암에 가서 변기영 신부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천진암에서 찍은 홍보물에 불교에 관해서
잘못 나타낸 것이 있어서 바로 잡기를 요구하러 갔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자기는 천주교인이지만
1년에 한 번 정도는 인도에 다닌다며 스님은 몇 번이나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한 번도 못 가봤다는 말을 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
마음속으로 빠른 시일 안에 가보겠다는 원을 세웠는데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가 버렸다.
예전에는 책을 본 정보만을 가지고 신도들에게 자신있게 인도를 이야기할 수 있었으나
요즘은 많은 분들이 직접 다녀왔기 때문에
어설프게 말했다가는 망신당하기 일쑤이다.
해마다는 못해도 꼭 한 번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번째는 선암사의 지허 스님을 뵈었을 때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스님은 외국의 성지를 여러 군데 다녀오셨지요?”
하고 여쭸는데,
“나는 불출不出주의요.
우리 것도 다 못 보았는데 뭘 남의 것을 보러 다니겠나?”
하시는 것이 아닌가?
변 신부를 만났을 때와는 다른 부끄러움이 다가왔다.
이 두 사건은 성지순례에 관한 견해를 중도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불교방송이나 불교텔레비전 등에서
사찰순례를 가자고 하면 말없이 따라 나섰다.
가는 도중에 사찰의 구조와 역사 및 불교의 기본 교리 등에 관해서
차를 갈아타면서 설명해주고 사찰에 가서도 아는 대로
전각의 구조나 가람배치와 그 사찰에서 교화 활동하셨던 스님 이야기를 해주니 신도들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그렇게 사찰순례를 가 보면 법당의 뒷벽에서
부처님의 일생이나 마음 찾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그려 놓은 그림인 십우도를 만날 수 있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 같은 스님이 바로 법철 스님이다.
법철 스님은 나의 사제이다.
나와 함께 은사이신 운산 스님을 모시고 정릉에 있는 천중사에서 같이 살았다.
은사 스님을 회주로 모시고 내가 주지랍시고 살림을 맡고,
법철 스님과 사숙이신 도종 스님과 다른 사제 둘,
그리고 지금은 출가해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는 지경 법사 등
제법 많은 식구가 한 솥 밥을 먹고 있었다.
말만 주지였지, 총무원 일이나 여러 단체의 활동으로
바깥 출입이 잦은 나를 배려해서 사제들이 많은 일을 나누어 맡아주었다.
그 중에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물먹은 솜덩이같이 피곤해서
새빨간 눈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가지고도
예불을 빼먹지 않았던 법철 스님이야말로 든든한 기둥이었다.
절에 돌아오는 시간이 열두 시이건 새로 한 시이건 꼭 예불을 모셨다.
처음에 내가 소임을 맡게 되자
“나 못 박아 놓고 돌아다니려는 것이지요?”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나는 우스갯소리인 줄 알면서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절대로 내가 예불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니까
마음 놓고 스스로를 위해서 예불 하시게.
나도 백암(栢巖) 스님께 배운 것이 있네.”
예불을 지극히 여기는 마음은 태고종의 종정을 역임하신 백암 스님께 배웠다.
성북동 태고사에서 모시고 살 때 백암 스님은
우리들이 한 번이라도 예불을 빼먹을라치면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타이르셨다.
“중이 예불 한 번 빼 먹으면 머슴이 쌀 한 가마니 불태워 없애버린 것과 같다.
단 세 번 절을 하더라도,
선사들이 단지 죽비 세 번을 치더라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그때 법철 스님도 태고종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월간불교>의 기자로 일하면서
불교를 배우고 있어서 같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법철 스님은 절에 살기는 했지만,
그는 중학교 정식 교사로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주변의 분위기를 위해서 머리를 스포츠 형식으로라도 기르라고 충고했지만
막무가내로 빡빡 깎고 어디서 얻어 입었는지 헐렁한 양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절에 와서는 항상 승복을 갈아입고 생활하였다.
천중사는 도심 속의 사찰이기는 해도 산에 자리하고 있어서
도량석 목탁이나 종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는 흔치 않은 사찰이다.
내가 도량석을 하면 법철 스님이 종성을 하고,
스님이 도량석을 하면 내가 종성을 했다.
장중한 음색인 나의 그것에 비해
법철 스님의 종성은 전통적인 음색의 비탄조라 마음의 울림이 컸다.
종마치 울리는 것부터가 정말 남다르게 제대로 배운 느낌이 들었다.
출가 수행자로서 여러 가지 추억이 있겠지만,
추운 겨울 새벽 달빛이 시리게 들어오는 법당에 앉아
종마치를 치면서 장엄염불을 청아하게 하는 맛이야말로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장엄염불은 시식에서 주로 많이 쓰기 때문에
슬픈 곡조로 하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시지만
나는 그 내용이 장중하고 깨달음의 소식을 담은 것이기에 힘 있게 하였고,
법철 스님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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