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차 부처가 되리라|_(())_범망경보살게

2009. 12. 28. 20:4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범망경

728x90

 

물고기가 하늘을 날듯이

 

삼보에 귀의하면 장차 부처가 되리라 하십니다.

 

범망경 새글입니다. 날씨는 추워지고 외출은 잦아들고

따스한 아랫목에 앉아 군밤타령이라도 해볼라치면

시골의 얼음구덩이 깨고  물 길어나르던 시절이

가끔 생각납니다.

 

극한의 환경에는 그 에 알맞게 몸의변화가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네 마음도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부단하게 할 것입니다.

 

모두에게 있는 불성을 일깨우시려면

범망경 보살게를 두루 섭렵하시는 길이

부처님 되시는 길이라는것을 유념하면서...

 

4. 장차 부처가 되리라


마음을 가진 일체 중생은

모두 다 불계를 섭해 있음에

불계를 받은 일체 중생은

부처님의 지위에 들게 되나니

위치가 대각과 다름이 없어

진실한 불자라 하는 것이니

대중은 모두 다 공경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계법을 들으라.


一切有心子는       皆應攝佛戒라

衆生受佛戒하면     卽入諸佛位로다.

位同大學已하면     眞是諸佛子라니

大衆皆恭敬하야     至心聽我誦하라.


 앞 구절에서 불계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셨고, 이번 게송은 지극한 마음으로 계법을 들을 것을 말씀한 구절입니다.

 

 마음을 가진 일체 중생 ! 그들은 모두 대승을 능히 배울 수 있는 소질[種性]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생들은 보살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 다 불계를 섭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가진 일체 중생은 모두 다 불계를 섭해 있다”는 구절에 대해 홍찬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있는 이란 어리석고 무지한 이와 믿음이 없는 악인을 따로 구별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이러한 악인과 무지한 사람은 나무나 돌에 마음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법사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으면 수계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섭(攝)은 ‘용납해서 받아 들인다’는 말이니,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땅히 보살정계를 받아야 함을 일컫는다.”


 有心者 簡愚癡無知 及無信惡人 如木石無心 木頭無異 故云但解法師語 皆得受戒 言攝者 納受也 謂要成佛 當納受菩薩正戒<略疏 卷二>


 이와 같이 대승을 받아들일 바탕이 있는 중생이 수승한 인연을 만나면 결정코 불계를 받게 될 것이며, 계를 받고 나서는 진리의 바다인 법해(法海)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부처님의 법해라고 할지라도 보살행을 닦아 올라가는 인위(因位)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게송에서 비록 부처님의 지위에 들게 된다고는 하였지만 바로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게 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게송에서 이 계를 받으면 “위치가 대각과 다름이 없다”고 한 까닭은 불계를 지키면 반드시 부처를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을 곧 그대로 부처님의 지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요컨데 이 대문이 부처님께서 대승의 근성을 지닌 일체 중생이 장차 모두 성불할 것임을 수기(授記)한 부분으로, 홍찬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했습니다.


  “불계를 받자마자 곧 그 지위가 대각세존과 같다고 한 것은 중생과 부처의 근원이 진실로 같고 마음의 성품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합해 있기 때문에 중생이라 이름한 것이며, 번뇌를 등지고 깨달음에 계합했기 때문에 부처라 이름한 것이다. 이제 마음자리의 정계를 받아 근본 바탕으로 단숨에 돌아가면 그 어찌 부처와 같지 않으랴.


 그러나 이미 그 지위가 대각(大覺)과 같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부처의 아들[佛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하지 않는 허공의 꽃에 대한 미혹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성품 바다의 덕이 아직 가득하게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차 부처될 가능이 있는 인불(因佛)이고 다 성취된 과불(果佛)은 아닌 것이다. 마치 왕자가 이마에 물을 쏟는 관정의식(灌頂儀式)을 마쳐서 나중에 왕위를 이을 자격은 갖추었지만, 지금은 다만 왕자일 뿐 아직 왕이 아님과 같다.“


纔受佛戒 卽位同大覺 良有生佛同源 心性無二 背覺合塵 名爲衆生 背塵合覺 名爲諸佛 今受心地正戒 頓復本源 豈不同佛 然卽位同大覺 猶名佛子者 何也 以其空華之惑未盡 性海之德未盈 是因佛 非果佛 亦猶王子已受灌頂 終紹王位 今但名王子 未名王也<略疏 卷二>



 이와 같이 불계를 받는 수승한 결과를 밝혀 불계를 받을 것을 권한 다음, “대중은 모두 다 공경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계법을 들으라”고 하여 이제부터 설할 심지대계를 열심히 들을 것을 부촉하고 있습니다.

 

 이 경문은 계가 인(因)이 되어 부처를 이루는 것인만큼 중생들은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최대의 공경과 온 마음을 기울여 부처님께서 외우시는 이 불계를 듣는 것이 불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보살계법을 듣는 것이 불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보살계법을 듣는 인연은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지극히 만나기 어렵고 귀중한 인연입니다. 이 인연의 소중함을 조금이라도 깨우쳐 안다면 어찌 마음을 방심할 수 있겠습니까? 홍찬스님은 ‘공경(恭敬)’과 ‘지심(至心)’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친히 불계를 받으시고 외우심은 이 계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계의 극치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때문에 두 번 세 번 거듭 지극한 정성으로 들을 것을 권하고 부촉하신 것이다. 혹 지극하지 못한 마음으로 망령되어 가려 막는다면 마음자리의 이 계법이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근원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밖으로 용모와 거동을 엄숙히 하여 성인의 계를 우러러 높이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안으로 정성과 삼가하는 마음으로 오로지 마음을 기울여 열성껏 듣는 것을 ‘경(敬)’이라 하며, 안팎이 하나의 바퀴처럼 합하는 것을 ‘지극한 마음[至心]’이라 한다.”


 佛旣親受親誦 是尊戒之極 故再三囑權至聽 倘不至心 則妄念壅閉 心地戒法無由得入 不入則不能復其本源 外肅容儀 尊仰聖戒 曰恭 內懷誠謹專注제聽曰敬 內外合轍 是曰至心 <略疏 卷二>



 우리 모두 안팎이 하나가 된 지극한 마음으로 이 보살계를 받고 마음의 문을 열어서 마침내 부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 ♡ ♡ ♡ ♡ ♡ ♡

마음아..미안해! 마음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니 뜻대로 못하게 하고 자꾸만 자꾸만 머리가 시키는대로 하라 해서

마음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늘 참아 달라고만 해서 늘 잊어 달라고만 해서 늘 모른 척 해달라고 해서

아픈 척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그저 가만히 있어 달라고 해서

마음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윽박 질러서 미안해. 내가 잘 못했어.

이런 날 이해해줄 수 있겠니? 이런 날 용서해줄 수 있겠니?

마음아,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늘

못다 이룬 꿈들

아쉬움 등에 업고

한해를 떠나 보냅니다.

 

다가올 미래의 아름다운 꿈들은

뜨거운 가슴에 안고..!

 

-초립-

 

SUSANNE LUNDENG-Jeg Ser Deg Sote Lam

(당신의 소중항 사람)

 

Susanne Lundeng은 1969년 노르웨이의 보더에서 태어났다.

9세때부터 활을 잡았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바이올린 수업을 받은 것은,

네덜란드 현악4중주단인 올랜도 쿼텟의 바이올린주자

 

아브리 엥게고드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정규 클래식 연주자로의 장래가 눈앞에 있었지만 그녀는 과감하게 자신의 음악적인 뿌리가,

 노르웨이 민족의 음악임을 깨닫고 점차 사라져가는

 노르웨이 지방의 포크 음악을 찾아채보와 채록을 했고,

 

 잊혀져가는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정서를찾아다니며 20대를 보냈다.

노르웨이의 위대한 작곡가인 그리그와 작가 입센이 그러하듯,

 가장 노르웨이적인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많은 결실을 거두어, 노르웨이 정부의 연구금과

더불어 수많은 상들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Jeg Ser Deg Sote Lam / Susanne Lunde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