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상정각(無上正覺)|_(())_범망경보살게

2009. 12. 31. 20: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범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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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상정각(無上正覺)

 

 이제 석가모니불은 보리수 아래 앉으시어 무상정각을 이루시고 보살의 라제목차를 비로소 말씀하려 하십니다.

 

 먼저 무상정각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무상(無上)의 정각(正覺)이라  부처님의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최상의 것임을 나타내고자  입니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깨달음을 부처님의 깨달음과 비교하면 작고 편협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르고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깨달음은 오온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나’에게는 고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아공(我空)’을 깨닫는 것으로 그칠 뿐, 세상에서 흔히 주장하는 창조주나 모든 법이 인연으로 모여 있는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거짓 존재임을 꿰뚫어볼  아는 법공(法空)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승의 삼현보살이나 초지 이상 십지까지의 십성보살(十聖菩薩)은 그들의 분수와 능력에 따라 깨달음을 얻으므로 무상각(無上覺)이라 칭하지 않고 수분각(隨分覺)이라  뿐입니다. 나아가  생만 있으면 부처를 이룰  있는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의 깨달음인 등각(等覺)조차도 아직은 최정상의 깨달음에는 미흡한 바가 없지 않기 때문에 무상각이라고 하지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그것을 범어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Anuttara-samyak-saṁbodhi)라고 하며, 번역하여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또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아(A)는 없다[無]. 뇩다라(nuttara)는 위[上], 삼먁(samyak)은 바르다[正], 삼(saṁ)은 두루하다[遍·等], 보리(bodhi)는 깨닫다[覺]의 뜻이므로 이것을 합하면 ‘위가 없고 바르고 두루 깨달음[無上正遍智]’이 됩니다. 또는 삼(saṁ)은 바르다[正], 뇩(yak) 두루하다[遍·等], 삼(saṁ)은 역시 바르다[正], 보리(bodhi)는 깨달음[覺]이어서 ‘위없이 바르고 두루한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으로 풀기도 합니다. 범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현장법사(玄裝法師) 이전의 번역본에서 무상정변지라 하였고, 현장법사 때부터 무상정등정각으로 번역하였기 문에 이와 같은 구별이 생기게  것입니다. 이를 역경사(譯經史)에서는 역(舊譯)과 신역(新譯)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을 요약하면 정지(正智)와 변지(遍智)또는 정각(正覺)과 변각(遍覺)이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바로 정지와 변지로 약할  있다는 것입니다. 

 

 정지(正智)는 근본지(根本智)입니다. 불생불멸의 본성 자리,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이전, 시공의 이전의 본체지(本體智)를 말합니다.  지혜는 관과 객관의 대립이 끊어진 절대 경계의 지혜이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 무루지(無漏智)라고 하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여여지(如如智) 또는 진지(眞智)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변지(遍智)는 후득지(後得智) 또는 차별지(差別智)라고 합니다. 현상계의 인연, 갖가지 업에 따라 이루어진 차별계의 인과법을 남김없이 뚫어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정지가 생사를 초월한 마음자리를 사무쳐 아는 지혜라고 한다면, 변지는 유의 생성하고 변멸하는 인연의 법칙을 깊이 사무쳐 아는 지혜입니다. 변지 후득지라고 하는 까닭은 정지를 먼저 얻은 다음에 더욱 닦아  지혜를 얻게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득지의 일부분은 정지를 얻지  범부의 경우에도 어쩌다 얻을  있지만, 그것은 온전하지 못할  아니 정지가 없는 변지는 참다운 깨달음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니다. 정지에도 높고 낮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변지에는 깊고 얕은 차이, 삿되고 바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차별지는 천안지(天眼智)·천이변지(天耳遍智)·타심지(他心智)·숙명지(宿命智)의 넷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천안지는 천안통(天眼通)으로써, 온갖 중생계의 일을 남김 없이   있는 신통력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무수한 보살들에게 노사나불의 연화대장세계를  보게 하신 것은 바로 천안통에 의한 것입니다. 많은 보살들 또한 천안통을 얻기는 하였지만 부처님에게 견주면 아직 크게 불완전한  불과합니다. 흔히 심령과학을 하는 이들이나 무당·만신 같은 이들도 엇을 본다고는 하지만 잘못 보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근원적으로 삿된 견이 있으면 모든 것을 바른 진리에 어긋나게 보기 마련입니다. 결국 그릇된 시각(視覺)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정지를 얻은 다음 후득지를 얻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입니다.

 

 둘째, 천이변지는  천이통(天耳通)으로서, 온갖 중생들의 말소리를 남김없이 들을  있는 신통력을 가리킵니다.

 

 셋째, 타심지는  타심통(他心通)으로서, 일체 중생의 여하한 마음씨, 떠한 생각이라도  비추어 보고 아는 신통력입니다.

 

 넷째, 숙명지는  숙명통(宿命通)으로서, 모든 중생의 전생과 금생과 내생 온갖 생애를 남김없이 꿰뚫어 아는 신통력입니다.

 

 이들 신통과 관련된 옛이야기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한해가 저무는 창가에서  

 

한해가 저무는 창가에서


우리라 하면서 내가 더 소중했고

가슴의 눈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한해가 저무는 창가에서

겨울 노을에 걸려 있습니다

 

 

가진 자를 더 가까이 했고

편안한 의자에

더 많이 앉곤 했습니다.


행여 입술로만 자선하고

정작 가난한 이웃에게

냄새나는 아픈 이들에게

나태한 자신은 아니었는지 돌아 봅니다 

 

 

진실의 모자를 씌워

물질로만 그들에게 던져 보내고

나는 내 세상을 즐기며

귀를 닫고 살지는 않았는지요

 

 

흙길 바람 불면 먼지로 눈 아프고

파란 하늘 구름 모이면 소나기가 되어도

너는 너

나는 나

내 안일함만을 보호하며

걸음 하지는 않았는지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마음 먼저 보냈고

기다리는 곳에 더딘 걸음으로

문명과 이기의 유혹을

억척스럽게 받들지는 않았는지요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나무 숲은

스스로 부딪히며 아픔을 삭입니다

서로의 등을 의지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별은 끝이 아닌 진정한 우리의 시작입니다

받고 싶은 만큼 받지 못했고

주고 싶은 만큼 주지 못했던 마음

부활시켜

더 큰 눈으로

더 높은 투명함으로

우리 존재의 신비를 꽃 피우고 싶습니다.

 

 

창틈으로 밀려 온 하얀 눈이 노을과 함께

붉게 펄럭이네요.

보내는 결단에 용기를 보내며

인애로운

노를 젓게 해 달라

영혼의 기도를 보냅니다. 

 
 생명의 마음
2009년12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