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 마음챙김 논쟁 <인경스님 vs 김재성 교수> 기사모음

2010. 1. 8. 21: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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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고,미워하고,상처받고
무관심해지는 모든 감정들
지난해에 모두 비워버리고
소중했던 추억만 간직한채


미래의 희망으로 발돋움하고
여명으로 밝아오는 아침
찬란하게 빛나는 화사한 미소
소망 한 웅큼 소쿠리 가득 담고


내일의 희망 안겨주는

해오름으로 새해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사하는 마음 입니다.


지난 해 11월 21일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 2009년 가을 학술대회에 거머박사를 초청해서 <서양심리치료에서 마음챙김과 연민>이라는 발표를 들었습니다.

당시의 내용을 법보신문의 이재형기자가 아래와 같이 기사로 소개했습니다. 그 후, 인경스님께서 '마음챙김'의 번역어에는 문제가 있다며 법보신문에 기고하였고, 김재성이 반론을 제기해서 3차례 논쟁이 있었습니다.

 

3차례 오고간 글을 첨부해서 보내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글의 내용에서 잘못된 점이 있으면 경책 부탁드립니다.

 

정원 김재성 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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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미국심리치료 주류 급성장

 
하버드 의과대 거머 교수 강연회서 밝혀
명상치료 과학적 증명…에이즈에도 효과
심리치료사의 41.4% 명상을 치료에 활용
기사등록일 [2009년 11월 30일 17:24 월요일]
 

“서구에서 불교명상치료는 과학적인 증명과 임상효과에 근거해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수많은 심리치료사들이 불교의 마음챙김(sati, Mindfulness)을 활용한다. 또 어느 대학에서건 불교명상치료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현재 불교적 심리치료는 미국 심리치료의 주류로서 가장 현대적이고 두드러진 형태의 행동치료로 주목받고 있다.”

상담·심리치료의 본고장 미국에서 불교명상치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심리치료에 접목된 지 불과 30여 년에 만에 불교명상치료는 단연 주류로 떠오른 것이다. 지난 11월 20일부터 24일까지 대한불교진흥원,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 상도선원, 중앙승가대, 동국대 등 주관으로 잇따라 열린 미국 하버드대 의과대학 크리스토퍼 거머(Christopher K. Germer·사진) 교수 초청강연회 및 세미나는 미국 심리치료의 새로운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거머 교수는 “불교명상치료는 그 어떤 치료방법보다도 불안, 우울증, 공황장애 등 심리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에이즈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불교명상을 하면 할수록 면역세포인 CD4-T세포가 증가함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현재 심리학계에서 매년 마음챙김과 관련된 논문이 1200여 편씩 발표되고 있으며, 미국인 심리치료사 중 41%가 그들의 치료에 마음챙김을 통합시켜 실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말 불교명상을 토대로 심리치료 기법(MBSR)을 개발한 존 카밧진 박사가 최근 출간된 『명상치료 핸드북』(2009년)에서 분석한 불교명상치료 서적 간행 흐름.

실제 미국의 저명한 심리치료 잡지인 「사이코테라피 네트워크(Psychotherapy network)」(2007년 3·4월호)에 따르면 미국에서 불교명상치료를 활용하는 심리치료사가 무려 41.4%로 나타났다. 이는 68.8%의 인지행동치료보다는 낮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정신분석(35.5%)을 뛰어넘는 수치다. 특히 올해 발간된 『Clinical Handbook of Mindfulness(명상치료 핸드북)』(페브리지오 디돈나 편집, 존 카밧진 서문)에 따르면 2000년까지만 해도 책 제목에 ‘마음챙김’이 들어간 불교명상치료 서적은 한 해 1~2권에 불과하거나 아예 없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불교명상치료 서적이 급증해 최근엔 연간 50여 권에 육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도표 참조) 이 같은 최근의 흐름과 관련해 미국 버클리대 메트케프(T. R. Metcalf) 교수는 “서양의 불교는 심리학화 되어가고 심리학자들은 불교적이 되어가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서구의 불교심리치료 열풍은 지난 5월 1~2일 달라이라마와 거머 교수 등이 주축이 돼 개최한 미국 보스톤 심리치료 관련 컨퍼런스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비싼 참가비용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저명한 심리학자와 심리치료사 등 1200여 명이 모여 불교명상치료를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벌여 미국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올해 컨퍼런스는 불교명상치료가 마침내 미국에서 주류 심리치료로 우뚝 섰음을 천명하는 자리였다는 평까지 받고 있다.

그러면 불교명상이 왜 그토록 주목을 받는 걸까. 거머 교수는 과학적인 효과를 그 이유로 꼽고 있다. 정신분석이나 인지치료로 못 고치는 질병도 불교명상으로 치료되는 임상사례가 두드러질 뿐 아니라 뇌과학 등 발달로 불교명상의 우수성과 효과가 과학적으로 속속 증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도 “불교의 마음챙김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순간순간의 상황을 지켜봄으로써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며 “불교와 결합된 제3의 심리치료는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장밋빛으로만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많다. 미국에서 심리학을 연구한 서광(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스님은 “자장면 원조는 중국이지만 우리가 먹는 자장면이 중국의 그것과 다르듯 불교명상은 이미 다른 종교와 문화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며 “명상치료가 단순한 사회복귀의 치료수준을 넘어 불교적인 이상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 불교계가 불교명상치료의 심화 및 체계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025호 [2009년 11월 30일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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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마음챙김은 정체불명 수행법”

 
인경 스님 본지 특별기고…“챙김은 번뇌의 일부” 비판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10일 12:13 목요일]
 

서구 불교명상치료의 핵심 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가 마음챙김, 알아차림, 깨어있음, 주의집중, 새김, 의식, 마음모음 등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는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번역어 중 하나인 ‘마음챙김’이 비불교적인 용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은 본지 특별기고를 통해 “마인드풀니스의 번역문제는 불교정신과 심리치료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과 취지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라고 전체한 뒤 “마음챙김이란 용어는 불교의 근본정신과 심리치료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왜곡시킬수 있는 위험이 많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인경 스님 기고문에 따르면 마인드풀니스는 ‘사티(sati, 念)’에서 유래된 번역어지만 최근 방한했던 미국 하버드대 크리스토퍼 거머 교수처럼 ‘통찰명상’으로 번역되는 위빠사나에 더 가까운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위빠사나란 심리현상을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그대로’ 지켜봄을 의미하는 것이지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는 게 스님의 지적이다.

스님은 또 “마음챙김이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무아설(無我說)과도 어긋나는 정체불명의 수행법”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는 순간순간 생멸하는 심리현상을 챙겨서 가져지닐 수가 없고,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게 바로 불교의 수행정신이라는 것.

그런데 마음챙김이란 번역어는 심리현상을 수용하고 허용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챙김을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자기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자기 몫을 챙기고 관리하는 소유양식을 부추기는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때문에 ‘챙김’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번뇌의 일부이고 심리치료가 아닌 환자의 증상에 해당한다는 게 스님의 비판이다.

인경 스님은 “(불교명상은) 어둠(無明) 속에서 마음현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조작하지 않는 채로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봄으로써 그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고 경험적으로 내려놓게 되는 것”이라며 “챙기는 게 아니라 내려놓는 것, 이것이 불교명상과 동양적 심리치료의 본질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한편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대표적인 불교학자로는 서울불교대학원대 김재성 교수,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미산 스님 등이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026호 [2009년 12월 10일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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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특별기고-동방대학원대 교수 인경 스님

 
“‘마음챙김’ 번역어는 비불교적 개념”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03일 19:36 목요일]
 

불교는 챙기려는 게 착각임을 깨닫는 것
‘챙김’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번뇌 일부

동서양의 문화적인 교류가 심화되면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불교의 명상법이 심리치료의 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때 불교명상과 심리치료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용어가 바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이다.

일부 불교학자나 심리학자들이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새로운 학문과 관점이 소개가 될 때는 여느 문화체계에서도 반드시 뒤따르는 논의가 번역어의 적절한 선택문제이다. 마인드풀니스의 번역문제는 불교정신과 심리치료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과 취지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 필자는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곧 마음챙김이란 용어가 불교의 근본정신과 심리치료의 의미에 대해서 심각하게 왜곡시킬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서구 심리치료자들은 ‘마인드풀니스’란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대부분 불교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마인드풀니스는 ‘사티(sati, 念)’에서 유래된 번역어이다. 하지만 서구의 심리치료자들은 결코 사티(sati, 念)의 의미만을 한정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불교의 명상법을 서구사회에서 선구적으로 심리치료에 적용한 존 카밧-진(John Kabat-Zinn)은 마인드풀니스란 개념을 ‘주의력의 조절’과 불교수행의 ‘팔정도’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불교에서 말하는 ‘법’과 같은 매우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러면서 좁은 의미로는 ‘현재의 경험에 대해서 판단 없이, 주의를 집중하는 자각(awareness)’으로 규정한다.

또한 존 듀네(John Dunne)는 최근에 논의된 불교학자와 심리치료 학자들의 워크숍에서 ‘마인드풀니스’의 구성요소로서, 기억과 재생을 의미하는 ‘사티(sati)’, 철저한 앎과 바른 이해를 의미하는 ‘삼빠잔나(sampajanna)’, 방일하지 않음이나 주의 깊음을 의미하는 ‘압빠마다(appamada)’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정의한다.

대체로 서구 심리치료 학자들은 마인드풀니스를 사티보다는 오히려 통찰명상으로 번역되는 위빠사나(Vipassana, 觀)에 더 가까운 의미로 사용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크리스토퍼 거머(Christopher K. Germer) 교수이다. 그는 『Mindfulness and Psychotherapy』(김재성 옮김, 『마음챙김과 심리치료』)에서 마인드풀니스를 ‘순간순간의 자각(awareness)’으로 정의하고, 집중명상(samatha)과 짝을 이루는 통찰명상(vipassan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C.K.Germer, 2005, p.15. p.289).

주지하다시피, 위빠사나란 심리현상을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 것이다. 국내에서 어떤 학자도 위빠사나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음챙김은 ‘마음을’ 챙긴다는 것과 ‘마음이’ 챙긴다는 두 가지의 의미로 이해된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불교의 교설에 의하면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곧 순간순간 변화하는 까닭에, 챙겨서 가져지닐 수 있는 대상이란 없다. 그래서 마음챙김은 불가능하다. 마음‘이’ 챙긴다는 경우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어떤 마음의 존재를 전제하게 된다. 이것은 불변의 어떤 주체를 상정하게 되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설(無我說)에 위배된다.

결국 마음챙김은 정체불명의 수행방법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생멸하는 심리현상을 챙겨서 가져지닐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수행정신이다. 만약 챙겨야할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주어든 목적어로 사용되든지, 허구의 환상을 만들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강박과 긴장을 만들어낸다. 불교명상의 근본정신은 무엇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챙겨야할 그 무엇도 본래 존재하지 않고, 챙기려는 그것이 환상이고 착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서구 심리치료자들은 불교의 명상법인 마인드풀니스를 임상적인 상황에 적용시킨 것일까? 서구 심리치료학은 충분하게 다양한 이론과 수준 높은 심리치료 프로그램이 있는데, 왜인가?

불교명상을 심리치료에 적용한 서구의 심리치료자들은, 기존의 서구 심리치료 이론들이 대부분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들로, 내담자의 경험을 챙기고 관리하여 통제하려는 방식으로 심리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런 심리치료자나 환자의 태도는 불안이나 우울증과 같은 심리적인 증상들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오히려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임상적 실험보고서가 학계에 계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불교명상에 기반한 새로운 관점의 심리치료자들은 마음현상들을 그 자체로 수용하고 지켜보는 동양적인 가치가 효과적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불교명상을 수용한 이유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마인드풀니스’이란 명상법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사유방식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면서 대두된, 심리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음챙김이란 번역어는 심리현상을 수용하고 허용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챙김을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자기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자기 몫을 챙기고 관리하는 소유양식을 부추기는 현대 자본사회의 병폐이기도 하다.
챙김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번뇌의 일부이고, 심리치료가 아닌 환자의 증상에 해당된다. 무엇인가 결핍감을 느끼는, 건강하지 못한 심리상태에서 비롯된, 허구적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적인 심리기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인드풀니스’를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마인드풀니스 테라피(Mindfulness Therapy)’처럼, 미술치료나 인지치료처럼 학파의 명칭으로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명상치료’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번역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에 마인드풀니스를 수행이나 심리치료에서 기술적이고 좁은 의미로서 사용할 경우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해야 옳다고 본다. 어둠(無明) 속에서 마음현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조작하지 않는 채로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본다’는 의미이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고, 경험적으로 내려놓게 된다.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 이것이 불교명상과 동양적 심리치료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동방대학원대 교수·한국명상치료학회장

 

1026호 [2009년 12월 03일 19:36]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4162&Hcate1=4&Hcate2=28&Hc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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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마음챙김은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

 
특별기고-서울불교대학원대 김재성 교수
마음챙김에는 초기불교․선 정신 담겨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 의미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10일 12:08 목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며 “마음챙김은 비불교적인 용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가 인경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사띠의 대표적인 번역어는 ‘mindfulness 마음챙김’, ‘awareness 알아차림’, ‘bare attention 순수한 주의(집중)’이며, 어느 말도 사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필자도 이 용어들을 ‘관찰’, ‘깨어있음’ 등과 함께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놓치지 않고 마음을 챙기거나, 대상을 알아차리거나, 대상에 순수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 이 순간 깨어있는 것, 이 모든 의미가 빠알리어 사띠(sati)에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 수행이 필요하다.

문제가 된 ‘마음챙김’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 사띠 또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의 다양한 의미나 사용례에 대해서는 임승택 교수의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보조사상 16)김정호 교수의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마음챙김의 임상적 및 일상적 적용을 위한 제언’(한국심리학회지 건강, 9-2)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마음챙김’이라는 조어(造語)는 1988년에 고요한소리에서 출판된  『부처님, 그 분 - 생애와 가르침』(피야다시 스님 지음/ 정원 김재성 옮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이 책을 번역한 필자는 팔정도의 정념(正念, samma-sati)과 그에 대한 영역 right mindfulness를 옮기면서 활성스님과 번역어 선정문제로 고민하였다. 활성스님께서 참선에서 ‘화두를 챙기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정념(正念)을 ‘올바른 마음 챙김’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하셨고 필자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기억한다.

sati라는 초기경전의 용어를 번역하면서 초기불교에서 ‘마음’을 가져오고, 참선의 화두를 드는 정신이 배어있는 말인 ‘챙김’을 결합시켜 새로운 조어(造語)를 만든 것이다.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의 정신을 함께 접목시킨 신조어이다. 이후, 필자와 고요한소리에서는 사띠와 그 번역어인 mindfulness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마음챙김’을 사용해왔다.

필자는 1991년 여름, 미얀마에서 우 빤디따 사야도의 지도 아래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들은 법문을 “지금 이 순간 그대는 깨어있는가”(고요한소리, 1992년 5월 발행)로 정리해서 발행할 때, ‘사띠’라는 용어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사띠를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마음을 챙기다’ 또는 ‘마음이 대상을 챙기다’라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마음챙김’을  ‘마음으로 현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다’는 의미로 사용해 왔다.

(‘마음챙김’에 대한 초기불교와 주석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각묵스님의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2004 개정판) 서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띠는 마음작용 또는 마음부수[心所]의 하나이다. 이 때 마음작용은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연기(緣起)하는 정신활동을 말한다. ‘마음이 대상(신,수,심,법)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다.

‘화두를 챙기다’라는 말은 ‘항상 화두를 놓지 않고 열심히 참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며, 각묵스님은 ‘한국 선방에서 정착된 화두를 챙긴다는 표현은 화두를 거듭거듭 제기하는 것을 멋지게 표현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2003년 2월 지리산 실상사 화림원에서 열린 제7회 선우논강의 발제문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각묵스님이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같은 점 5가지 가운데 한 가지로 제시한 ‘챙김을 중시한다’에서 표현한 말이다. ‘즉 화두라는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간화선 수행법과 몸과 마음의 특정 현상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로 수관(隨觀)할 것을 가르치는 위빠사나 수행법은 화두나 법, 대상 혹은 명상주제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수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챙김’이라는 말은 대상에 대한 접근 방식을 의미하지 ‘챙겨서 가져지닌다’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사실 수행의 과정은 애쓰는 과정, 노력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유위(有爲)의 행위를 포함하지만, 유루(有漏)는 아니다. 범부의 입장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인 ‘마음챙김’은 ‘알아차림’과 마찬가지로 번뇌를 막아내고 없애는 역할을 하는 마음작용이지 번뇌는 아니다. ‘마음챙김’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필자의 위빠사나 수행 경험이나 수행지도 경험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자기 관리나 통제’의 의미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마음챙김은 있는 그대로의 경험에 마음을 열어놓고, 몸과 마음의 온갖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알아차리는 민첩한 심리활동으로 실제 수행과 생활에서 적용하고 있다. 마음을 챙길 때, 우리는 순간순간 경험의 영역에 나타나는 대상에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심리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번뇌의 침입에서 지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임승택 교수의 ‘마음지킴’도 사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일상 언어로 ‘챙긴다’라는 말은 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 구글에서 ‘챙긴다’로 검색을 해보면, ‘대사증후군 조기 발견 건강 챙긴다’ ‘Happy Mind’로 정신건강 챙긴다’ ‘직원 건강 회사가 챙긴다’ ‘법을 알아야 재산도 자신감도 챙긴다’가 검색된다. 소중하고 좋은 것을 지키거나 돌본다는 의미이다. 

빠알리어 사띠의 번역어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말 번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PTS의 빠알리-영어사전(Pali-English Dictionary, 1921-1925 p.672)에 의하면, 사띠sati의 의미는 memory(기억), recognition(인식), consciousness(의식), intentness(주목, 주시), mindfulness(마음챙김, 주의깊음) 등이다. 디가 니까야를 처음 영역한 리스 데이비스는 1899년과 1911년 sati를 ‘mindful’(Dialogues of the Buddha, Vol. 1, p.80)로  satipatthana를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의미의 ‘setting-up of mindfulness’(Dialogues of the Buddha, Vol. 2, p. 327)로 옮기고 있다. 필자가 아는 한 sati를 ‘mindful’ 또는 ‘mindfulness’로 영역한 것은 리스 데이비스가 처음이다. 이후, 대부분의 영어 번역이나 저술에서 사띠의 번역으로  mindfulness를 사용하고 있다.

『불교선수행의 핵심(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1962)에서 냐나포니카 스님은 사띠를 마하시 사야도의 사띠파타나 위빠사나(마음챙김에 근거한 위빠사나) 법문에 의거해서 ‘순수한 주의(집중) bare attention’으로 번역하였다. 정신과의사이자 위빠사나 수행자인 마크 엡스타인은 그의 저서 『붓다의 심리학(The thought without thinkers)』(1995, 2005) (전현수 역, 145쪽 이하)에서 ‘순수한 주의집중’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정호 교수가 마음챙김과 함께 이 용어를 신경증적 주의(neurotic attention)에 대비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지도자 고엥까지는 사띠를 알아차림(awareness)으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사띠는 ‘관찰 또는 관찰하는 힘’(마하시 사야도 우 빤디따 사야도, 우 자나카 사야도 등), 깨어있음(alert!, wakefulness), 알아차림(noting, awareness)이라는 말로도 사용되므로 사실 영어 표현 자체에도 상당히 다양한 번역이 시도되고 있다.

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MBSR)의 창시자인 존 카밧진 박사의 주저서 『Full Catastrophe Living』(1990)을 번역한 장현갑 교수, 김교헌 교수도 1998년 번역본 『명상과 자기치유』(학지사)에서는 mindfulness의 번역어로 평범한 주의집중 또는 주의집중 명상이라고 사용하였는데, 2005년 2판에서는 책제목을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로 바꾸면서,  ‘주의집중’을 학계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마음챙김’으로 용어를 바꾸었다고 한다. 김정호 교수는 1994년 이후, 고요한소리의 출판물을 참고로 하여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심리학계에서 처음으로 ‘마음챙김’을 사용하였다.

사실 심리학계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 사용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분이 김정호 교수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자나 지도자 사이에 사띠의 번역어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서양의 심리치료에서 마음챙김을 ‘현재의 경험을 수용의 태도로 알아차림’(마음챙김과 심리치료, 김재성 역, 36쪽)으로 사용하는 것은 원래 의미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사적(私的)이지 않고 공적(公的)인 도구이자, 사용자들의 의식과 경험, 문화를 담고 있다.

‘마음챙김’은 1988년 이후 처음 사용된 이후, 사띠와 mindfulness의 우리말 번역어로 사용되어 왔다. 필자를 위시로 하여, 각묵스님, 대림스님, 미산스님, 김열권 법사, 김정호 교수, 김교헌 교수, 장현갑 교수 등이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띠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좋은 우리말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될 것이며 필자도 사용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는 영어의 mindfulness가 가장 보편화된 용어이고 mindfulness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로 ‘마음챙김’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알아차림’ ‘자각’은 영어 awareness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mindful 또는 mindfulness의 영어사전의 용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sati는 영어 mindfulness와 가장 가까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www.oed.com, 2009년 12월 9일 검색)을 보면 mindful의 의미는 형용사의 용법으로 ‘좋은 기억을 가진’ possessing a good memory, ‘주의 깊은’ full of care; ‘조심성 많은’ heedful, thoughtful, ‘기억으로 가득 찬’ full of memories이고 술어로 사용될 때는 ‘상기 또는 기억하고 있는’ having recollection or remembrance, ‘사려 깊은 또는 주의 깊은’ taking thought or care, ‘조심성 많은’ heedful, ‘의식하고 있는 또는 알아차리는’ being conscious or aware이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로 불교나 요가에서는 ‘순간을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fully aware of the moment, ‘이러한 알아차림을 의식하고 있고 주의하고 있는’ whilst self-conscious and attentive to this awareness의 의미로 사용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명사형인 mindfulness는 ‘mindful한 상태나 자질’ state or quality of being mindful ‘주의(집중)’attention; ‘기억’memory‘의 의미로 설명하면서 요가와 불교의 맥락에서는 ‘순간을 완전히 알아차리고 있는 명상 상태, 또는 이러한 알아차림에 자기의식과 주의하고 있는 상태’ the meditative state of being both fully aware of the moment and of being self-conscious of and attentive to this awareness, ‘자기-자각(알아차림)’ self-awareness로 정의하고 있다.

김재성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1027호 [2009년 12월 10일 12:08]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4248&Hcate1=4&Hcate2=28&Hc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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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김은 불교 본질 왜곡하는 개념”

 
특별기고-인경 스님, 김재성 교수에 재반박
마인드풀니스는 사띠 아닌 위빠사나 번역어
챙김은 소유방식 내려놓는 명상수행에 역행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17일 11:49 목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사진>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며 “마음챙김은 비불교적인 용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에 인경 스님이 다시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김재성 교수(이하 김 교수로 약칭함)의 반론문을 읽고 난 전체적인 소감은 이렇다. 문제의 본질은 비켜가면서, “많은 분들이 마음챙김이란 용어를 채택하고 있기에 그대로 사용하면 어떨까요?”라고 권유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실제 필자는 이런 식으로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함께 동참할 수 없는 중요한 관점과 가치가 있다.

먼저 김 교수에 의하면 마음챙김이란 번역어의 출발점은 ‘고요한 소리사’를 설립한 활성스님이고, ‘화두챙김’과 마찬가지로 사띠(sati)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자는 제안을 김 교수가 수용함으로써 비롯되었고, 이런 노력이 결과적으로 심리학자인 김정호 교수와 장현갑 교수의 번역어 사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챙김이란 번역어는 화두챙김에서 비롯된 차용한 용어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씨앗이 아닌가 한다. 이런 번역어의 선택은 격의(格義)불교적 태도이다. 격의란 다른 문화의 용어를 수용할 때, 기존의 주류문화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사한 용어를 채택하여 이해하고 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불교사에서 초창기에 불교의 ‘슌야’(śūnya, 空)를 기존의 노장에서 말하는 무(無)를 차용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격의는 문화적인 편견의 일부로서 그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마음챙김은 김 교수에 의하면 초기불교의 ‘마음’과 간화선에서 화두‘챙김’을 결합한 신조어이다.(유사한 신조어는 마음집중, 마음지킴이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챙겨서 가질 무엇도 없다. 더구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건처럼 챙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고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실존적 의심으로서 구체성과 지속성을 가진 질문(이뭣고)이 존재한 까닭에 적절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챙김이란 표현이 잘못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두의 본질은 챙김이 아니라 ‘의심’이다. 간화선의 심리학적인 근거는 대승불교의 불성, 견성사상이고, 화두는 이것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자신의 본래적 성품, 불성을 깨달아 체험하는 것이다. 남방수행론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몸과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남방의 사띠와 북방의 화두는 근본적으로 그 토대가 다르다. 이런 심리학적 관점과 방법적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는 채 오직 ‘챙김’이란 생뚱한 용어로 그 동질성을 꿰어 맞추는 것은 사실 너무나 억지 주장이다. 그래서 격의는 어설픔의 상징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간화선을 왜곡시키고 초기불교 수행의 본질을 손상시킨다. 만약에 사띠를 구태여 번역을 할 것이라면 간화선에서 차용할 것이 아니라 남방수행의 근간을 이루는 초기불교의 관점에 충실한 번역어를 선택했어야 했다.

초기불교에서 가장 강조한 교설 가운데 하나가 애욕으로부터의 ‘멀리 떠남[遠離]’이다. 사띠는 바로 이런 애욕으로부터의 떠남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이다. 애욕으로부터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애욕의 폭류에 휩쓸리거나 저항하지 않는 채로 ‘현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차림’ 혹은 ‘깨어있음’이라고 하지 ‘마음챙김’이라고 결코 말하지는 않는다. 김 교수는 챙김이라는 말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하지 ‘챙겨서 가져지닌다’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챙김이란 낱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물건’을 가져서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올바른 국어의 사용법이다. 김 교수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좋은 의미로 건강, 재산, 자신감을 챙긴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챙김이란 의미는 건강 등을 분명하게 ‘챙겨서 갖는다’는 것이지, 그것들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애매한 뜻이 아니다. ‘숙제를 챙겨라’ ‘너의 물건을 잘 챙겨라’ ‘너는 바보처럼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니’ 이것들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들이다. ‘챙기면 챙길수록 즐거운 해택이 있는 현금 영수증’이란 광고문구도 있지 않는가? 이 말 속에는 자신[我]과 자신의 소유물[我所]을 잘 관리하고 통제하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이런 방식들이 자아실현이란 미명아래 이루어진 현대사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기업의 운영방식이고 교육과 심리치료의 방식들이다.

이렇게 챙김이란 개념은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물들어진 용어이다. 이런 용어로 불교명상을 기술하는 것은 애욕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훼손시킬 위험이 많다. 우리의 문화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별하고, 나쁜 것은 배척하고 건강과 재산과 같은 좋은 것만을 챙기도록 조장한다. 존 카밧진은 『Full Catastrophe Living』에서 이것을 ‘행위모드(Doing mode)’라고 하고 반면에 명상은 행위 하지 않고 조작하지 않는 ‘존재모드(Being mode)’라고 말한다. 제목에서 Catastrophe는 재앙, 불행, 재난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조건화된 학습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을 챙긴다. 명상과 심리치료는 이런 소유양식의 자동조종(automatic pilot)을 멈추는 것(non-doing)이고, 재산과 건강의 상실에서 오는 고통을 삶의 일부로서 수용하도록 돕는 존재방식의 수련(practicing being)이다.

그런데 챙기라? 챙김은 명상과 심리치료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 자본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 아닌가? 이것은 소유방식을 ‘내려놓는’ 명상수행의 존재모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어이다.

또한 김 교수는 마음챙김이 번뇌의 마음현상[心所]에 속하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사띠라는 빠알리어는 탐착과 같은 번뇌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챙김이란 한글의 의미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탐욕을 강화시키고 소유욕을 부추기는 근본 번뇌에 속한다.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챙김이란 용어에는 변하는 마음현상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한다는 특별한 의미[別境心所]를 내포하지 않는다. 사띠나 위빠사나와 같은 명상실천을 표현하는 용어는 그 철학과 실천의 기본적인 정신을 반영하여주는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

이번에 내한한 크리스토퍼 K. 거머 교수의 경우처럼 서구의 연구자나 심리치료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란 용어는 사띠가 아닌 위빠사나의 번역어이다. 김 교수를 비롯하여 심리학계의 김정호 교수, 장현갑 교수는 사띠의 번역어뿐만 아니라 통찰수행을 의미하는 위빠사나까지도 동일하게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과연 이것은 솔직한 태도인가 묻고 싶다. 집착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decentering, 탈중심화] 객관적으로 바라봄[defusion, 탈융합]이라는 위빠사나의 심리치료적 의미를 과연 ‘챙김’이란 술어로 담아낼 수가 있는가? 명상에 기반한 수용전념치료(ACT)에서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수용(acceptance)’인데 과연 수용의 의미를 챙김이란 용어로 이해가 가능한가? 분명하게 챙김이란 용어는 심리치료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전혀 타당한 번역어는 아니다.

최근에 불교명상법이 심리치료에 활용되고 대중적인 관심을 받다보니 명상이 급속하게 상품화되고 있고,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다. 이러한 때에 불교명상의 중요한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다시 요청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사띠,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의 차이점과 상호관계에 대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사띠(念)는 판단 없이 현재의 순간순간에 주시하는 자각이다. 사마타(止)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마음이 머무른 상태로서 집중을 의미하고, 위빠사나(觀)는 대상의 변화를 지켜봄으로써 그 사물을 본질을 통찰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이들의 관계는 사띠에 의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개발된다. 그래서 사띠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기반이면서 이들 양 속성을 모두 가진다. 사띠의 이런 양면적 성격이 사띠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번역어를 만들어낸 요소이다.

사띠를 ‘주의’나 ‘머물기’, 혹은 ‘지킴’으로 번역하면 집중이나 삼매에로 나아가는 사마타와 같은 선정계열로 파악한 것이다. 이렇게 번역한 대표적인 인물은 ‘마음집중’으로 번역한 남방불교를 처음에 국내에 소개한 거해스님이다. 김열권과 조준호와 임승택 교수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조준호 교수는 사띠를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번역하면서 제3선정에서 실현된 것으로 본다.) 사실은 이 관점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관념이다. 반면에 사띠를 ‘알아차림’이나 ‘자각’ ‘깨어있음’으로 번역을 한다면 통찰과 지혜에 이르는 위빠사나의 관점을 중시하는 번역이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남방불교에서 새롭게 조명된 부분이다. 이렇게 번역하는 불교학자나 심리학자와 수행 실천하는 이들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대표적으로 우 실라난다의 『염처경』(보리수선원, 2004)을 국내에 소개한 심준보, 명상을 기반한 도식치료(schema therapy)인 『감정의 연금술emotional alchemy』(생각의 나무, 2005)을 소개한 윤규상과 이동우 교수 경우가 그렇다. 특히 명상을 기반으로 심리치료를 진행하는 서구 명상치료자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면 ‘마음챙김’이란 신조어는 어디에 분류할 것인가? 이것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명상술어이다. 남방의 위빠사나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북방의 간화선 화두도 아니다. 사마타에 해당하지 않고, 위빠사나의 의미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띠에 속하는 개념인가? 이것도 제대로 설명하여 주지 못한다. 이것은 잘못된 용어선택, 격의(格義)이다.


1028호 [2009년 12월 17일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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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챙김, 상업주의 용어 단정은 억지”

 
김재성 교수 인경 스님에 재반론
사띠 의미 다양…‘잊지 않고 지님’ 용례도 많아
‘알아차림’은 사띠 아닌 삼빠잔나 개념에 가까워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24일 13:03 목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사진>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에 인경 스님이 다시 “불성론에 근거한 간화선의 챙김을 사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며 “마음챙김은 소유방식 내려놓는 명상수행에 역행하는 것으로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김재성 교수가 다시 인경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필자는 ‘사띠’의 의미와 그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신 인경스님과 법보신문에 감사드린다. 이 논의를 통해 사띠와 사띠빳타나, 아누싸띠, 그리고 위빠사나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되기를 바라면서 인경스님의  ‘마음챙김’ 또는 ‘챙김’이라는 용어에 대한 부정적 판단에 대한 반론을 3가지 측면에서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사띠’가 초기경전에 사용된 용례와 함께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 sati라는 용어는 1)사띠, 2)사띠-삼빠잔나, 3)사띠빳타나, 4)까야가따사띠, 5)아나빠나사띠, 6)아누싸띠, 7)빠띠싸띠 등으로 사용된다. 이 가운데  1), 2), 3)과 6)의 용례를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펴본다.

1)사띠(sati)는 ‘기억하다(sarati)’의 명사형이다. 경전에서 ‘마음챙기며(sato)’, ‘항상 마음챙기며(sadā sato)’라는 말로 자주 사용되는 ‘사따(sata)’는 과거분사형이고, ‘사띠를 지닌’이라는 의미이다. ‘사띠만뜨(satimant)’도 같은 의미이다. 사띠가 ‘기억’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는 ‘아난이 사띠를 지닌 자 가운데 으뜸’(AN i, 24; 대림스님 역, 앙굿따라 니까야 1권, 126쪽)이라고 할 때이며,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에서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Sn 151게)”고 한다. ‘이(자애의) 마음챙김’은, 자애의 마음을 잊지 않고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항상 모든 존재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놓치고 있지 않고 지닌다는 의미이다. 위의 두 맥락에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색하며,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사또와 사띠만뜨로 제시된 다른 예에서는 ‘기억을 지닌’이라는 의미보다는, ‘놓치거나 잊지 않은’ ‘챙기고 있는’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항상 사띠를 지니고’라는 의미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각기관을 잘 단속하면서 ‘현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다’,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잘 챙기고 있다’는 의미이다.

2)사띠는 ‘사띠-삼빠잔나(sati-sampajañña)’라는 복합어로 자주 사용되며, 정념(正念)-정지(正知)로 번역된다. 이 복합어는 사띠와 삼빠잔나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사띠는 마음챙김(mindfulness)으로 삼빠잔나는 ‘분명한 앎’(clear comprehension) 또는 ‘완전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으로 번역된다. 엄밀하게 사띠와 삼빠잔나는 다른 용어이다. 이 때 ‘사띠’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있는, 또는 챙기고 있는 마음상태’를, ‘삼빠잔나’는 ‘그 대상을 온전히 알거나,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이 복합어에 대한 표현의 하나는 ‘마음챙기는 알아차림(mindful awareness)’이다. 이처럼 사띠 또는 마인드풀니스를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삼빠잔나’의 의미를 포함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야 그 대상을 완전하게 알 수 있고, 대상을 완전하게 알아야 그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이것이 마음챙김과 (완전한) 알아차림이 함께 설해진 이유이다.

3)사띠빳타나(satipatthāna)는 ‘사띠의 확립’이라는 의미이다. 『대념처경』 등에서 사띠빳타나가 사용되고 있다. 『대념처경』에서 제시된 사띠빳타나의 방법은 아누빠사나(anuppassanā, 隨觀) 즉 ‘반복적인 또는 지속적인 관찰’로 제시된다. 사띠를 확립시키는 방법이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말이다. 『염처경』 서문에서 사념처를 수행하는 방법을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또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로 제시하고 있다.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한다’는 말은 육체를 거듭 거듭 관찰한다는 말이다. ‘열심히’는 ‘정진하며’라는 말이다. ‘분명한 앎을 지니고’는 ‘관찰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알아차림)을 지니고’라는 의미이다. ‘마음챙김을 지니고’는 관찰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 현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일어나는 그 순간 포착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라는 말은 지금 관찰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가치판단,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찰 대상, 마음챙김의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태도를 말한다. 이 구절은 ‘비판단적인’, ‘수용의 태도’를 의미하는데, 존 카밧진과 심리학자들은 사띠의 한 특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음챙김(의 확립) 수행, 사띠빳타나 수행은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위빠사나 지혜를 얻는 수행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 또는 마음챙김 수련(mindfulness practice)을 위빠사나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통상 위빠사나는 통찰 명상(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한다.

4)몸에 대한 마음챙김(kāyagatā-sati)과 5)호흡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는 사띠빳타나의 일부로도 제시되기도 하고 독립되어 제시되기도 하면서, 4선정과 4념처와 연결되어 있다. 사띠가 선정과 지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공통 기반이 된다는 인경스님의 지적에는 동의한다. 그 뿐 아니라 사띠는 계를 지키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팔정도의 바른 언어(正語), 바른 행위(正業)를 위해서는 바른 이해(正見),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노력(正精進)이 동반되기 때문이다.(냐나틸로카, 『붓다의 말씀』김재성 옮김, 고요한소리, 2008, 120쪽 이하 참조).

6)아누싸띠(anussati)는 수념(隨念)이며, 여기에 사용된 ‘사띠’는 사띠의 원래적인 의미인 기억 또는 상기(想起)를 의미한다. 초기경전에는 불(佛), 법(法), 승(僧), 계(戒), 사(捨), 천(天)에 대한 수념(隨念) 또는 반복적인 상기(想起)가 제시되어 있다. 삼보(三寶), 지계, 보시 또는 욕망을 멀리함(cāga), 천신의 덕을 반복적으로 상기하는 명상이 6수념(六隨念)이다. 이 때 아누싸띠의 사띠는 ‘반복적인 알아차림’이 아니라, ‘반복적인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불법승 삼보는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니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챙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사띠라는 용어는 경전에서 기억, 상기(想起), 잊지 않음의 의미와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는 의미의 ‘챙김’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는 주로 ‘삼빠잔나’를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경스님이 말하는 ‘챙김’이라는 개념이 상업주의의 의미를 담고 있다거나, 현대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거나, ‘화두챙김’에서 빌려왔으니 격의(格義)라서 잘못이라느니 하는 판단에는 ‘챙김’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국어사전의 의미를 보자. ‘챙기다’는 말은 ‘필요한 물건을 찾아서 갖추어 놓거나 무엇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살피다. 거르지 않고 잘 거두다.’라는 의미이다. 용례로, ‘짐을 챙기다/서류를 챙기다/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는 주위 사람의 생일을 잘 챙긴다.’라고 제시된다. 한편 ‘알아차리다’의 의미는 ‘알고 정신을 차려 깨닫다.’이다. 예로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어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아차리셨다.’가 제시되었다.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

이처럼 사전적인 의미로 ‘챙기다’는 ‘빠뜨리지 않고 살피고 잘 거두다’는 의미이고, ‘알아차리다’는 ‘알고 정신차려 깨닫다’로 이해한다면, 사띠는 두 가지 단어 중에 ‘챙기다’에 가깝고, 삼빠잔나는 ‘알아차리다’에 가깝다.
실제 수행에서 사용한 예를 보자. 필자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이해하여 별문제 없이 20년 가까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왔다. 마음을 놓치지 않고 챙기거나,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행위는 존재양식(being mode) 그 자체이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로 사띠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한 필자와 그리고 그러한 설명을 듣고 수행을 한 많은 분들은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사띠의 의미를 이해하여 실제 수행에 적용했으며 문제가 없었다. 인경스님 말대로 하면, 필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면서 ‘대상에 마음을 챙기세요’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마음을 자신(我)이나 자신의 소유물(我所)로 생각하고 관리하고 통제하세요.’라고 들릴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마음챙김’을 이해한 사람을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실제 위빠사나 수행에서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포착함’이라는 의미로 ‘마음챙김’을 이해하며, 마음챙겨서 알아차린 것, 알게 된 것은 정지(正知)로서 ‘알아차림’이라 이해한다.

인경스님이 “챙김이라는 개념은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물들어진 용어이다.” 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불교는 욕심을 떠나는 가르침이니까 ‘챙기는 것’은 나쁘다고 단정 짓는 것도 억지스럽다. ‘사띠’는 기억과 그대로 현재의 경험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하며, 따라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사띠’,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김재성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1029호 [2009년 12월 24일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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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챙김은 인위적 조작…불교 아니다”

 
특별기고-인경 스님, 김재성 교수 재반론
삼빠잔나는 알아차림 아닌 ‘분명한 앎’
진리는 챙기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30일 20:37 수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사진>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후 인경 스님과 김 교수 간에 논쟁이 오고가는 가운데 이번에는 인경 스님이 다시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사띠와 위빠사나는 불교명상을 대표하는 용어이다. 더구나 현대 심리치료의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대중화되면서, 위빠사나보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가 불교명상을 대표하는 상징적 용어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김재성 교수(이하 김 교수로 약칭함)의 반론 글은 필자가 처음 문제제기한 심리치료적인 관점보다는 초기불교에로 초점이 이동하여 조금 아쉽다. 하지만 초기경전을 다시금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

먼저 김 교수는 사띠를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마음상태’라고 정의하고, 여기에 합당한 용어는 ‘마음챙김’이라 주장한다. 물론 ‘포착’이란 국어사전적 의미는 대상을 ‘꼭 붙잡음’이란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순간포착처럼 실제로는 감추어진 사태나 알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알아차림’의 인지적인 의미를 뜻한다. 아무튼 사띠를 꼭 붙잡음이란 의미로서 해석하는 김 교수는 경전적인 전거로 『숫타니파타』의 151게송, ‘(자애의) 이 사띠( )를 굳게 지녀야 한다( ).’는 문장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문장도 ‘굳게 지녀야 할’ 대상은 자애의 마음임을 말하는 것이지, 사띠란 ‘굳게 지닌다’는 의미임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마음챙김을 굳게 지녀야한다’로 직역하면 챙김과 지님이 중첩돼 모순된다. 이런 경우는 차라리 <자애의 마음을 굳게 지녀야한다>로 의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렇다 하여도 151게송이 사띠와 자애는 동일한 의미임을 제시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위의 문장( )은 사띠를 통해서 자애의 마음이 개발된다는 견해(Tse-fu Kuan, 2008)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사띠(sati, 正念)와 삼빠잔나(sampajañña, 正知)의 관계이다. 이것은 중요한 만큼 많은 분들에 의해서 이미 언급되고 있다. 사띠는 현재의 순간에 대한 개별적 대상,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을 의미한다. 반면에 삼빠잔나(sampajañña)의 경우에 접두어 ‘sam’은 ‘바른’ 혹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pajañña’는 지혜[智]를 의미하는 pañña와 성스런 앎[知]을 뜻하는 ñāna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용어로 ‘이해’, ‘앎’, ‘지혜’ 등으로 번역한다. 곧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Goenka, 1999; Analāyo, 2003) 사띠와 삼빠잔나는 개별과 보편, 부분과 전체의 관계처럼 인식 대상의 범위가 서로 다르다. 삼빠잔나는 사띠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사띠와는 다르게 삶의 넓은 부분(목적, 적절성 등)에 걸쳐 관여하고(Nyanaponika, 1962), 대상의 전체적인 특성과 변화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U Sīlānanda, 2002)

따라서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일부 전공자의 이해는 잘못된 번역이다. 알아차림은 개별적 대상에 대한 현재의 자각을 뜻하고, 아직 분명한 앎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기에 사띠의 번역어로 제격이다. 하지만 삼빠잔나를 단순하게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삼빠잔나가 가지는 대상에 대한 보편적이고 전체적의 인식, 성스런 앎이란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삼빠잔나는 분명한 앎, 바른 이해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더구나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으로 번역을 하니까,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은 궁색하다.

한편 자애의 마음을 ‘굳게 지님’, 물건을 꼭 붙잡은 ‘챙김’과 같은 용어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행동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알아차림은 변화하는 대상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안다는 인지적 관점을 가진다. 예컨대 실례를 든 일상에서 ‘서류를 챙긴다’고 할 때, 우리는 대상(서류)가 책상위에 있음을 먼저 알아채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올바른 서류인지를 분명한 앎으로 확인한 다음에, 그것을 잘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각이라면, 챙김은 그 대상을 소유하여 가지는 행위이다. 먼저 알아차림의 인식이 있고, 나중에 챙김의 효과적인 행위가 뒤따른다. 

위빠사나 명상의 소의경전인 『염처경』의 사례에서 보면, 대상은 몸, 느낌, 마음, 현상[身受心法]인데, 이들은 물건과 같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이다. 이런 대상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면, 이것을 곧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사띠이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대상의 전체적 속성을 분명한 앎에 의해서 확인하는 것이 삼빠잔나이고, 이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소유방식을 내려놓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이다.
이런 점들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표 참조>

표에서 행위는 인식보다 앞서 존재할 수 없다. 챙김은 분명하게 세간적인 소유의 행위방식으로, 집착을 내려놓는 명상의 바른 목적이 될 수가 없다. 물론 여기서 사띠를 지혜보다는 주의집중이나 지킴과 같은 선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의 사띠는 『숫타니파타』처럼 고층에 속하는 문헌에서 더 발견된다.(이필원, 2009) 하지만 『염처경』에서 사띠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의미로서 분명한 앎과 통찰로 나아가는 위빠사나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러면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이해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대표적인 사례는 ‘그는 마음챙겨(sato)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챙김’이 먼저 있고, 그런 다음에 ‘숨을 들이쉰다’는 의미로서, ‘호흡’챙김이 아니라 ‘마음’챙김 하는 내용이다. 명상주제는 몸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챙기는 것이 된다. 몸과 마음의 범주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점은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이란 주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쾌하거나 즐거운 느낌 그 자체보다는 느낌에 대한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되고,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도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마음현상이 아니라, 마음현상에 관한 ‘마음’을 챙긴다는 것으로, ‘법에 대한 마음챙김’도 다섯 가지 장애와 같은 현상보다는 그런 현상에 대한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마음챙김의 대상은 『염처경』에서 말하는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챙김은 별도의 다른 마음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지금 여기 몸과 마음의 경험에서 떠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에 기초한 간화선에서는 “이것은 몸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법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것은 『염처경』에 기반한 간화선의 방식, 화두참구법이 아닌가?

이런 문제는 ‘마음챙김’뿐만 아니라, 사띠를 ‘마음지킴’, ‘마음집중’으로 번역하는 신조어 모두에 해당된다. 챙김, 지킴, 집중은 그 자체로 모두 마음현상인데, 여기에 다시 원문 사띠에 없는 마음(citta)이란 용어를 올려놓는 것은 옥상위의 집처럼 부자연스럽다. 이것은 ‘적절하지 못하다(전재성, 2009)’. 오히려 <호흡(느낌, 마음,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이나 <그는 숨을 알아차리면서 들이쉬고, 숨을 알아차리면서 내쉰다>(심준보, 2004; 최종남, 2006)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야 숨이 길면 길다고, 숨이 짧으면 짧다고 하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호흡에 대한 분명한 앎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다음으로 사띠를 챙김으로 번역하면, 결국 “챙기라! 챙기라!”는 말을 자주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물건을 챙기듯이 호흡, 느낌, 마음과 현상을 챙길 수가 있는가? 우리는 움직이는 대상을 지키거나, 챙길 수가 없다. 호흡을 챙기면 챙길수록 더욱 숨이 막히고, 마음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왜냐하면 호흡을 챙기려는 능동적인 의지가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음은 더욱 산란하여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앎으로, 그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명상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염처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만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이 드러난다.”는 후렴구이다. 이 후렴구가 『염처경』과 위빠사나 수행의 심장이다. 이것은 몸, 느낌, 마음, 현상에 대해서 동일하게 적용되어 이 후렴구가 총 13회 반복된다. 여기서 드러남으로 번역한 ‘ ’는 나타남, 현전을 의미하는 과거분사형이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저절로 드러남(조준호, 2001)’을 의미한다. 사띠는 굳게 지님이나 마음챙김과 같은 용어가 함축하는 ‘대단히 능동적인 활동(조준호의 논문에 대한 김재성의 논평글, 2001)’이 아니다. 사띠는 판단이나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질 않는다. 노력 없는 노력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알아차림’은 지금여기에서 몸과 마음의 현상이 그 자체로 의식의 지평위에 스스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이러는 한에서(yāvadeva) 비로소 높은 수준의 지혜와 지속적인 선정에 도달하게 된다. 진리는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드러난다. 내가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내게로 드러나 현전한다. 이게 존재의 진실이다.


1030호 [2009년 12월 30일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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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마음챙김 부작용 지적은 기우”
 
특별기고-김재성 교수, 인경 스님에 재반론
명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잘못
사띠에 근거 둔 위빠사나는 인위적 행위
기사등록일 [2010년 01월 08일 11:38 금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사띠(sati)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사진>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후 인경 스님과 김 교수 간에 열띤 논쟁이 오고가는 가운데 이번에는 김재성 교수가 다시 인경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세 번째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빠알리어의 사띠(sati), 영어의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의 문제로 인경스님의 문제 제기에 대해 3번째 글을 쓰면서, 언어의 의미와 용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하고 숙고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이 용어의 우리말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는 불교학과 불교수행에 관심이 있는 불교계는 물론 이 용어를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는 심리학계에서도 신선하게 지켜보고 있다. 번역 용어의 선택은 의미있는 문제제기임을 확인하면서, ‘마음챙김’이 지닌 다의적인 측면을 되새기게 되었다. 토론의 장을 만들어주신 인경스님께 다시 감사드린다.

지난 1029호에서 필자는 초기경전에 나타난 ‘사띠’의 다양한 용례를 제시하였으며, ‘기억’, ‘상기’, ‘현재의 경험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국어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는 조어를 만들어 사용해 왔고,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문제없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적절한 번역어가 나온다면 필자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마음챙김’과 함께 ‘알아차림’은 그 후보 중 하나이며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논의가 사띠와 마인드풀니스에 대한 우리말 번역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며, 실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직접 확인해보기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글을 정리해본다.

인경스님이 제기한 문제의 표현은 ‘마음챙김’, ‘챙김’이라는 표현이다. 필자는 ‘마음챙김’의 ‘챙김’을 사띠의 원래 의미인 ‘대상을 놓치거나 잊지 않음’, ‘대상을 잘 포착하고 있음’으로 이해한다. 인경스님은 “챙김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번뇌의 일부이고, 심리치료가 아닌 환자의 증상에 해당된다. 무엇인가 결핍감을 느끼는, 건강하지 못한 심리상태에서 비롯된, 허구적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적인 심리기제”라고 한다(법보신문 1026호). 이러한 해석은 ‘챙김’이라는 용어의 다의성(多義性)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지만 실제 수행을 통해 경험하지 않는 한 이러한 ‘기우’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은 받아들인다. ‘챙김’이나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번뇌로 사용되고, 환자의 증상이며, 방어적인 심리기제임을 밝히는 연구성과물이 있다면 이 용어에 대한 사용을 더 신중하게 고려해보아야겠다. 현재 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용어에 의해 그 같은 문제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챙김’이라는 용어의 다의성 때문에 ‘기우’에 빠져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난 호에서 사띠가 기억 또는 상기의 의미로 사용되는 한 예로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을 들어서 이야기했다.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Sn 151게)”에서 ‘이 (자애의) 마음챙김’은, 자애의 마음을 잊지 않고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법보신문 1029호). 이 글에 대한 인경스님은 반론으로 “위의 문장(Etam satim)은 사띠를 통해서 자애의 마음이 개발된다는 견해(Tse-fu Kuan, 2008)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법보신문 1030호). 콴 박사의 정확한 표현은 ‘자애명상을 닦는 과정에는 사띠가 포함된다(Mindfulness in Early Buddhism, p. 56)’는 것이다. 사띠가 없는 불교명상(사마타, 위빠사나)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해석은 타당하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자애를 가리켜 ‘이 사띠’라고 제시한 이유는 ‘자애(metta)’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자애를 잊지 않음(사띠)’의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항상 자애를 잊지 않고 챙김’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경우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색하다.

사띠(sati, 正念)와 삼빠잔나(sampajañña, 正知)의 관계에서 인경스님은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Goenka, 1999; Analāyo, 2003) 사띠와 삼빠잔나는 개별과 보편, 부분과 전체의 관계처럼 인식 대상의 범위가 서로 다르다. 삼빠잔나는 사띠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사띠와는 다르게 삶의 넓은 부분(목적, 적절성 등)에 걸쳐 관여하고(Nyanaponika, 1962), 대상의 전체적인 특성과 변화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U Sīlānanda, 2002)”라고 하였다. 삼빠잔나를 무상에 대한 이해로 보는 것은 고엔카지의 독특한 해석이다. 주석서에는 네 가지 삼빠잔나(유용성, 적절성, 대상, 무지가 없음: 각묵스님,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136쪽 이하, 우 빤디따 사야도, 위빠사나 수행의 길, 219쪽 이하)를 제시하고 있고, 냐나포니카 스님과 실라난다 스님을 포함한 위빠사나 지도자들도 그러한 주석문헌의 전통에서 해석하고 있다. 『대념처경』에서 일상의 행위를 삼빠잔나와 결합해서 제시할 때, 일상행위(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보고, 말하고, 침묵하고,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등의 행위)를 할 때마다 그 때 그 때 그 행위를 분명히 알고 또는 알아차리고 하라는 것이다. 네 가지 삼빠잔나를 적용시켜 이해해보자. 걷기를 명상 주제로 삼을 때, 걸음의 유용성을 알고, 지금 걸어도 좋은지 적절성을 알고, 걸으면서 걸음이라는 대상을 분명히 안다. 그러면 걸음이라는 동작에 어떤 고유한 특성(움직임 등의 특성)과 보편적인 특성(무상, 무아 등)이 있는지 무지가 없는 분명한 앎이 생긴다. 이러한 삼빠잔나에 사띠는 함께 작용하고 있다. 경전의 내용이나 실제수행에서 사띠-삼빠잔나는 새의 두 날개처럼 함께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인경스님은 ‘챙김’이 행동양식이라고 하면서 “알아차림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각이라면, 챙김은 그 대상을 소유하여 가지는 행위이다. 먼저 알아차림의 인식이 있고, 나중에 챙김의 효과적인 행위가 뒤따른다.”라고 한다. 사띠는 마음의 행위이지만,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존재 양식(being mode)’과 반대되는 소유양식으로서의 행동 양식(doing mode)은 아니다. 하지만 사띠 자체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아라한의 경지를 제외하고는 인위적인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사띠를 포함한 불교의 팔정도를 번뇌에 물들지 않은 무루(無漏)의 인위적인 유위법(有爲法)이라는 초기불교 및 아비달마불교의 이해를 따르고 있다. 이 점에서는 선불교적인 이해방식과 인도불교적인 이해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1029호에서 설명하였지만, 『염처경』에 나타난 수행법인 사띠의 확립(사띠빳타나)은 아누빠사나(anuppassanā, 隨觀) 즉 ‘반복적인 또는 지속적인 관찰’로 제시된다. 사띠를 확립시키는 방법이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말이다. 『염처경』 서문에서 사띠의 확립을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삼빠잔나를 지니고(분명히 알아차리고), 사띠를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경전에 따라 정진과 사띠와 삼빠잔나를 지니고 몸 등의 대상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면, 결과적으로 대상의 생멸을 이해하는 무상의 지혜 즉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 경전과 실제 위빠사나 수행의 절차이다. 지속적인 관찰은 노력+사띠+삼빠잔나+비판단적 수용의 태도로 진행되고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서양 심리학자들이 마인드풀니스 명상이라고 할 때 이 모두가 포함되어있다. 이 때 사띠는 마음의 현존(presence of mind)로 이해한다.

인경스님은 “‘그는 마음챙겨(sato)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는 말을  ‘마음의 챙김’이 먼저 있고, 그런 다음에 ‘숨을 들이쉰다’는 의미로서, ‘호흡’ 챙김이 아니라 ‘마음’챙김 하는 내용이다.”고 하면서 명상주제는 몸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챙기는 것이 되어 몸과 마음의 범주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챙기며(sato)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는 말을 시간적 차이가 있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구절은 ‘마음챙겨 호흡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범주 오류가 생기지 않는다. 실제 수행에서도 이런 범주 오류를 범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이처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마음챙김’을 사용할 때 이와 같은 오해가 없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적으로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지나친 우려라는 생각이 든다.

인경스님은 “사띠를 챙김으로 번역하면, 결국 “챙기라! 챙기라!”는 말을 자주할 수밖에 없다.…호흡을 챙기면 챙길수록 더욱 숨이 막히고, 마음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왜냐하면 호흡을 챙기려는 능동적인 의지가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고 하였지만, ‘호흡을 챙기다’는 말을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라고 이해하고, ‘자연스런 호흡에 마음챙김하라’고 하면 이러한 부작용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능동적 의지가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알아차림’이라는 말을 써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사띠의 힘이 약한 초보자들은 사띠의 대상을 잘 놓치기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긴장과 불안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과 불안은 한 두 번의 면담을 통해서 바로 해소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경스님이 말하는 “명상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적어도 사띠에 근거를 둔 위빠사나 수행에는 적절하지 않은 정의이다.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참여와 힘찬 노력이 필요하다(『마음챙김과 심리치료』, 47쪽). 우리는 현재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노력하며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하며 수행을 한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우리의 명상은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진행된다. ‘본래 부족함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명상의 결과 얻어지는 마지막 경지이다.


1031호 [2010년 01월 08일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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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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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입니다. 
 

 

 

마음속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입니다. 
 

 

 

바라 볼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보다 말하지않아 더 빛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런말 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편안함"입니다 
 

 

 

 자신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배려"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 이름 부르고 싶은 것이 "보고싶은 마음"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입니다

 

 

 

파아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음은 "존중"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