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나라 무제의 인연과보

2010. 1. 24. 20: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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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계신 분들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가지고 어떤 신앙생활을 하던, 얼마나 출세를 해서 살든, 사는 게 지지리도 팍팍한 사람들이건 간에 업보중생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어제 오늘과 내일, 금년 작년과 내년처럼 쉼 없이 가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월 속에 계절 따라 외출복 갈아입듯, 다겁생을 돌고 돌며 온갖 형상과 셀수 없이 많은 이름들로 불리우며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뿌리고 저질러 왔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인한 인연과보의 업보와 업장을 소멸하고자 십악참회의 원을 일으켜 기도하기를  벌써 세 번째 백일기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신정아 문제로 400억에 가까운 세금이 인질석방에 쓰여 탈레반의 테러자금으로 지급됐다는 온갖 의혹들에 대해서 인질발생의 원인과 과정, 사후문제들에 대한 책임과 원인분석은 뒷전으로 물 건너 가버렸고, 정치인들은 국민의 생계는 아랑곳없이 경선과 대선에만 뒷골이 땡겨지나 봅니다.


우리는 이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예전에 이보다 못했을 때도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리 살아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 민초라고 자조적인 자칭을 하고 살아갑니다만, 그래도 오늘 기도 입제에 동참하신 선재남녀의 보살님들께서는 전생에 지은바 공덕이 무량하신듯합니다.


왜냐? 이 순간에도 저 아프칸에 태어난 사람들은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낮과 밤을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고, 수단이라는 나라는 줄어드는 물 때문에 부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잘난 미국은 테러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긴장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리 좋은 한국 땅에서 살면서도 사람 중생이란 참 묘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라, 말 타면 고삐잡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배부르고 등 따시면 헛생각이 일어나기에 세상이 이리도 어지럽게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춥고 배고프면 살기 바빠 언감생심일 과욕들이 요즘은 당연하다는 듯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고,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 가족 간에 부부 간에 벌어지고들 있으니 말입니다.


이 모든 원인은 인과법이라는 뿌리면 거두고 심으면 난다는 우주의 질서이자 자연의 법칙인 인연과보의 순리가 서양종교로 인해 사라져가면서 자기 편리한대로 온갖 비양심과 비도덕적인 짓들을 하고서도 일주일의 하루 잠시자신의 종교 성전에 가서 회개하면 거듭 태어난다는 너무도 편리한 자기 본위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서 이 사회의 병리현상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윤회를 인정한다면 자신이 뿌린 선과 악행의 씨앗이 언젠가는 과와 보를 받게 된다는 인과도리를 새기고 살아간다면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형제 간에, 이웃 간에 서로 조심하고 공경하고 살아갈 것이건만,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제멋대로 지 편한 대로, 지 욕심대로 무명의 밭에 허욕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살아오고 있고 그렇게 살아온 전생이 있었기에 금생을 살아가기가 이리도 팍팍하고 이것저것이 다 걸리고,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하늘을 찌르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에 자신이 박복하고 악업의 종자를 농사지은 것은 까마득히 잊은 채, 인과의 이치는 생각치도 못하고 금생에 박복한 부모인연만나고 지지리도 가진 것 없다고 조상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면서 삐뚜러진 심성으로 살아간다면 악순환은 연속될 뿐이고 다음 생 또한 알 쪼인 것 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을 팍팍하게 살아오면서도오직 한 가지, 자식 잘되고 가족들 무탈하기만을 바라는희망으로 장독대에 청수 떠놓고 두 손 비벼 빌던 우리 민족의 핏 속에 녹아있던 어머님들의 순박한 간절함 들이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야만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제외하고요. )

기도입제에 안 오신 분들은 청수 떠놓을 장독대가 없어져서 기도 빨이 안 받아서 안 오셨나봅니다.


오늘은 부처님께 법공양을 올리는 자비도량참법이 만들게 했던 역사적인 인물인 양나라 무제가 지공선사에게 묻기를 자신이 전생에 어떤 복을 지었길래 이렇게 황제가 될 수 있었는가를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양무제의 과거생을 볼라치면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와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무제가 전생에 지었던 공덕은 지금 법당에 와 계시는 여러분들께서도 행사 때면 불기도 닦고 후원 공양간에서 간간히 짓는 공덕이건만, 어찌 그는 황제가 되는 과보를 받았고, 우리는 그런 공덕을 간간히 짬짬이 짓는데도 사는 게 이리도 팍팍한가의 차이를 배워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차이는 깻잎 한 장의 차이에 불과했더란 말입니다.

양무제(梁武帝)의 이름은 소연(蕭衍)으로 인과에 떨어진 황후인 치씨를 천도한 인연으로 불법을 믿게되어 당시의 고승인 지공(志公)스님을 국사로 모셨다.

황후 치(眼)씨를 천도하고 양무제가 불법을 인연하게 된동기는 오늘 공양올린 자비도량참법 책 안에 들어있기에 생략하고 하루는 무제가 문득 생각하기를 전생에 나는 무슨 인연공덕을 지었길래 이러한 황제의 복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사인 지공스님에게 묻기를 “황후는 이미 제도되어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선악의 업보는 과연 어둡지 않습니다만, 짐(朕)은 금생에 한 나라의 주인이 되었는데 무슨 공덕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묻자,지공스님께서 답하기를, “폐하의 전세(前世) 인연은 폐하께서 듣고 부끄러워할까봐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무제는 다시 간절히 청하면서 “제자는 과거의 인연을 매우 알고 싶습니다.”재삼 간청하자, 지공스님께서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전생에 나무꾼이었습니다. 하루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벨 때 오래된 절이 있어 가보니, 낡고 허물어져 몰락한 절이었습니다.

지붕도 다 허물어져 절 안에 오래된 불상이 비바람에 젖어 있었으며 향 한 개비 공양 올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시, 나무꾼은 착한 마음을 발하여 뜨거운 햇볕을 피하고 비가 오더라도 막아주는 요긴한 자신의 대나무 삿갓을 벗어 불상의 머리에 덮어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보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무꾼이 자신의 삿갓을 부처님께 공양한 것은 어렵고도 고귀한 행위입니다. 그 덕분에 인간이 되고, 왕의 몸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전남 영암군 삼호면 흑성산 절에서 있었던  제 경험담 )


황제께서는 이렇듯 아무런 바램이 없이 진심으로 착한 일을 지었기 때문에 금생에 이러한 복을 받게 되신 것 입니다.” 하자, 말 타면 고삐 잡고 싶어 하듯이 무제는 과거 생에 매우 작은 일을 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었으니, 흡족해지면서 나무꾼으로도 그런 복을 지었는데 지금은 내가 나라의 황제인지라 금생에 다시 큰 복을 짓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성지를 내려 나라 안 5리(五里)마다 하나의 암자를 짓게 하고 10리마다 절을 짓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짓는 절이 매우 많아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제는 중병을 얻게 되자, 스님께 가서 여쭈었다. “저는 요즘 크게 착한 일을 하고 나라 안에 많은 절을 지었는데, 어째서 이런 큰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까?”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왕께서는 큰 善을 지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대왕께서 큰 惡을 지었다고 말하렵니다.” 깜짝 놀란 무제가 말하기를,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저는 과거 생에 부처님께 삿갓 한번 덮어주고 임금의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금생에 착한 마음을 크게 내어 나라 안에 절을 많이 짓게 하였는데 어찌하여 악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황제께서 전생에 부처님께 삿갓을 드린 것은 지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큰 복을 얻게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금생에는 아래에 하달하여 널리 절을 짓게 하였으며, 또 자기는 돈을 보내지도 않고 힘을 보태지도 않으면서 백성들이 나라에 낸 세금으로 천하의 백성들에게 절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힘든 노동에 백성의 신음소리는 하늘에까지 닿았는데 황제께서는 오히려 복을 얻기를 생각하십니다. 황제께서는 자신의 복을 짓기 위해서 만 백성을 노역에 불러들여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황제께서 비록 천자일지라도 만백성의 원성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악업을 지은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대목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 돌아온 인질들이 생각납니다.)


무제는 듣고 보니 매우 부끄러웠다. 또 묻기를 “태자가 최근 온 몸에 부스럼이 나서 밤낮으로 고통스러워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대왕께서 지은 악업(惡業)이 태자에게까지 연루된 것입니다.” 무제가 놀라서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액난(厄難)을 소멸시킬 수 있는지 자비로써 가르쳐 주십시오.” 하자, 지공스님은 “땅에서 넘어졌으면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합니다. 이전에 절을 지을 때 백성들에게 주지 않은 보상을 하루 빨리 보내주어서, 백성이 빈손으로 일하지 않게 하면 자연히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

또, 마땅히 신체가 불편한 이들을 불쌍히 여겨 도울 것이며, 노인을 사랑하고 어린이를 귀여워하며, 수행자들이 시주를 청하면 성심으로 보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출가 수행하는 수행자는 중생들이 복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복전(福田)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대목은 요즘 조계종단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무제가 또 묻기를, “사람이 보시하지 않고 복을 닦지 않으면 선망(先亡) 조상들이 어찌하여 괴로워합니까?” “살아생전에 선근공덕을 닦지 않아 죽은 후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자손들이 복을 지어 그 공덕으로 인해 죄를 가볍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천지간에 보이지 않는 집안을 지키는 신, 조왕신(鋤王神), 지신(地神) 등도 세상 사람들이 선을 지어 함께 착한 힘을 받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제가 묻기를, “스님들의 수행은 좋은 일인데 어찌하여 밖으로 가서 시주를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중생이 지은 바 복이 엷고 심성은 독하여 끝없이 윤회에 떨어져 살아가는 중생들을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들이 공덕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빈부를 가리지 않고 순서에 따라 걸식하였던 것입니다.”부처님은 부처의 눈으로 세간을 봅니다.

중생은 비록 사람이 되었다 해도 단지 은애만 알고 연연해하면서 복을 지으려 하지 않고, 업을 지을 줄만 알지 참회할 줄을 모릅니다.

사람의 목숨이 다하여 죽으면 저승세계로 들어가는데 큰 고뇌를 받게 됨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도솔천(兜率天)에서 인간세상의 제왕가에 태어나, 출가하여 도를 닦아 정각(正覺)을 이루시는 모습을 중생들에게 보여주시고 빈부귀천을 떠나 너희도 나처럼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시고 45년 동안 300여 회의 설법을 하였으며, 중생을 교화하여 악을 떠나 선으로 향하게 하고, 허망한 번뇌를 끊어 본래 구족한 불성(佛性)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천하에 착한 남자 여자는 매우 많습니다.

만약 출가한 스님이 수행의 힘으로 그들을 교화하지 않으면, 그들은 비록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복을 심을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스님들의 책임입니다.

스님들이 와서 시주를 청하는데 제왕께서 만약 인색하여 보시하지 않으면, 그것은 제왕께서 빈궁한 업을 심는 것이며, 또한 복을 심을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무제가 또 묻기를, “세상 사람이 돈과 쌀로써 부처님께 공양하고 스님께 재를 올리면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면 그 공덕은 매우 많습니다.

미래세상에서 반드시 무량한 수승한 과보를 얻게 됩니다.

절에 양식이 충분하면 스님들이 안심하고 수도를 할 수 있습니다. 출가인은 속진을 벗어나 계율을 지키고 밝은 스승께 법을 구하며, 전심으로 노력하면 머지않아 마음을 밝혀 견성(見性)할 수 있으며, 부처를 이룰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제가 물었다.

“사람이 죽은 후 스님을 청하여 천도(薦度)하면 죽은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 천상으로 오를 수 있습니까?” “황후가 이미 구제되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단지 가족들이 성심성의껏 해주기만 하면, 그리고 천도해 주는 스님이 계행(戒行)이 있는 분이면 구제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독경(讀經)하고 예참(禮懺)하면 재와 공양이 청정해지며, 절대로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백 천만의 사람도 모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살생하여 깨끗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인과를 알지 못하여 술 마시고 고기 먹는 사람을 청하여 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염불송경이 경건하지 않기 때문에 망자(亡者)에게 공덕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해하고 또 주육(酒肉)으로 도량(道場)을 더럽히면, 돌아가신 부모는 구제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살생의 업이 더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도재에는 반드시 고기와 오신채가 들지 않은 깨끗한 음식을 써야 합니다.

(자기는 출산의 기쁨을 누리면서 몸보신한다고 새끼 딸린 짐승을 약으로 삼는 어리석음)


도산(刀山)지옥, 검수(劍樹)지옥은 모두 살생의 업으로부터 나옵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악업의 연을 맺으면 더욱 깊고 중해진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청정하지 못한 불사(佛事)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제도코자 하면 먼저 반드시 자신스스로를 제도해야 합니다. 고인이 이르기를, ‘한 사람이 도를 얻으면 아홉 조상이 승천한다.’라고 합니다.

그의 착한 힘을 타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탄승게(嘆僧偈)에서 이르기를, ‘덕이 있는 스님이 도량을 이루어 엄정하게 재계하고 경문을 염송하며 성심으로 예불하면 많은 공덕이 있으며, 살아있는 사람과 망자가 모두 이익을 받고 길상함을 얻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훈승송(訓僧頌)에서 이르기를, ‘손에 바라(징)를 들고 치면서 술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도량을 만들고 불경(佛經)을 더럽히는데, 정말로 애석하며 망자에게는 오히려 더욱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제가 또 묻기를, “어떤 사람은 잘 입고 잘 먹고 하며 많은 복을 누리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전생에 보시를 많이 한 복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인과응보이며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을 누리는 사람은 복을 다 누리면 안 되며, 복을 아끼고 늘려야 합니다. (소위 남는 장사 )


복이 있으면 복을 짓기도 쉬우며, 도를 닦기도 쉽습니다.

돈이 없으면 보시하려고 해도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복이 있어도 수행할 줄 모르고 전생의 복을 다 써버리면 괴로운 날이 다시 올 것이니, 하루빨리 깨달아 복을 아끼고 복을 닦으며 선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무제가 탄식하며 물었다.

“어떤 출가인은 절에서 수행하지 않고 도리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 절의 스님에게 손해를 끼치는데, 이것은 무슨 원인입니까?”

“이러한 무리들은 모두 성도(成道)를 막는 요사스런 마의 무리로서, 마음에 의심이 많고 한(恨)을 품어 스님의 모습을 지어 불법을 파괴하러 온 것입니다.


말법(末法)의 시대에는 사마(邪魔), 외도(外道)들이 사문의 옷을 입고 불법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돈을 긁어모으는데, 갖가지의 방법으로 불교를 파괴하려고 올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절을 집으로 삼고 청정한 부처님의 땅을 더럽히며, 불법의 참된 모습을 파괴할 것이니,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져 무량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요즘 기독교인들이 목적을 두고 출가한 이들이 있다는 말들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습니다.)


무제가 또 물었다.

“불법은 미묘하여 능히 생사의 고해를 건널 수 있으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출가하여 이미 스승의 은혜를 깊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라서는 열심히 도를 배우지 않고 사중(寺中)의 돈과 쌀, 재물을 가지고 가서 환속하여 아내를 얻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람은 이후 어떻게 됩니까?”

“이러한 무리는 죄의 뿌리가 매우 깊고 두터우며, 복력(福力)이 천박합니다. 또한 출가하는 것이 해탈(解脫)의 길이라는 것을 믿지 않지만, 진실로 참회하면 안락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람은 축생에서 몸을 바꿔 처음으로 인간의 몸을 얻게 된 무리로서 삿된 마음이 쉽게 생기며, 또 불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잘못이 있으면 참회하여 고쳐야 하며, 작은 잘못이 큰 잘못으로 자라지 않게 해야만 합니다.


양무제의 질문은 더 많으나 이만 생략하고 양무제는 부처님의 머리 위에 아무런 발원이나 소원을 바라지 않고 지극하고 지성스런 마음으로 삿갓 한번 씌워드린 공덕이 이렇게 무량한 과보를 받았습니다만, 우리들은 기도를 하면서 온갖 발원과 소원을 가지고 자칫하면 부처님과 거래를 하듯 하지는 않는가요?


기도 중에 가장 수승한 기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지라도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는 왜? 불이 떨어지게 됐던가를 지혜롭게 헤아려 그 원인을 없애면 발등에 불은 저절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회의 기도이고 무주상보시인 것입니다.


가난한 나무꾼이었던 양무제가 자기도 뜨거운 햇볕을 가려야 함에도 아무런 바램없이 지성심으로 부처님 머리에 삿갓을 씌워드렸던 것처럼, 내가 지금 가진 것이 변변치 않더라도 전생의 양무제처럼 한번 마음을 내서 작은 복이라도 지어보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지혜없는 삶이란 이런 것인가? 

오늘은 경전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들려드리는 이야기는 실가람 보살님이 읽어보고 너무나 가슴 아파서 제 카페에 올리셨는데 저 또한 읽고선 무자식 상팔자라고들 하는 제 가슴마저도 억장이 무너지는지라 지금 읽어드리는 글을 가슴을 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무릎 아래 우리 집과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 어느 시어머니의 고백====

  (이글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듣는데 90살 노부부가 치매에 걸려서 동반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들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보다 30여년을 더 사시면서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겠는가 싶더군요.


저는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하루하루 사는 기대를 가졌었답니다.  차마 제 주위에 아는 사람들에겐 부끄러워 말할 수 없었던 한 달 여 동안의 내 가슴속 멍을 털어 보고자 이렇게 어렵게 글을 적어 봅니다.


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고등학교 때 남편을 잃고 혼자 몸으로 대학 보내고 집장만해서 장가를 보냈죠.

이만큼이 부모로써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이제 아들놈 장가보내 놓았으니 효도 한 번 받아보자 싶은 욕심에 아들놈 내외를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 장만 따로 해줄 형편이 안 되어 내 명의로 있던 집을 아들명의로 바꿔 놓고는 함께 살고 있지요. 남편 먼저 세상 떠난 후 아들 대학까지 공부 가르치느라 공장일이며 때밀이며 파출부며, 안 해 본 일이 없이 고생을 해서인지 몸이 성한 데가 없어도 어쩐지 아들 내외한테는 쉽게 어디 아프다란 말하기가 왜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무릎관절이 안 좋아서 매번 며느리한테 병원비 타서 병원다니는 내 신세가 왜 그렇게 한스럽던지.....

참, 모든 시어머니들이 이렇게 며느리랑 함께 살면서 눈치 보면서 알게 모르게 병들고 있을겁니다.

어디 식당에 일이라도 다니고 싶어도 다리가 아파서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아들한테 짐만 된 거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며느리가 용돈을 처음엔 꼬박 잘 챙겨 주더니 이년 전 다리가 아파서 병원을 다니면서부터는 제 병원비 탓인지 용돈도 뜸해지더라구요.

그래도 이따금씩 아들놈이 지 용돈 쪼개서 꼬깃꼬깃 주는 만 원짜리 서너 장에 내가 아들놈은 잘 키웠지 하며 스스로를 달래며 살았지요.


그런데 이따금씩 만나는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밥 한끼 사주지 못하고 얻어만 먹는게 너무 미안해서 용돈을 조금씩 모았는데 간혹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병원비 달라 소리 못할 때마다 그 모아둔 용돈 다 들어 쓰고 또 빈털터리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정말 친구들한테 맘먹고 밥 한번 사야겠단 생각에 아들놈 퇴근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야야, 용돈 좀 다오. 엄마 친구들한테 매번 밥 얻어먹기 미안해서 조만간밥 한끼 꼭 좀 사야 안 되겠나.”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만 아들놈 하는 말이 “엄마, 집사람한테 이야기 할께요.” 그러곤 들어가지 뭐예요.

내가 괜히 말을 꺼냈는가 싶기도 하고 며느리 눈치 볼 일이 또 까마득했어요.

그렇게 아들놈한테 용돈 이야길 한지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답이 없길래 직접 며느리한테 “아가야, 내 용돈 쫌만다오. 친구들한테 하도 밥을 얻어먹었더니 미안해서 밥 한끼 살라한다.” 했더니 며느리 아무 표정도 없이 4만원을 챙겨 들고 와서는 내밀더라구요.

4만원 가지고는 15명이나 되는 모임친구들 5000원짜리 국밥 한 그릇도 못 먹이겠다 싶어서 다음날 또 며느리를 붙들고 용돈 좀 다오, 했더니 2만원을 챙겨 주었어요.


그렇게 세 차례나 용돈 이야길 꺼내서 받은 돈이 채 10만원이 안되었지요.

그래서 어차피 내가 밥 사긴 틀렸다 싶어서 괜한 짓을 했나 후회도 되고 가만 생각해 보니깐 괜히 돈을 달랬나 싶어지길래 며느리한테 세 번에 거쳐 받은 10만원 안 되는 돈을 들고 며느리 방으로 가서 화장대 서랍에 돈을 넣어 뒀지요.

그런데 그 서랍 속에 며느리 가계부가 있더라구요.

난 그냥 우리 며느리가 알뜰살뜰 가계부도 다 쓰는구나 싶은 대견한 생각에 가계부를 열어 읽어 나가기 시작을 했는데, 그 순간이 지금까지 평생 후회할 순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글쎄, 9월14일 왠수 40000원. 9월15일 왠수 20000원. 9월17일 또 왠수 20000원.  처음엔 이 글이 뭔가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날짜며 금액이 내가 며느리한테 용돈을 달래서 받아 간 걸 적어 둔 거였어요.


나는 그 순간 하늘이 노랗고 숨이 탁 막혀서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남편 생각에..... 아니, 인생 헛살았구나, 싶은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들고 들어갔던 돈을 다시 집어 들고 나와서 이걸 아들한테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가 생각을 했는데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이야길 하면 난 다시는 며느리랑 아들 얼굴을 보고 함께 한집에서 살 수가 없을 거 같았으니까요. 그런 생각에 더 비참해지더라구요.

그렇게 한 달 전, 내 가슴속에 멍이 들어 한10년은 더 늙은 듯 하내요.

얼마 전 들은 그 90대 노부부의 기사를 듣고 나니깐 그 노부부의 심정이 이해가 가더군요.

아마도 자식들 짐 덜어 주고자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어요.

며느리랑 아들한테 평생의 짐이 된 단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더 추해지기 전에 죽어야 할텐데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도 이제 곧 손자녀석도 태어 날텐데 자꾸 그때 그 며느리의 가계부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 멍들어서 더 늙어가면 안되지 싶은 생각에 오늘도 수십 번도 더 마음을 달래며 고치며 그 가계부의 “왠수란” 두 글자를 잊어보려 합니다.

차라리 우리 며느리가 이 방송을 들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젠 자식 뒷바라지에 다 늙고 몸 어디 성한데도 없고 일거리도 없이 이렇게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과인지 모르시죠?

이 세상 부모로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식한테 받는 소외감은 사는 의미뿐만 아니라 지금껏 살아 왔던 의미까지도 무의미해진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라도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 가슴 아팠던 심정을 털어 놓았느니 며느리 눈치 안보고 곧 태어날 손자 녀석만 생각하렵니다.

요즘은 내가 혹시 치매에 걸리지나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책도 읽고 인터넷 고스톱도 치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글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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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어드린 이 글을 지금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지만, 내 자식이 부모인 나에게 이럴 때 과거의 나는 내 부모에게 어땠던가를 생각해 보시면서 우리 모두 가슴 아픈 물질 만능시대의 축생만도 못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바로 봐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내 자식은, 내 며느리는 안 그럴거야! 하는 안심은 모르는 일입니다.

아는게 병이될 수 있고, 모르는게 약이 될 수 있는게 세상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하고 간절하게 선연을 짓고 살아가야하고 선업을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고 이렇게 업장소멸 기도를 하고 또 하고 평생을 걸쳐서 해야 하는 것이 업장소멸 참회기도인 것입니다.


이 몸, 지금 누구라는 이 이름 갖기 전의 돌고 도는 윤회전생의 길에서 부처님 법을 몰라 참으로 어리석게 살아온 우리들인지라 자작자수요, 자업자득이라 지금 살아가면서 삶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꼴들이나 온갖 행, 불행들이 사실은 손에 쥐고 갈 것 하나 없는 뜬 구름 같은 허망한 것들을 쫓아 자작자수라, 과거 전생에 뿌려두고 심어두었던 온갖 업들을 이생에 자업자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법회 때 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자식이 시험에 합격하기를 원하고 남편의 사업이 이루어지길 원하고, 가족들이 병마에서 쾌차하기를 원한다면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질 말고 기도의 대상이 되는 가족들의 과거 전생의 원결과 업장이 녹아지고 소멸되도록 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업이 녹아내리고 원결이 소멸된 사람에게 무슨 장애가 나타날 것이며 무슨 악연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할 것인가를 아시겠지요.

하지만 기도도 제대로 된 기도를 하고 살아가야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읽어드릴 글은 실제로 있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복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왜냐? “맹구우목”이라 절집 많이 드나드신 분들은 척,알아들으실 겁니다.

큰 절의 법회에 가보면 큰 스님들이 주장자 집고 매냥 하시는 말씀이 이 말씀은 감초인지라 “인생난득이요 불법난봉” 이라 금생에 사람 몸 받기도 어렵지만 불법 만나기는 더 어렵다고 하면서 단골법문 메뉴의 한 대목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이 베살리의 원숭이 연못 옆 중각강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연못 주변을 산책하시던 부처님이 문득 아난다에게 이런 것을 물었습니다.

“아난아,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번 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쉴 수 있단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눈먼 거북이가 때가 되어 물 위로 나왔을 때,과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하고 묻자, 아난은 “그럴 수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눈까지 먼 거북이가 백 년 만에 떠올라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머리를 내밀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난다는 것은 도저히 확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눈먼 거북이는 넓은 바다를 떠다니다 보면 서로 어긋나더라도 혹시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들은 육도윤회를 돌고 돌면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란 저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나기 보다 더 어렵단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선을 행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서로서로 죽이거나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해쳐서 한량없는 악업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내가 가르친 “네 가지 진리”를 부지런히 닦아가라.

아직도 알지 못했다면 천리를 마다하고 찾아가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축생이나 미물들은 주어진 본능으로 살다 가지만 윤회를 몇 백겁, 몇 천겁 거듭거듭 하다가 다겁생을 돌고 돌아 이렇게 소중한 사람 몸 받은 지금의 우리는 마치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밀어 구멍 뚫린 판자를 만나 목을 넣고 쉬고 있는 거북이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귀한 부처님의 품안에 안겨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이성적인 올바른 신앙과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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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사를 어머니로 둔 어떤 이의 절규..”

(영안실에 문상을 가서 곁에서 지켜본 친구가 쓴 글입니다.)

평생을 간절한 기도와 지독한 신앙생활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지인의 어머님께서 중풍과 치매로 갑자기 쓰러지셨다.

그 어머님은 80인 나이까지 개신교 교회의 전도사로 예수의 말씀을 전파했고, 기도와 찬양과 전도 등등으로 평생을 살아 온 분이었다.

그런데, 중풍과 치매로 쓰러져 입원한 병원에는 환갑에 가까운 자식 혼자 쓸쓸히 쓰러진 어미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평생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뿐인 자식을 돌보질 않아 자식은 국민학교(초등학교)때는 친척집의 수양자식으로 보내졌고, 중학교 때부터는 눈치 밥 먹는 것이 힘들어 스스로 힘들게 일을 하고 벌어가며 야간고등학교에 대학까지 갔었고 그 어미의 자식은 지금 저명한 예술인으로 현재 활동 중이다.

지인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낳아준 은혜 외에는 아무 은혜도 베풀어 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니고 있던 집 두채를 독실한 신앙생활과 품위유지비등으로 다 날려먹었고 늘그막에 홀로되어 나라로부터 받는 몇 십만 원씩 다달이 나오는 돈을 받고 나라에서 홀로된 노인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를 내어주어 그 곳에서 생활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그 병원에는 그토록 믿어왔던 그 분의 형제자매님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는 교회해서 모든 것을 다 해줄 거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다.

지인이 병상의 잠깐 정신이 돌아온 모친께 그동안 한 서린 속내를 조금 이야기하며 결국에는 자신을 버린 모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길 기대하며 한마디 했다.

“내겐 베풀어준 것이 없지만 가시는 길엔 죽음을 앞둔 많은 자식들에게 좋은 일 하시라”며 임종 시 신체를 연구용으로 기증하거나 장기기증을 하는 것을 권유하자, 그 믿음과 예수님사랑으로 똘똘 뭉친 지인의 모친은 단칼에 거절했다. 

지인 왈, “어머니가 안된다 거절했지만 돌아가시면 대학병원에 시신을 기증할 것이고, 나 또한 훗날에 그렇게 할 것이다. 연구용이든 사람을 구하는 용도이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 보다 더 값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머님이 평생을 입으로 믿으시던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왜 닥치니까 실천은 하지 않으려 하는지, 도대체 평생동안 재산과 인생을 다 바쳐서 무엇을 하셨는지, 자기 자식 하나 돌보지 않고 열심히 교회 활동하고 살다가 다 죽게되니 뻔뻔하게 그제서야 자식을 찾은 사람이 뭘 하겠다고 그러고 다녔는지 한심하다.”고 친구인 내게 한 맺힌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를 하는 환갑을 앞 둔 친구의 소리 없는 절규가 잊혀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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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아주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한 가지가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부처님의 진리와 만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있습니까? 수많은 생명 가운데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는 일이란 참으로 희유한 일이지만, 수십억의 인구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인연 또한 희유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탈레반으로 태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의 진리를 만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대단하고 희유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인연인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만남을 인연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듣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사수”(聞思修)의 세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듣는 지혜인 문혜입니다.

듣고 읽어서 이해하는 문혜는 단순히 이해 차원의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혜는 자기 속에서 내면화가 되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깊은 차원의 이해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생각하는 지혜인 사혜입니다.

이 사혜가 내 삶과 연결되어져 사색과 관찰을 통해 터득될 때 비로소 그 앎은 내 것이 되고 바로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 번째의 실천인 수혜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은 이렇게 듣고 이해한 것이 내 삶을 변화시키는 수혜의 차원으로 정진되어가는 공부여야 합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짓이 아닌  진리라는 그 사실을 믿고 알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알았으면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그리하면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얻어지는 것은 스스로 찾으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40대 나이면 종착역에 40km로 달리고 있고 50대는 50km, 60대는 60km의 속도로 가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내 뜻과는 달리 하염없이 가고만 있는 세월 속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위해서, 잘 살아보기 위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지만, 전번 말씀드린 대로 덜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덜 잘못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두가 종교라는 정신세계를 선택하고 그 선택한 정신세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행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유한한 삶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중생인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를 하고 수행자들은 수행을 하고 성직자들은 각자 종교의 교조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요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조계종단의 돌아가는 꼴들이나 아프칸에서 돌아온 인질들의 가족들과 그 교회 성직자들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작태들을 보게 되면 과연 신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 사후 말법시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가서는 당신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표현하기에 입에 담기가 어려워 아! 슬프다. 하시면서 말할 수 없음을 괴롭게 한탄하시며 입을 다물어버리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세존께서 도저히 말로써 해줄 수 없어  입을 다무셨던 시대를 우리는 지금 당사자가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바로 오탁악세입니다.


자신들의 분식집을 차린다는 목적으로 애꿎은 처자들을 돈 몇 푼에 강도질하여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이런 시대가 우리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존께서 그토록 걱정하셨던 오탁악세란 과연 어떤 세상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탁악세란 세상이 끝나가는 말세에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을 말하는데, 인간들이 지식만 늘어나고 지혜가 엷어지면서 온갖 이기심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사회적, 정신적인 탁한 다섯가지 업력이 난무하는 혼돈의 세계를 말합니다.


첫째는 겁탁(劫濁)이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이 악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악성전염병 등으로 한시도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지 못하는 사회악이 범람하는 시대로 기근·질병·전쟁·천재지변 등이 수시로 일어나는 시대를 말합니다.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별의 별 꺼리를 만들어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있고, 아프리카의 수단이라는 나라에서는 같은 나라 안에서 물 부족으로 인한 부족전쟁으로 20만이라는 사람들이 애 어른 남녀 할것 없이 살육되고 있어 엊그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그곳을 갔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듯이 한 곳에서는 물자가 풍부한데, 한 곳에서는 굶어 죽는 기아현상이 생기며, 예전엔 이름도 모르던 무서운 병이 나타나고, 오존층 파괴로 인한 이상기후 현상으로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일어나거나 해일과 홍수가 일어나는 현상을 겁탁이라 부릅니다.


두 번째의 견탁(見濁)은 사악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자들이 선한 탈을 쓰고 온갖 달콤한 말로 내면이 나약한 이들을 꾀어내어 무리를 지어 세력을 얻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힘을 잃어가는 시대로 사악한 견해가 범람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음란물이 태연히 청소년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돌고, 남녀 구별 없이 참된 인간성을 버리는가 하면, 돈을 위해선 어떤 악행과 음행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번뇌탁(煩腦濁)이라 해서 자기만 옳다는 견해에 떨어져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나와 남을 끝없이 고통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자신의 것은 아끼고 남의 것은 탐내는 등, 권세와 명예만을 탐내는 무리들이 우글대는 세상으로 대권을 잡아보겠다고 온갖 짓을 다하는 이 시대 여야의 대권 주자들과 하등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중생탁(衆生濁)으로 사람들의 심성과 자질이 극도로 저하되어 견탁과 번뇌탁에 물들고 길들여져 몸과 마음의 자질이 천박해지고 스스로 천박한 업을 부끄러워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연예인을 동경하여 온갖 꾐에 빠져들고 동네에 슈퍼가 신장개업을 해도 옷을 걸친 건지만지 하는 아가씨들이 배꼽 다 들어 내놓고 춤을 추고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 결코 좋은 업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의 다섯 번째는 명탁(命濁)으로 수탁(壽濁)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점점 짧아지고 불의의 사고와 천재지변에 의한 죽음이 많아지는 시대를 말합니다.

수시로 일어나는 대형 교통사고와 비행기 사고 천재지변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오탁악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다섯가지의 혼탁한 세상이 되는 원인과 결과는 이 모두가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업력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알려고 하고 배우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불자들이라면 이 모든 오탁악세의 고통과 번뇌가 다름 아닌 중생들 각자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와 마음의 업 때문에 벌어지는 업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반성하여, 스스로 이 오탁악세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가까운 가족들부터라도 오탁악세를 벗어나는 인연을 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증일아함경 제25권 오왕품(五王品)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 고독원에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APEC회담을 치르는 노무현대통령처럼 파세나디 왕을 비롯한 다섯 나라의 국왕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때 한 왕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는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것에 대해 ‘다섯 가지 욕망(五欲)’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은 다섯 가지 욕망을 사랑하고 서로 갖고 싶어하고 이루고 싶어하며,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 욕망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즐거운 것일까요?”하고 다른 왕들에게 물었습니다.


서로 갑론을박을 하던 왕들은 공감할 수 있는 결론을 찾지 못하자 가까운 곳에 계시는 부처님을 찾아가 여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제왕들의 주장은 때에 따라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대개 사람의 성행(性行)이 빛깔에 깊이 집착하면, 아무리 그것을 보아도 싫증을 내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빛깔이 가장 묘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므로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빛깔에 집착할 때, 그는 소리나 냄새나 맛과 감촉에는 집착하지 않으므로 다섯 가지 즐거움 중에서 빛깔이 가장 즐겁다고 말할 것입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자기 입맛에 맞고 자기의 기호에 따라 평가를 내리게 되듯이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는 성적 욕망이 가장 무섭다거나, 식욕이 가장 무섭다는 식으로 대부분 자기 견해만으로 차별적 대상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생각들마저도 세월에 따라 무상하게 변하고 바꿔져가는 것일 뿐이기에, 증일아함경 25권 오왕품(五王品)에 나오는 이상의 내용에 관해서 부처님께서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평등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이라는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에 대해 어떤 것이건 탐착하게 되면 그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적인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감촉의 욕망이 가장 무서운 것이며, 식욕에 탐착하는 사람에게는 음식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갖가지 욕망의 대상은 대상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탐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은 ‘감각적 욕망은 물질을 탐착하는 행동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가’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욕구가 왕성할 때는 기어코 욕망을 이루고자 하며, 그것을 체험하고 성취한 뒤에는 더욱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없다. 그는 욕망을 이루지만 탐하는 마음을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경계(境界)를 탐착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 그것이 가장 즐겁다고 한다.”고 덧붙이십니다.


욕구를 충족하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욕구를 충족하고자 끄달려 가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감각기관의 욕망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빛깔과 모양을 보고, 그 욕망의 대상을 소유한다고 해서 욕망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감각적 욕망의 실현은 이 같은 욕망을 더욱 부추겨서 끝없이 대상을 향해 질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욕망이 물질을 통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면 대상을 향한 욕구 충족을 위한 인간의 질주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내면적 결핍이므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것은 그 같은 근원인 내면적 결핍을 해소하는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대상을 향한 질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깔에는 빛깔의 맛이 있고, 빛깔로 인한 과실(過失)이 있고, 빛깔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빛깔의 맛에 탐착하고 빛깔의 허물에 속박 당합니다. 그러나 빛깔에는 유혹하는 맛과 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깔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감각적 욕망을 따라 경계에 이끌려 다니면 빛깔은 중생을 속박하는 허물이 되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따라 갖가지 경계로부터 벗어날 때, 그 길은 열반의 저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섯 가지 감각적 욕구로부터 초연해 질 때, 우리는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을 체험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는 사실을 이 경전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바새경의 “업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중생은 괴로운 인연 때문에 신심을 내게 되고 이미 신심을 얻으면 능히 선과 악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세상이 혼미하고 탁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을 정화하고 맑게 하려는 의지로 수행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부처고 예수고 다 거추장스럽고 제 잘난 맛에 살아 가는게 대부분의 중생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일요법회에 참석하여 그동안 알게 모르게 뿌린 신구의 삼업의 씨앗들을 정화하고 맑혀 남은 삶일지라도 밝고 긍정적인 든든한 의업을 지어 일상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오탁악세를 지혜롭게 잘살아가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다섯 가지 감각적 욕구로부터 초연해 질 때, 우리는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을 체험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는 사실을 이 경전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번 피납사태의 주역인 분당의 샘물교회 담임목사인 박은조 목사님의 자기만이 옳다는, 자신의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착각하는 생각이 바로 견탁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견탁으로 인해 인질들과 그동안 온 나라가 번뇌탁과 중생탁과 명탁이 고리를 이은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올바른 신행을 방해하는 십사비방

세월은 참 빨리도 가고 손에 쥔 것은 없고 살아가는 현실은 팍팍하기만 할 것입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잡는데만 혈안이 되어있고, 종교와 신앙을 가진 자들마저도 세력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득과 기득권을 잡기 위해 그 알량한 교세를 넓힌다는 미명으로 온갖 추한 짓을 다하고 있는 것이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의 현 주소일 것입니다.


 중국천하를 통일 했던 진시황도 결국은 중국변방의 한줌의 흙이 되었고,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면서 인간세상 팔십도 채 못살면서 예수님 앞세우고 천국과 지옥을 미끼로 온갖 장사를 해대는 요즘의 서양종교들이나 부처님 앞세워 종단에서 행세깨나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온갖 어리석음으로 망신추태 다 당하는 승가의 권력승들이 이 시대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점에서 메뉴 많이 안다고 배부른 것도 아니고 숟가락이 부지런하다고 배불러지는 것이 아니듯 옆 사람이 장을 지지든 죽을 끓이든, 그것은 그 사람의 업일 뿐이고 주어진 한 세상에 내 업은 내가 지을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한 지붕에 사는 가족 간에도 제 업은 제가 지을 뿐인 것입니다.

엊그제 용인에서 50이 다 되도록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던 아들에게 70대 부모가 너도 돈 좀 벌어오라고 했더니 그럼 사업자금 좀 대달라고 해서 다툼이 일어나 자식 손에 죽은 부모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가족들을 대표로 해서 기도하고 부처님 가피만 구하려 들지 마시고 젊은 애들에게는 인터넷 카페에서 법문이라도 읽도록 해주고 자꾸 부처님 인연을 지어주세요.


인과법을 아는 사람은 나쁜 짓을 못합니다.

제가 저질러 놓고 회개해버리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난다는 논리가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참회하고 뉘우친다고 해서 인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인과는 언젠가는 받게 되지만, 당당하게 인과를 수용하고 받아낼 줄 아는 지혜를 갖는 힘을 주신거란 말입니다.


그동안 제가 우리절에 주지소임을 보면서 일요일 마다 무수 법문을 하고 저와 더불어 모두를 위한 업장소멸기도를 했건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께서나 또는 인터넷 상에서 법문을 대하시는 분들이나 영등포에 인연되신 모든 분들의 삶이 얼마나 변했고 얼마나 달라지시고 계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면서 법회 준비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팔만 사천이나 되는 법문을 설하셨고 그 가르침은 지금껏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敎)라 하는데, 이것이 중국을 통해 경(經)이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어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라 부릅니다.


팔만대장경은 삼장(三藏)이라 하여 경(經)과 경의 해설서인 논(論)과 불자들이 지켜야 할 계(戒)와 율(律)을 모아놓은 율장이 있고 조사(祖師)들의 행적과 법문 등을 추려놓은 고승전등을 포함한다면 해인사 목판의 판각장수는 팔만사천이 넘고 경(經)수로는 천오백십사 경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평생에 팔만대장경 모두를 읽어 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부처님의 팔만사천의 법문은 온갖 욕망과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불심에서 나왔던 지혜의 가르침이었고 그 가르침의 대상인 중생들의 번뇌와 욕구로 가득 찬 중생심이 있었을 것이니 불심이든 중생심이든 결국은 이 한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업보중생인지라 바로 과거 전생의 업이든, 전 전생이든 아니면 다겁생의 업에 의해서이던 간에 우리는 끝없는 윤회를 거쳐 지금 이 순간 이 한 생의 현재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업(業)이라고 하면 나쁜 쪽으로만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쪽의 업도 있습니다.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들 하듯이 업에 대한 보(報)를 정보(正報)와 의보(依報)로 나눕니다.


정보(正報)란 신심(身心)입니다.

자기의 평상심이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마음세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어떠한 몸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자기가 지금까지 지어온 업(業)에 대한 보(報)인 것입니다.


의보(依報)란 처지(處地)입니다.

자신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처지, 곧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 의보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어떠한 몸,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떠한 처지에 있게 되는가 하는 것은, 어젯밤 잘 때까지 만들었던 일체의 업이 인(因)이 되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보와 의보라는 것은 현실생활에서 자기에게 나타나는 일상의 현상이자 현주소인 것입니다.

어젯밤 술에 떨어져 있었다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것이고, 밤늦게 까지 온갖 고민을 하며 잠을 설쳤다면 아침에 머리가 개운치 않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업보라고는 하는 것은 정보와 의보 양쪽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정보와 의보는 자기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만들어낸 결과인 것입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자기의 현실을 조상 탓이나 부모 잘못 만난 탓이나 주변 환경이나 처지 등으로 자신의 정보와 의보의 책임을 남의 탓으로 전가(轉嫁)시킨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다가온 삶의 일체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업에 의해 스스로 초래(招來)한 결과라고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게 되고 이러한 생각을 근본으로 해서 다시 더 나아가 행위에 대한 결과로서 지금의 자기가 그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 지금 받는바, 현실의 삶은 과거의 과보임을 깨닫고 업보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소화시킴으로써 현재의 자기의 몸과 마음, 자기의 처지를 더 좋게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전제한 것이 업(業)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들께서 누누이 간절하게 하신 말씀들을 우리는 믿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비유품을 보게 되면 “사리불아, 너도 오히려 이 경에는 믿음으로써 들어와 얻었으니(以信得入), 하물며 다른 성문이랴.

사리불아, 지혜가 제일이라는 너도 신해(信解), 곧 믿음으로써 들어와 얻지 않았느냐.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덮어 놓고 아무렇게나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해(信解), 곧  깊이 믿음으로서 알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뿐이고 이해(理解)가 없으면 마음에 진정한 안락을 얻지 못합니다.


올바른 이성적인 이해가 없는 믿음은 맹신에서 광신에 이르게 되고 소망이 지나치면 기복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 사랑이 지나치면 집단적인 에고에 떨어져 자기 주변만을 애착하게 되는 정신질환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요즘 예천불지라는 한국의 기독교 문화를 말합니다.


해가 있으면 달도 있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석양도 있고 새벽도 있는 것입니다.

천지자연의 이치를 알고 천하 만물의 존재가치를 인정할줄 알 때, 자기 견해에 떨어져 구별 짓는 옳고 그름이 부질없다는 것도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믿음의 장애가 되는 것이 열 네가지가 있으니 이를 십사비방(十四誹謗)이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신심이 약해지거나 그릇된 신앙의 원인이 되는 열 네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법화경 비유품에 보면 십사비방(十四誹謗)이 나오는데,

첫째는 교만(驕慢)이요, 둘째는 해태(懈怠)라, 게으른 것입니다. 

셋째는 계아(計我)라, 계아란 아견(我見)을 세우는 것으로, 자기를 중심해서 모든 사물과 현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에 모든 일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처지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생각도 각각 다르듯, 서로가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면 세상은 불평불만과 싸움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네 번째는 천식(淺識)입니다.

식견이 얕다는 것은 사물의 표면만을 아는 것으로, 중심되는 중요한 점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겉에 나타난 것만을 알고 그것으로써 스스로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읽더라도 문저비침(文底秘沈)이라, 글속에 숨은 참 뜻을 잡지 못하면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식, 곧 얕은 식견은 진정한 신앙을 얻는데 장애가 되는 조건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착욕(着欲)이라, 오욕에 깊이 집착하는 것, 곧 생활상(生活上)의 다섯 가지 욕망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고, 좋은 냄새를 맡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부드러운 것에 닿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러한 욕망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오욕락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의 업을 바꿀 근기가 못된다는 말입니다.


여섯째는 불해(不解)라,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경전을 듣고 읽어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거나, 아무리 많은 것을 익혀 알아도, 모든 구절을 자기 위주로 해석해서 부처님의 참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또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불신(不信)이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를 중심하여 남의 일을 추단(推斷)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여덟째는 빈축(嚬蹙)이라, 자기의 생각이나 주관과 조금만 틀려도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어 얼굴을 찡그리고 비죽거리는 것입니다.

다만 말로만 좋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그 생각을 겉에 나타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훨씬 더 심하고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아홉째는 의혹(疑惑)이라, 대충 이치(理致)는 알고 있지만, 과연 범부인 내가 즉신성불 할 수 있을까 하고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기도하면 정말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마음을 말합니다.

열 번째는 비방(誹謗)이라, 입으로 남을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나쁘게 말하면, 자기는 훌륭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래서 애써 남의 결점을 들추어냅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 남의 좋은 일도 나쁘게 말하는 네가지 구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열한 번째는 경선(輕善)이라, 좋은 것을 가벼이 여기고 천대(賤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선(善)이라도 시작함으로 해서 큰 선(善)을 행할 힘도 생기는 것이니, 선행을 행하는 타인의 작은 선(善)이라도 존중(尊重)해야 하며, 그 선(善)을 본보기로 해야 합니다.

열두 번째는 증선(憎善)이라, 선(善)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시기 질투하여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쁜 짓을 하는 무리가 저희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착한 사람을 미워하고 심하면 때리어 중상(重傷)을 입히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증선(憎善)입니다. 

열세 번째는 질선(嫉善)이라, 열두 번째의 증선에서 더 발전하여 선(善)을 행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 좋은 갚음이 올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 좋은 갚음이 올 것 같아 보이면 질투를 하고, 이어서 배척운동(排斥運動)까지 일으킵니다. 

열네 번째가 한선(恨善)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비행이 들어나게 되면 선(善)을 행하는 사람을 적(敵)으로 삼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십사비방입니다.


올바른 종교관이나 신행생활에 장애가 되는 십사비방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종법사(①받아 가짐(受持)②읽음(讀)③외움(誦)④해설(解說)⑤옮겨씀(書寫))에 대해 적(敵)이 되어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과보가 대단히 크다고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이 대목은 기독교인들이 좀 새겨들었으면 싶은 데 아마도 귀 막고 살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던 사람이 죽으면 어찌되는가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명을 마치고 아비지옥(阿鼻地獄) 에 떨어져 일겁을 마치고 겁이 다하여 다시 나되, 이와 같이 되풀이하기를 수없는 겁에 이를지니라.

그 사람은 명(命)이 다하면 아비지옥에 갈 것이며, 일겁이라는 긴 세월을 그곳에 살다가 그 인과(因果)가 끝나면 다시 다른 지옥에 태어나고, 이와 같이 지옥계를 빙빙 돌며 무수한 세월을 지옥 속에서 지내며 한없이 되풀이하여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또, 지옥계라는 괴로운 데서 벗어나더라도, 이번에는 축생계라는 데에 떨어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혹은 개가 되고, 혹은 여우가 되거나 해서 그 모양이 몹시 여위고 빛도 새캄하며 몸에 여러 가지 종기가 생기고, 또 사람에게 학대를 받아 숱한 고생을 할 것이다. 혹은 또 사람에게 미움 받고 천대 받으며, 혹은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기도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몸이 여위어 뼈와 가죽만 남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살고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괴로움과 번민을 받고, 죽은 다음에도 그 시체에 돌이나 기와조각을 맞을 것이다.

단불종고 수기죄보(斷佛種故 受斯罪報)라 부처님의 종자(種子)를 끊은 고로 이러한 죄보를 받느니라.” 그것은 부처님의 종자를 끊었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능엄경에, “들은 것이 많다 하더라도 만약 수행하지 않으면, 듣지 않음과 같다, 남에게 음식을 설하더라도, 끝내 배부를 수 없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많이 들어서 알고 있더라도, 알고만 있어서는 그것은 다만 지식일 뿐, 안 것으로써 자기의 행동을 좋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듣지 않아서 모르는 것과 같고 마치 맛있는 음식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다만 말 뿐이고 먹지 않으면 언제까지 가도 배가 불러오지 않음과 같은 것과 같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실행하지 않아 스스로 얻는 바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항상 자기를 되돌아보아 선악을 경계하고 믿음이 끊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심지관경(心地觀經)에 “불법의 바다에 들어감에는, 신(信)을 근본으로 삼는다. 생사의 바다를 건너감에는 계(戒)를 배나 뗏목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불법(佛法)이란 넓은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 불법에 들어가려면 믿음이 근본입니다. 

생사(生死)의 바다, 곧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자칫하면 외부로부터 유혹을 받아서, 모처럼 얻은 믿음이 그만 뒤죽박죽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계(戒)를 배(船)나 뗏목으로 생각하여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인생은 난득이요 불법은 난봉이라 했지만 금생에 인연이 지중하게 됐으니 부처님의 계법에 의지해서 차안에서 피안을 건너가는 지혜로움을 얻으시길 축원드립니다.

 

 

행복하게 살고 효자효부를 두고 싶은가요?

 

 

이렇게 빨리 가는 세월에 인간사 불과 백년도 채 못 살고, 겨우 인생 칠팔십 살고들 가면서 하룻밤 자고 밤사이 뉴스를 듣다보면 저 사람들은 왜 사나? 가 아니고, 저 인간은 귀신도 안 잡아가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죽은 사람 탈이건만 심성은 개만도 못한 사람 아닌, 인간 못된 종자들의 소식을 너무도 쉽게 접하다보니 현대인들은 곧잘 타성에 젖어드는지라 요즘은 웬만한 자극이나 충격에는 눈도 깜짝 안하고 산다고들 합니다.


전번에 인터넷뉴스를 보니 아들이 부모님을 살살 꼬드겨 겨우 2억에 불과한 집을 팔아서 필리핀에 가서 잘 모시겠다고 하구선 집을 팔아 필리핀에 모시고 가선 부모를 버렸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어쩌다 요즘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되어 가는지 혼자 기도하다말고 가만히 망상을 부려 살펴보니 다 원인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저야 혼자 살아오지만 여러분들은 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구성하고 오손도순하게 살아가고들 계십니다.

결혼하기 전이야 서로 좋아 죽지 못해 안달들 하다가 검은 머리 허연 파 뿌리 될 때가지 살아가겠다고 주례선생님이 물으면 결혼식장에 온 모든 하객들한테 큰소리 다 쳐놓고도 몇 달 못가서, 아니면 몇 년 못가고, 심지어는 황혼이혼이라고 아실런가 모르지만 다 늙어가지고도 헤어진다고들 하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인생들입니까?


어제 신륵사 찻집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보살님 한분이 전화를 하고 찾아왔었습니다.

속이 너무 답답하고 뭔가를 해야 하는데 싶어 소위 운세상담을 하러 왔더란 말입니다.

방에 거울도 없이 사는 제가 좀 잘 본다고 소문이 났나봅니다. 자기들의 업력만 볼 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보살님과 이야기 도중에 이 날 이때까지 남편이 아이들 다 크도록 등록금 한 번을 내주지 않았고, 자신이 벌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이혼을 했으면 편하겠는데 애들을 봐서 그러지도 못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전생에 지은바 복력이 있으신지라 이렇게 사시는 겁니다.

그 보살님에게 인연인과법과 마음공부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어도 너무나 초심자인지라 앞으로 자주 오시고 법회도 참석하시고 기도하는 법도 배우시라고 했지만, 보내놓고도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법문을 이 주제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그늘에서 살 때는 동업중생이 되어 천지가 동근이라 하늘과 땅이 한 뿌리라고 해서 한 솥 밥을 먹으며 한 가족으로 살았지만, 결혼한다고 천하천생배필을 만나기 위해서 그토록 요모조모 조건 따지고 학벌 따지고 집안 따지고 직업 따져가며 배우자를 선택했는데, 그렇게 고르는 이유가 뭣 때문입니까?


사실, 그 따져보는 그 속내는 저 여자 만나 저 남자 만나 살면서 고생 좀 덜하고 덕 좀 보자는 속내가 있기에 그런 것 아닙니까?

이것저것 이 조건 저 조건 다 따져서 손해 볼 결혼은 안 하고 남는 장사해보겠다고 고르고 골랐던 것 아닌가요.  

서로가 이렇게 속셈이 있어 잘 골랐다고 했는데, 혼수에서부터 밑진다는 한심한 생각이 들면 다툼의 원인이 되고 사니 마니 하는 짓들이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범망경에 부부는 7천생의 인연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또, 8천생의 인연이 있어야 부모 자식이 되고, 9천생의 인연이 있어야 형제자매가 된다고 했는데, 이렇게 많은 생을 서로 인연 짓고 살아오면서 어찌 좋은 일들만 서로가 해주고 살았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라도 몹쓸 말을 했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 상처를 주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니 금생에 인연되어 만난 이들에게 항상 빚 갚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전생의 빚을 다 갚을꼬,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상대방이 좀 서운한 짓을 하더라도 자기가 뿌렸던 씨앗을 거두고 있으니 당할 때 마다 한가지 씩 빚이 탕감된다하고 생각한번 바꾼다면 얼마나 편안해지겠습니까?

아까, 제게 상담했던 보살님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무명답답 중생에게 해준들 귀에 들어오겠나 싶어 세월을 기다려 인연이 지중하면 다시 올 것이라 여겨 복채는 어떻게? 하길래 복채는 이미 받았다고 하고 웃고 그냥 보내고 말았습니다. 중생제도에 중중무수방편아닙니까?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나하고 살면서 나한테 고맙다는 말이 나오도록 해줄 생각을 한다면 파뿌리가 아니라 말린 인삼뿌리가 될 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헌데, 시작부터 지 꾀에 지가 넘어가듯 단추를 잘못 끼워 놓고는 사주팔자만 보려고 허니, 난들 무슨 뾰쪽한 수가 있나요.

그러한 자신의 업을 바꾸려면 얼마나 지극하게 기도와 공덕으로 노력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궁합도 그렇습니다.

전번에 말씀드린대로 궁합의 네가지 유형을 말씀드렸지만 이젠 이것도 틀려요.

얼마 전에 속가의 조카 놈이 선을 본다고 궁합을 묻기에 보니 궁합도 맞고 성격도 맞는 천생연분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야야! 이 가시나를 잘 좀 해봐라, 니하고 천생배필이다, 했더니 조카 놈도 신중히 대하고 했나봅니다.

아! 그런데 얼마 전에 물어보니 조카 놈이 두 번 다시 그 여자애 말은 꺼내지도 못하게 하더라고했답니다.

이유인 즉,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학벌, 직업 온갖 것 다 따지는데 질려서 그런 정신상태라면 아예 첨부터 안보겠다고 하더랍니다.   

궁합본다고 자신의 선악의 인연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겉 궁합 속궁합 다 따져서 살아봐도 이런 심보가 안 바뀌면 살면서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오늘 법회에 오신 보살님들이나 처사님들은 설마 이런 분들은 없겠지요?


두 부부가 항상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웬만한 일에는 서운함도 쉽게 오질 않고 미운 맘이 일어났다가도 스스로 깨달아 조절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이 어떻게 되느냐, 서로의 마음이 항상 편안하다 보니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도 생기질 않고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오장육부가 편안해지면 나이 드신 분들은 웰빙 황혼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고 또, 젊은 신혼들은 태교를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신해서 백일이 지나면 인연중생이 태아의 주인공으로 오게 되는데 어미의 마음이 편안하다면 편안한 데는 편안한 주인공이 인연을 맺고, 매사가 짜증과 불평불만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임산부의 태아에게는 그런 업의 중생이 인연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들 入字 입태라 부르고 밸 孕字 잉태라고 합니다. 

입태할 때 산모의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효자를 잉태를 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불효자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효자는 불효자를 둘 수 있으나 불효자는 효자를 둘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 보고 들은 바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항상 하는 애기가 요즘에 온갖 짓들을 다 저지르는 인면수심의 인간들을 보면서 우리 집안에는 저런 일은 없을거야, 하는 안심은 하지 말랬죠?

그래서 보살님들 손자들 볼 때,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 보자는 않했다지만 처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마음에서 살아야 하니 같이 살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지극정성 기도하는 태교를 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하다 애기가 생겨버린 것이니, 처음부터 씨앗 농사를 잘못하게 된거란 말입니다.


보살님들 이런 도리를 몰랐을 때는 엄벙덤벙해서 살았지만, 이제 손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셨지요. 잘들 들으세요.

자식을 효자로 낳고 싶거들랑,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시부모 또한 며느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며느리는 스스로 좋은 생각 편안한 마음으로 지극하게 기도하는 생활을 할 때, 입태의 주인공은 한 가지를 들으면 열을 깨닫고 심성이 선인에 이를 정도의 주인공이 태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도 모른 채, 그냥 둘이 좋아서 만들어 놓고는 효도를 하니 마니,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고 서로 탓만 한다면 닮긴 누굴 닮았겠습니까? 

둘이서 저질러 놓고 말입니다.


결혼이라는 첫 시작부터 서로가 손해보지 않고 서로 덕보려는 결혼을 하려고 하다보니 소탐대실이라 서로 맞벌이를 하려고 하는 요즘 세태에서 무슨 태교가 있겠습니까?

임신해가지고 직장에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신경쓰면서 낳게 된 애가 과연 그 심리가 온전할까요?


이 혼탁한 시대에는 어쩔 수가 없다면 출산해서라도 인성교육이라도 지혜롭게 해야 하건만, 이마저도 인연이 없으면 만나지 못하는 것이니 결국에는 뭔가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 자식들의 살아가는 바는 부모가 살았던 업을 그대로 따라하는 동업중생 밖에는 되질 않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자식들에게 지혜로움을 심어주고 손자들에게 선근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은 업장소멸기도를 죽는 순간까지 하셔야 웰다잉 근처라도 가실 것이고 집안의 후손들이 그 음덕이라도 볼 것입니다.


그런 집안의 선조를 둔 후손들이 되어야 선근이 바탕이 되어 지금 말씀드리는 중국 당나라 때나 조선시대에 인재등용에 기준이 되었다는 신언서판과 진시황의 생부인 여불위의 사람가리는 경계에 걸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당 태종은 과거시험에 통과한 인재를 곧바로 등용하지 않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의 기준으로 인물됨을 평가해서 등용시켰다고 합니다.


요즘은 잘 생기고 봐야 한다지만, 용모보다는 깨끗하고 밝은 인상이 중요하고, 태도와 인성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번째 언은 요즘 정치인들처럼 말 잘하는 언변보다는 진솔한 말과 상대방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말을 하는 것이고, 번째의 서는 필체가 좋은 것보다는 써야할 글과 쓰지 말아야할 글을 말한다고 봅니다.

요즘 신문기사를 보십시오. 기준이 서실 것입니다.

번째의 판은 고도리, 고스톱 판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의 눈과 견해로 판단하지 않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모두를 위한 것에 기준할 줄 아는 판단력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친부인 여불위는 육험론(肉驗論)이라는 책에 사람을 다루고 선택하는 지혜를 써놓았는데 한번 들어보시고 자녀들의 교육을 어찌 시킬 것인가를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여불위는 심복을 쓸 때면 자신이 세운 다음의 원칙에 의해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1. 상대방을 즐겁게 하고 얼마나 깊이 빠져드는지 살핀다.

2. 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얼마나 자제하는지 살핀다.

3. 그 사람을 괴롭게 하고 얼마나 인내하는지 살핀다.

4. 그 사람을 두렵게 하고 얼마나 침착한지 살핀다.

5. 그 사람을 슬프게 하고 얼마나 삭이는지 살핀다.

6. 그 사람을 화나게 하고 얼마나 개의치 않는지 살핀다.

이 얼마나 대담한 시험입니까?


하지만 이모든 시험을 다 통과 할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심성(心性)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손금이라는 수상을 아무리 잘 본다고 해도 관상만 못하고 관상이 아무리 좋다해도 운명이라는 사주팔자보다는 못하고 사주팔자를 아무리 잘 본다해도 심상(心相)만 못한 것 입니다.


자손을 잘 두고 싶거들랑, 효자를 두고 싶거들랑, 아내에게 잘해주고 며느리에게 잘해주고, 남편에게 잘하고 시부모에게 잘하는 며느리가 됐을 때, 입태와 탁태의 주인공은 천하의 효자에 심성과 심상이 다 갖춰진 후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집안을 이루고 싶다면 항상 불법을 가까이 하고 살아가면서 재가자가 지켜야할 실천 규범을 설한 부처님의 말씀인 선생경이라고도 하는 육방예경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지혜롭게 행복을 누리고 사는 법

그래서 오늘 법문은 소참법문으로 짧고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오늘 법문은 원효대사의 말처럼 일체 유심조라 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마음한번 먹기에 달린 것이라고들 합니다.

(원효대사와 자재암,측천무후와 신수대사이야기)


더 쉽게 말한다면 모든 喜老愛樂이라는 것들이 어찌보면 생각 한 번 바꾸기에 달렸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한 생각 좋게 가지려고 하고, 마음을 긍정적으로 돌리려고 노력한다 해도 다겁생 동안 지어온 온갖 업력들로 현실에서 겪는 업보를 감당할 만한 근기가 약한 중생들인지라 현실은 힘들기만 합니다.


눈만 뜨면 밤사이 뉴스를 들어보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저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많은 교회와 사찰들과 성스럽다는 성당들이 아파트 단지마다 종교부지라고 해서 곳곳에 비집고 들어앉아 매주 일요일 마다 성스러운 기도들을 하는데도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렇게 점점 각박해지기만 하고 악한 일들이 비일 비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항상 듭니다.


한국의 대표적 종교인 불교, 개신교, 가톨릭이라는 세 종교의 종교인을 합하면 4,700만의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군소종교까지를 합해보면 국민의 2/3 정도가 종교인이고, 1/3은 무교라 친다 해도, 어느 종교든지 사람죽이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나쁜 짓 하지 말라고 할건데도 어째서 우리 사는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는 것입니다.


소위, 개독교라고 불리는 일부 기독교의 종교적 위선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불교 장자종단이라는 조계종단의 출가정신이 탁해진 탓일런가, 모든 종교가 잘못 가르친 결과일까. 모두들 종교를 잘못 믿기 때문일까. 이런 의문을 숱하게 해봤습니다.


제 생각하기로는 자신이 믿는 종교와 현실을 이분법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교회에 있을 때만 기독교인이고, 법당에 있을 때만 불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이 모두가 생활 속의 종교가 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아는 것과 생활 속에 실천이 일치되지 않는 앞뒤 안 맞는 종교생활로 만들어지는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자기가 신앙을 가졌다면 이념적이고 신앙적인 면 못지않게, 현실생활 속에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가르침들을 응용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팔자나 운명론에 떨어지기 보다는 업과 인연법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님 가르침을 그림자처럼 여기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는 노력이 좀 더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불교적 신념이 우리 삶의 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벌어지는 일상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모여 내일을 만들어가는 씨앗들이라는 불교적 가치관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생활불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불교가 되는 지름길은 불교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접근해야합니다. 

일상을 눈만 뜨면 욕구에 노예가 되어 허겁지겁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찌 편안한 심신이 될 것이며 그리살던 사람이 덜컥 죽기라도 한다면 그 영혼은 편안한 영혼이 되겠습니까?

생활 속에 뿌리내린 불교라야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인터넷을 보니깐, 잘나가다가 이제 좀 뜸한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잘못된 만남에 돌을 던질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변-신”의 부적절한 관계는 올해 최대 스캔들로 유명세를 탔고 비난 대상이 됐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50대 남성들의 시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한 글이 있었습니다.


어떤, 50대 중견기업 임원은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쳐 왔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면 뭔가 허전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고, 50대 회사원 A씨는 20, 30대 젊었을 때는 지나가는 여성을 보면 이성을 느꼈지만, 지금은 내 생활과 처지를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자 친구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남성은 중년이 되면서 말이 통하고 영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보살님들은 잘들하고 계시겠지요?


한국의 50대 중년 남성은 인생의 전환기라고 합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고령화로 인해 인생의 막바지를 음미하는 과거의 50대가 아니라 퇴직을 당하고 앞으로 수입 없이 살아가야 할 20~30년을 또다시 고민해야 하는 고민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50대 여성은 젊어서부터 주위 친구들과 네트워킹이 잘돼 있어 자기의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많아 정치와 직장 일만 얘기하는 남성보다 심적ㆍ육체적 변화에 비교적 잘 적응한다고 합니다.

50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부간 대화를 늘리고 서로 이해하는 마음의 출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종교를 갖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같은 취미를 갖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종교를 아무리 갖는다 해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잘 조절해가는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질 못하고 매사를 신의 뜻으로 돌리고 신에게만 의지하면서 신의 종으로 자처하는 삶을 산다면 늘그막에 미래가 안 보이는 뜬 구름으로 사는 거나 같을 것입니다.


기쁘다는 것도, 괴롭다는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가 다 이 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幻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웃기냐면, 먹고 싶은 것 못 먹어도 병이 되고, 먹기 싫은 것 억지로 먹어도 병이 된다고 하니 병 생기는 원인이 음식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에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정신병자의 괴력과 일반인의 힘)


우리 속담에 체면치레 잘하는 양반들은 냉수 마시고도 이쑤시듯, 먹고 싶은 마음 달래주면 먹지 않아도 먹은 듯하고 먹기 싫은 마음 위로해주면 먹어도 탈이 안나니 어리석은 사람은 음식 탓을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듯, 일체가 한 생각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건만, 중생들은 이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생활 속에서 막상경계에 부딪치면 실천하질 못하는데서 우리 주변에는 황혼이혼이니 뭐니 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리석음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미래 생에 또다시 만나 복리 고리로 이자까지 쳐서 서로 원수로 만날 것인데 말입니다.

절대로 이혼할 생각은 말고 어떻게 하면 금생에 저 웬수한테 진 빚을 다 갚을 것인가만 생각하시고 마음 한번 상할 때마다 아이고! 한 가지 빚 갚았다! 하고 후련함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그게 능사는 아닙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하는가?

(풍양 곽씨 마누라 길들이기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업과 인연법과 윤회의 실상을 깨닫게 해주신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려 감사드려야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현대인들의 불치병의 원인은 여섯 가지입니다.

오염된 공기와 오염된 과 오염된 먹거리와 자기 마음을 조절하지 못해서 생기는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수맥과 과거생의 업으로 인해 오는 여섯가지입니다.


옛말에 힘이 센 사람을 장땡이라지만, 힘센 사람도 머리 좋은 사람은 당해낼 수 없고,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해도 돈 많은 사람을 당할 수 없고 돈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명이 긴 사람은 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는 자기가 만들어 자기가 받는다는 것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자기 병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이렇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 지혜로 번뜩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더라도 극락직행을 하는 것이지 살아생전에 주처정토가 되질 못한 영혼들이 어찌 왕생정토를 쉽게 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가꿔가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불하십시오.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목표는 존재한다 




누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하나씩 성취해 가는 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목표가 한 걸음씩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의 소화 능력을 생각하고 밥을 먹어야지,
괜히 주위를 의식하고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가 쉽다.

남들이 밥을 거의 다 먹었다고 해서, 뒤늦게 먹는
내가 씹지 않고 먹다가는 체하거나 배탈만 날 뿐이다.





바쁠수록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행하라.
꾸준히 뛰어야만 마라톤의 결승 테이프를 끊을 수 있다.
결국 목표는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욕심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욕심에 얽매여 자신을 구속하고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눈은 최종 목표에 고정되어 있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미루어 왔던 전화를 걸거나,
감사의 편지를 보내거나,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검색하라.

성급하게 자신을 내몰지 말고,
가볍게 준비운동을 하듯이 마음부터 다잡는 것이 중요하다.





무리한 욕심에 자신을 가두려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꾸준히 실천하라.

그러한 작은 실천 속에서 자신이 미쳐
몰랐던 정보를 만날 수 있고,
그로 인해 다시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인생을 참으로 신나고 멋지게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일들을 끊임없이 시도해 보자.

시도해 보기 전에는 자신이 어느 방면에 재능이 있는지,
혹은 성공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난 이것은 정말 할 수 없어"라고 미리 단정해 버리기 전에,
당신이 그 일에 대하여
진정 목표를 세우고 실행해 보았는지 돌아보라.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다.    ..  


- 윤복만의 [한 번뿐인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혜]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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