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6. 19:5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던 안 믿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더욱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더욱 좋은 곳으로 가꾸어 지도록 하는 목적으로 창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가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려면, 모든 종교의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각자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어떤 종교이든 종교행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은 모든 종교인 자신들의 마음 깊이 새겨진 신앙과 종교적인 신념을 자신에게 날마다 깨우쳐주는 스스로에게 참답게 살아가라는 자기 자신의 외침으로 기도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소망이나 기복,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목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이기적인 행위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수없이 많은 다겁생은 알 수도 없겠지만, 금생만이라도 자신의 세 가지 행위들로 인해 알게 모르게 저질러진 온갖 업을 소멸하고 인과를 보다 부드럽고 가볍게 겪도록 하기 위한 참회의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소망과 기복을 위해서 하게되면 이미 시작부터 삿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질러온 온갖 업을 소멸하고 참회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기도는 첫 단추가 잘 끼워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시작이 있게 되면 자신이 발원하고 소망하는 것들은 자연스레 기도 속에서 성취되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한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큰 것은 보질 못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연연하여 똑 같은 시간에 기도를 해도 삿된 기도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기도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못하고 지혜가 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이제 9월 16일부터 제 3차 업장소멸을 위한 백일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역시나 매월 말일에 당일치기 철야로 자비참법 3천배 기도가 있습니다.
자, 오늘 해드리고자 하는 소참 법문을 재미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일장춘몽” 소위 인간 백년을 산다 한들 삼만 육천오백일에 불과하지만, 철없든 시절, 괴로운 시절, 없이 살던 시절 등등, 힘든 시절을 다 빼버리고 잘 나간 세월을 모아보면 아마도 채 몇 백일도 아니될 것이기에 “ 인생은 한바탕 꿈 ”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한바탕 꿈이라고 깨우치고 있습니다만, 저 삼국유사에 등장하고, 춘원 이광수가 단편소설로 썼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낙산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젊은 승려 조신(調信)이 절세미인인 태수의 딸을 사랑하여 인연을 맺는 것도 결국 법당 안에 관음상 앞에서 향 하나를 사루는 짧은 시간에 조신의 한바탕 꿈 이야기인데, 인생이 한 바탕 꿈이라는 것에 어찌 불교만의 전매특허이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 “나는 아녀!” 하고 앉아있는 우리들의 현 주소일 것입니다.
한국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이 있다면 중국에는 “감단몽”이라는 인생무상을 일러주는 이야기가 있어 오늘은 중국의 감단 땅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감단몽(일명: 한단몽)을 음미하면서, 우리의 인생이 한 바탕 꿈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하고, 촌음을 아껴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생활들 열심히 하시고 인생을 사는데 마음의 위안이 되고 손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 거리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어느 여름 날, 감단 성문 밖, 대로변의 주막 앞 고목나무 그늘 밑 평상에 늙은 한 도사가 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옹(呂翁)이라 불리우는 도사였는데, 여옹은 두건을 벗고, 괴나리봇짐에 기대어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도사 앞을 지나가다 도사가 쉬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한 숨 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도사가 앉은 평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젊은이는 이십대 중반으로서 이름은 노생(盧生)이라 했고,노생은 평상에 앉자마자 혼자서 땅이 꺼지게 탄식하면서 중얼거리기를, “아아,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이렇게 가난에 찌들어 살아야만 한다니…. 여옹은 탄식하며 중얼거리는 노생의 관상을 힐끗 보고는 말하기를, “자네는 튼튼한 몸을 가졌고, 가난하지만 부모를 모시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무엇이 불만인가.“목구멍에 풀칠이야 하지요. 그러나 사나이로 태어난 바에야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해야 하지요. 나아가서는 장군이 되고, 안에 들어와서는 재상(出將入相)이 되어 세상을 풍미하는 영웅호걸이 되어야지요. 가문을 번영의 터전 위에 올려놓아야족할 일이 아닌지요.
저는 뜻을 이루기 위해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배웠으나 뜻을 펴볼 기회는 없고, 나이는 한창인데 아직도 논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니 이렇게 탄식과 푸념이 나오는 겁니다.”
젊은이, 그렇게 농사일은 싫고, 출장입상이 소원이라는 말인가? “ 예, 농삿일은 시시해서 싫습니다. 여옹은 젊은이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음을 짓고 있자, 그 때, 갑자기 노생에게 잠이 몰려왔다. 노생의 눈에 여옹의 웃는 모습이 희미해졌고, 때마침 주막집 주모는 부엌에서 수수떡을 찌고 있었는데, “왜 그러시나? 여옹이 묻자, 노생이 간신이
대답했다. “왜 그런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네요….여옹은 괴나리 봇짐 속에서 청자로 된 퇴침을 꺼내 노생에게 주면서, 졸리우면 늘어지게 한숨 자게나. 내 퇴침을 빌려주겠네.라고 말하고 졸음으로 눕는 노생의 머리에 퇴침으로 받쳐주었습니다.
청자 퇴침은 양쪽에 구멍이 나 있는 퇴침이었는데, 노생의 머리가 퇴침위에 놓이자 서늘한 감촉과 함께 평안해지면서 더 깊은 잠을 불러들이는 것 같았고, 노생이 혼곤한 잠에 들어서는 순간, 주막집 마당에 웬 사람들이 나타나 노생의 이름을 크게 불러 찾았다. 청하(淸河)의 명문인 최(崔)부잣집에서 널리 사위감을 찾는데 요즘 같으면 여론조사에서 노생이 적임자로 선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얼결에 노생은 인도하는 사람들과 최부자집을 찾으니 과연 궁궐 부럽지 않은 대부호였고 금상첨화로서, 노생과 결혼하도록 예정된 무남독녀 외동딸을 보니 절세미인이라, 호박이 넝쿨채 굴러 들어온 격이었는데, 노생은 최부잣집의 간청을 마지 못하는 식으로 받아들여 결혼을 했습니다.
노생은 하루아침에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세상의 행운이라는 ‘대박이 한번 터지면 연이어 터지게 된다는 듯이,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이 쉽게 노생은 결혼 다음 해에 진사 시험에 장원합격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해에 대과에 장원합격을 했겠다. 노생은 처음에는 현위(縣尉)로서 (지금의 군수)협서(陜西) 땅에 부임했는데, 곧이어 감찰어사로 발탁되고, 연이어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어(비서실장) 황제를 가까이 모시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3년 후에는 다시 협서의 자사(刺史)로(도지사) 전출, 곧이어 하남의 협주(陜洲)의 자사를 겸임했겠다.
노생은 대운하를 판다는 이 명박씨처럼 토목공사에 능하여 협주의 서쪽에 80리에 달하는 운하를 파서 새 교통을 열었다.
백성들은 기뻐하면서 공덕비를 세워주었고, 그 후 하남도채방사(河南道採訪使)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서울의 경조윤(京兆尹)의 대임을 맡았다.
그 해에 서북의 변경에 토번(吐藩)의 난이 일어났는데, 토번의 군대가 대거 칩입하여 절도사를 죽이고, 그 땅을 차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노생을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를 삼아 반격을 가하게 했다. 노생은 토번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7천여의 적의 목을 베고, 9백리 밖까지 영토를 넓히는 대승을 거두었다. 노생은 3개의 견고한 성을 축성하여 변방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지방 백성들은 노생을 ‘천하명장이라고 호칭하며 거연산(居延山)에 큰 공덕비를 세워 주었다.
개선장군으로 서울로 입성한 노생은 논공행상결과 이부시랑(吏部侍郞)의 벼슬을 얻고, 곧이어 호부상서(戶部尙書)겸 어사대부(御使大夫)로 승진했다. 그러나 노생의 공적과 인망이 높아짐에 따라서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낀 당시의 재상과 그 일당들의 질투를 받아 잘 나가던 노생은 광동(廣東) 고장의 자사로 좌천되는 비운을 맞보게 되었습니다.
노생은 불운을 탄식하고 울적한 나날을 보내는데, 3년 뒤, 노생을 좌천시킨 재상이 실각하자 황제로부터 소환을 받아 동중서문평장사(同中書門平章事)라는 고위직을 맡게되었고, 곧이어, 오매불망하던 재상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꿈결 같은 10년이 흘렀는데 그동안 노생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모두가 고위관직에 오르고, 하나같이 명문의 며느리를 맞이하여 손자가 열을 넘었고, 가문은 크게 번성했다.
그 후로 노생은 천자를 보필하여 선정을 베풀고, 명재상으로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러나,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오르면 내려가는 법이라듯, 명재상이라고 이름을 떨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누군가, 황제에게 노생을 모함하는 "노생이 황제의 위에 오르려고 변방의 장군과 내통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습니다."하는 익명소(匿名疎)를 올렸다.
노생에게 그토록 정을 베풀었던 황제는 노생이 자신의 자리를 탐내어 모반을 꾀했다는 익명소를 대하자 급변하여 사실여부를 가리려 하지 않고, 대노하여 역적으로 몰아버렸고, 황제는 노생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를 않았다. 노생의 재산은 몰수되고 자녀들은 노비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노생이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포박당하여 목에 칼을 쓴 채, 함거(檻車)에 실려 참수대의 형장으로 끌려가자 전에는 노생에게 공손히 허리굽혀 인사하고 그토록 아첨떨던 사람들은 앞 다퉈 노생의 얼굴에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으며 흙과 돌멩이를 던졌다. (요즘 “화려한 외출”의 주인공인 전 두환씨처럼,)
노생의 이마에는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노생은 함께 목에 망나니의 칼을 맞게 된 아내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여보, 나는… 길을 잘못 들었소. 나에게는 산동(山東)에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과 다섯 마지기의 밭이 있이 있어 분수를 지켜 열심히 일하면, 허기를 면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소.
행복은 마음에 있지 부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제사 깨달았소. 쓸데없이 부귀를 탐하다가 졸지에 형장에서 망나니의 칼에 의해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으니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한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소.
아아, 누더기를 입고서도 농사를 지으면서 처자와 함께 백년해로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을까. 이제 후회해본들 부질없는 일이요. 부인, 이렇게 죽게 해서 정말 미안하오….하며 아내와 마지막 이별의 아픔을 가슴 찌르게 나누고 있었는데, 시퍼런 큰 칼에 술을 내뿜든 망나니가 덩싱덩실 칼 춤을 추는 듯싶더니 카~악! 기합소리와 함께 큰 칼로 노생의 목을 내리쳐버렸다.
그 순간, 노생은 아악! 마지막 비명을 내질렀다. 노생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는데, 한바탕 꿈이었다.
잠에서 깬, 노생은 어찌나 목이 아프던지 손으로 목을 만져보니 마치 칼을 맞은 듯 얼얼한 느낌이었다.
노생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니, 꿈이었잖아! 부엌에서는 주모가 마악, 수수떡을 쪄서 내놓고 있었다. 그런 노생을 바라보던 여옹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떠한가. 아직도 장군이 되고, 재상이 되는 꿈이 좋은가? 노생은 잠시 멍하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 평상 위에 단정히 앉은 여옹에게 큰절을 하고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명예와 치욕, 곤궁과 영달, 성공과 실패, 죽음과 삶, 그것들의 도리를 깨우쳤습니다. 노인께서는 저로 하여금 부질없는 허욕을 버리도록 깨우쳐 주셨습니다.
행복은 분수를 지키는 마음속에 있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교훈을 뼈에 새기면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여옹은 노생의 깨달음에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옹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껄껄 웃으면서,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노생을 뒤로하고 멀어져갔드라. 하는 이야기가 바로 중국의 감단몽이라는 현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노생이나 조신대사처럼 꿈을 꾸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업자득이요 인연과보에 의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스스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업을 맑히며 공덕의 씨를 뿌리며 분에 넘치는 과욕을 자제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와 뜻이 다르다고 내 생각과 틀리다고 불쑥 튀어나오는 무심코 뱉어내는 말들이 그동안 무릎이 닳도록 기도한 내 선근 공덕을 뿌리 채 흔들어 버린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생각생각에 묵언들 하시고 기도하는 내 모습의 변화를 지켜 보시기바랍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요.
살아 있을 때, 잘 살아가는법
업은 태산보다도 크게 지어온 채, 겨우 삼백일기도로 참회가 다 되겠습니까만, 이나마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송대관씬가의 노래 중에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내 가족들에게 잘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고 한번 뿐인 삶을 살아가는 내가 나에게도 잘하고 살아야 합니다.
요즘 방송에서 나오는 웰빙이니, 웰 다잉이니 하는 것은 다 헛소리들만 하는 것입니다.
귀담아 듣지 마세요. 개네들 하는 웰빙은 맛있게 해먹는답시고 맨날 살아있는것 산채로 굽고, 삶아대는 악업만 짓는 짓들만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부처님 세상에서 부처님 식으로 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나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 몸 또한 지금처럼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기에 있을 때 잘하고 살아갑시다.
천수경의 한 구절처럼 “백천만겁이 난조우”라 금생에 이 소중한 몸 받아 나온 우리는 이 몸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아니, 잘 살아가야합니다.
이렇게 살아있을 때, 다겁생을 돌고 돌며 저질러온 온갖 업을 소멸할 수 있는 사람 몸 받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축생은 본능으로 살아가지만 사람은 의식을 가지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겁생을 돌고 돌며 악연을 지어온 인연의 고리를 금생에 이 몸 받았을 때 모두 다 풀어버립시다.
금생에 이 몸 받아 살아있을 때, 어서어서 주변에 갚을건 다 갚고 남들에게 받을게 있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받을게 있다고 남에게 해준 게 있다고 하는 순간에 우리는 또다시 윤회에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응무소주에 이생기심이라” 부모이든 처자식이든 남편이든 오로지 빚 갚을 생각으로 지극하게 처신할 뿐이지 어디에도 생각을 일으켜 집착이나 애착으로 머무름을 갖게 되면 또다시 인연은 끝없이 이어져 다음 생에는 서로 입장이 바뀌어져 만난 채, 과거 생에 서로가 가슴에 못 박았던 악연들이 금생에는 입장만 달라져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어져 상처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이자까지 쳐서 주고받으니 금생에도 원수로 만나게 되고 다음 생에는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생에 사람 몸 받았을 때, 어서어서 지혜롭게 살아가며 남는 장사를 하듯 밀린 빚들 다 갚고 부질없는 집착과 애착들일랑 다 놓아버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내가 나에게 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꾸미고 하는 것이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업을 내 스스로 소멸시켜갈 때가 내가 나에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듯이 삶에 있어서 가장 냉엄한 현실은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받아 들여야 할 엄연한 삶의 진실로 이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만이 진정 삶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고 스스로의 삶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닌 시작과 끝이 있는 일시적인 것이며, 우리는 여기 이승이라는 개똥밭에 영원히 있을 수 없고 잠시 머무르다 갈 뿐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 시간 시간이 아깝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통찰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알아차리며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에는 삶에 대한 통찰이 보다 더 자극적이기에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초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갖게 되는 감정들도 보다 진지해 질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힐 수 있고,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 하고 살아 갈 때, 삶에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금생이라는 여행지에 잠시 여행을 와서는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요 방랑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잠시 여행 왔다가 떠날 우리들이 천년만년을 살아갈 것처럼, 물질에 집착하고 인연에 애착하며 내 종교가 우월하다는 착각 속에서 왜, 죽은 부처를 믿느냐 부활하신 주 예수를 믿어야지 하는 어리석은 망상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떠날 때는 내 것이라는 소유도, 내 가족이라는 애착도 모두 함께 가지 못하고 버리고 떠나갈 우리들이기에 순간순간 시간시간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의식들이 그 무엇에도 머무름이 없이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일으키고 모든 신구의 삼업에 카드빚 갚는다는 생각으로 누군가에게 해주고는 이자 쳐서 받을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무주상의 도리를 깨달으셔야만 대 자유 대 해탈의 경계를 맛보시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자기 전에 기도를 생활화 하십시오.”
1) 임종 전과 잠들기 직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의 한 평생 가운데 제일 중요한 순간이 언제인가?
죽기 직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죽기 직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죽느냐에 따라 내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임종에 다다랐을 때 “다음생에는 참선 정진하며 살아야지!”하는 원력을 강하게 세우면, 그 다음 생까지 그 힘이 그대로 전달되어 일평생 도를 닦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죽기 직전에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외우면 그 사람의 마음이 無量光, 無量한 壽命의 아미타불과 함께 하여 윤회가 없는 극락왕생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강한 원한을 품고 죽으면 한을 품은 떠돌이 귀신이 되거나, 다음 생 전체를 복수를 위하여 소모해 버리는 허망한 일생을 보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바로 지향성이라는 의업의 에너지에 의해 이리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면 자기가 지나온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내생의 행복을 위해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부족했던 점이나 못 다한 것이 있으면 원을 세우고 기도하면서 다음 생을 준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종교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원을 세우면 영혼이 몸을 떠날 때 그 원의 싹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택하여 태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원력이 새로운 삶의 기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럼 하루 중에는 언제가 가장 중요한 시간인가?
잠들기 직전의 5분이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왜 잠들기 직전의 5분이 가장 중요할까요?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안이비설신의라는 여섯가지 의식의 세계에서 활동합니다.
그러다, 잠이 들면 잠재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지극히 고요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데, 우리의 모든 의식적 활동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의 조정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식의 세계를 보다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잘 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자기 5분전부터 아주 나쁜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면, 악몽에 시달리게 되고 깨어나서도 매우 좋지 않은 기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잠들기 5분전에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부르는 기도를 하고 자면 편안한 수면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깨어나서도 곧바로 “관세음보살”을 찾는 맑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잠들기 전에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또렷이 잡고 잠들면 깨어날 때까지 화두가 그대로 살아있게 됩니다.
이리되면 몽중일여가 저절로 성취되게 되는 것입니다.
“잠자기 전의 5분 집중”은 3시간, 5시간, 7시간의 집중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살아가다보면 뜻과 같이 되지 않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안산에서 온 이처사의 다급한 기도수행이야기)
번뇌가 치성할 때도 있고 세속 일에 대한 미련이 솟구칠 때도 있으며, 몸이 공연히 아프거나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릴 때도 있을 것이나,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선의 다급함만을 피해보고자, 우선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지어온 신구의 삼업과 팔만사천가지의 번뇌의 치성마로 지어온 업장을 소멸하는 발원을 먼저하고 참회기도로써 극복하여 불보살님께로, 그리고 불보살의 경지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우리절에서 끝임없이 십악참회기도를 하고 매월 말일에 철야 당일치기로 자비참법을 제가 앞에서 기도하는 동안 제 뒤에서 각자가 자유 정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40대 나이면 종착역에 40km로 달리고 있고 50대는 50km, 60대는 60km의 속도로 가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내 뜻과는 달리 하염없이 가고만 있는 세월 속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위해서, 잘 살아보기 위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지만, 전번 말씀드린 대로 덜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덜 잘못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두가 종교라는 정신세계를 선택하고 그 선택한 정신세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행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유한한 삶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중생인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를 하고 수행자들은 수행을 하고 성직자들은 각자 종교의 교조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요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조계종단의 돌아가는 꼴들이나 아프칸에서 돌아온 인질들의 가족들과 그 교회 성직자들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작태들을 보게 되면 과연 신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 사후 말법시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가서는 당신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표현하기에 입에 담기가 어려워 아! 슬프다. 하시면서 말할 수 없음을 괴롭게 한탄하시며 입을 다물어버리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세존께서 도저히 말로써 해줄 수 없어 입을 다무셨던 시대를 우리는 지금 당사자가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바로 오탁악세입니다.
자신들의 분식집을 차린다는 목적으로 애꿎은 처자들을 돈 몇 푼에 강도질하여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이런 시대가 우리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존께서 그토록 걱정하셨던 오탁악세란 과연 어떤 세상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탁악세란 세상이 끝나가는 말세에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을 말하는데, 인간들이 지식만 늘어나고 지혜가 엷어지면서 온갖 이기심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사회적, 정신적인 탁한 다섯가지 업력이 난무하는 혼돈의 세계를 말합니다.
첫째는 겁탁(劫濁)이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이 악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악성전염병 등으로 한시도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지 못하는 사회악이 범람하는 시대로 기근·질병·전쟁·천재지변 등이 수시로 일어나는 시대를 말합니다.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별의 별 꺼리를 만들어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있고, 아프리카의 수단이라는 나라에서는 같은 나라 안에서 물 부족으로 인한 부족전쟁으로 20만이라는 사람들이 애 어른 남녀 할것 없이 살육되고 있어 엊그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그곳을 갔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듯이 한 곳에서는 물자가 풍부한데, 한 곳에서는 굶어 죽는 기아현상이 생기며, 예전엔 이름도 모르던 무서운 병이 나타나고, 오존층 파괴로 인한 이상기후 현상으로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일어나거나 해일과 홍수가 일어나는 현상을 겁탁이라 부릅니다.
두 번째의 견탁(見濁)은 사악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자들이 선한 탈을 쓰고 온갖 달콤한 말로 내면이 나약한 이들을 꾀어내어 무리를 지어 세력을 얻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힘을 잃어가는 시대로 사악한 견해가 범람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음란물이 태연히 청소년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돌고, 남녀 구별 없이 참된 인간성을 버리는가 하면, 돈을 위해선 어떤 악행과 음행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번뇌탁(煩腦濁)이라 해서 자기만 옳다는 견해에 떨어져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나와 남을 끝없이 고통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자신의 것은 아끼고 남의 것은 탐내는 등, 권세와 명예만을 탐내는 무리들이 우글대는 세상으로 대권을 잡아보겠다고 온갖 짓을 다하는 이 시대 여야의 대권 주자들과 하등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중생탁(衆生濁)으로 사람들의 심성과 자질이 극도로 저하되어 견탁과 번뇌탁에 물들고 길들여져 몸과 마음의 자질이 천박해지고 스스로 천박한 업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연예인을 동경하여 온갖 꾐에 빠져들고 동네에 슈퍼가 신장개업을 해도 옷을 걸친 건지만지 하는 아가씨들이 배꼽 다 들어 내놓고 춤을 추고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 결코 좋은 업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의 다섯 번째는 명탁(命濁)으로 수탁(壽濁)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점점 짧아지고 불의의 사고와 천재지변에 의한 죽음이 많아지는 시대를 말합니다.
수시로 일어나는 대형 교통사고와 비행기 사고 천재지변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오탁악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다섯가지의 혼탁한 세상이 되는 원인과 결과는 이 모두가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업력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알려고 하고 배우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불자들이라면 이 모든 오탁악세의 고통과 번뇌가 다름 아닌 중생들 각자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와 마음의 업 때문에 벌어지는 업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반성하여, 스스로 이 오탁악세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가까운 가족들부터라도 오탁악세를 벗어나는 인연을 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증일아함경 제25권 오왕품(五王品)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 고독원에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APEC회담을 치르는 노무현대통령처럼 파세나디 왕을 비롯한 다섯 나라의 국왕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때 한 왕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는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것에 대해 ‘다섯 가지 욕망(五欲)’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은 다섯 가지 욕망을 사랑하고 서로 갖고 싶어하고 이루고 싶어하며,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 욕망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즐거운 것일까요?”하고 다른 왕들에게 물었습니다.
서로 갑론을박을 하던 왕들은 공감할 수 있는 결론을 찾지 못하자 가까운 곳에 계시는 부처님을 찾아가 여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제왕들의 주장은 때에 따라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대개 사람의 성행(性行)이 빛깔에 깊이 집착하면, 아무리 그것을 보아도 싫증을 내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빛깔이 가장 묘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므로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빛깔에 집착할 때, 그는 소리나 냄새나 맛과 감촉에는 집착하지 않으므로 다섯 가지 즐거움 중에서 빛깔이 가장 즐겁다고 말할 것입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자기 입맛에 맞고 자기의 기호에 따라 평가를 내리게 되듯이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는 성적 욕망이 가장 무섭다거나, 식욕이 가장 무섭다는 식으로 대부분 자기 견해만으로 차별적 대상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생각들마저도 세월에 따라 무상하게 변하고 바꿔져가는 것일 뿐이기에, 증일아함경 25권 오왕품(五王品)에 나오는 이상의 내용에 관해서 부처님께서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평등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이라는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에 대해 어떤 것이건 탐착하게 되면 그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적인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감촉의 욕망이 가장 무서운 것이며, 식욕에 탐착하는 사람에게는 음식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갖가지 욕망의 대상은 대상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탐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은 ‘감각적 욕망은 물질을 탐착하는 행동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가’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욕구가 왕성할 때는 기어코 욕망을 이루고자 하며, 그것을 체험하고 성취한 뒤에는 더욱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없다. 그는 욕망을 이루지만 탐하는 마음을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경계(境界)를 탐착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 그것이 가장 즐겁다고 한다.”고 덧붙이십니다.
욕구를 충족하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욕구를 충족하고자 끄달려 가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감각기관의 욕망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빛깔과 모양을 보고, 그 욕망의 대상을 소유한다고 해서 욕망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감각적 욕망의 실현은 이 같은 욕망을 더욱 부추겨서 끝없이 대상을 향해 질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욕망이 물질을 통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면 대상을 향한 욕구 충족을 위한 인간의 질주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내면적 결핍이므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것은 그 같은 근원인 내면적 결핍을 해소하는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대상을 향한 질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깔에는 빛깔의 맛이 있고, 빛깔로 인한 과실(過失)이 있고, 빛깔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빛깔의 맛에 탐착하고 빛깔의 허물에 속박 당합니다. 그러나 빛깔에는 유혹하는 맛과 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깔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감각적 욕망을 따라 경계에 이끌려 다니면 빛깔은 중생을 속박하는 허물이 되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따라 갖가지 경계로부터 벗어날 때, 그 길은 열반의 저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섯 가지 감각적 욕구로부터 초연해 질 때, 우리는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을 체험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는 사실을 이 경전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바새경의 “업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중생은 괴로운 인연 때문에 신심을 내게 되고 이미 신심을 얻으면 능히 선과 악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세상이 혼미하고 탁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을 정화하고 맑게 하려는 의지로 수행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부처고 예수고 다 거추장스럽고 제 잘난 맛에 살아 가는게 대부분의 중생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일요법회에 참석하여 그동안 알게 모르게 뿌린 신구의 삼업의 씨앗들을 정화하고 맑혀 남은 삶일지라도 밝고 긍정적인 든든한 의업을 지어 일상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오탁악세를 지혜롭게 잘살아가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다섯 가지 감각적 욕구로부터 초연해 질 때, 우리는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을 체험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는 사실을 이 경전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번 피납사태의 주역인 분당의 샘물교회 담임목사인 박은조 목사님의 자기만이 옳다는, 자신의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착각하는 생각이 바로 견탁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견탁으로 인해 인질들과 그동안 온 나라가 번뇌탁과 중생탁과 명탁이 고리를 이은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 나한테 거는 주문 -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걱정하지 말자.
나는 부자가 될 수 있다.
내게 사랑이 찾아오고 있다.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건강하다.
좋은 것만 생각하자.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 주얼 D. 테일러의
|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불교교리·용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 성불합시다.!^^| (0) | 2010.01.27 |
---|---|
임종 전과 잠들기 직전이 가장 중요하다 (0) | 2010.01.27 |
지공 선사의 인과법문 (0) | 2010.01.25 |
양나라 무제의 인연과보 (0) | 2010.01.24 |
법신, 업신, 육신 세가지 몸이 있다 /만공스님 (0) | 201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