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7. 21:2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가장 단순한 명제인 사람은 왜 늙어가고 병들어가며 왜죽는가?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에 대한 너무나 단순한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수행정진을 해서 부처를 이루셨던 싯달타 태자가 사바 세상에 오신 날이자 태어나신 날이지요?
사실 우리는 불교의 사대명절 중에 싯달타 태자가 오신 날을 기뻐하기보다는 부처를 이루신 날을 더욱 기뻐해야합니다.
그리고 출가를 거꾸로 하면 가출이 되듯이 야소다라와 라훌라(오! 장애여,)가 잠든 사이에 정든 집을 떠나는 그 아픈 마음과 온갖 욕구와 갈애로 팔만사천가지의 번뇌에 휩싸여 살아가는 중생들을 가엾게 여기시며 세상의 인연이 다하자, 열반에 드셨던 “열반일”을 서양종교의 사순절만큼 고귀하게 여기는 불교문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절 집안에서는 오늘이 이토록 즐거운 날이지만, 서양종교에서는 엄청 큰 축제로 여기고, 또 그 축제로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대는 부활절에 시골 할머니들이 고스톱 치다가 나눴다는 이야기가 있어 긴장도 푸시고 법문을 편안하게 새겨들으시라고 할머니들이 고스톱 판에서 나눴던 순박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자기 방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화투판을 벌여 속칭 동전 백 원씩 삥을 뜯던 할머니가 한참 끗발이 오르는 순간에 문득 말하기를 (예수가 죽었데야~ 하자, 듣던 다른 할머니가 왜 죽었데야~ 하고 묻자, 또 다른 할머니가 잉~! 나도 들었는데 못에 찔려 죽었데야~~ 하자, 두 번째 할머니가 근데 예수가 뉘기여~! 하고 묻자 방주인 할머니가 말하기를 아마 우리 사돈 영감인가벼~ 며늘아가 공일만 되면 예수님 아부지한테 간다고 아부지! 하고 나가는 걸 본께, 사돈영감이 죽었나벼~)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가 제가 말씀드렸던 근세불교에 도인이셨던 춘성(春城,1891∼1977)이야기를 해드렸지요?
기왕에 부활이야기가 나왔고 죽은 부처 보다 부활하신 예수님 믿으라고 다른 종교인들에게 서슴없이 덤벼드는기독교 맹신자들이 있기에 다시한번 춘성스님의 거침없는 탈속행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장인어른이 뇌진탕으로 의식불명으로 계시다 운명하셨는데, 불자인 그 분이 장인어른 영전에 독경이라도 해드리고 싶어 처남들에게 스님을 청하자고 했더니 처남들이 하는 말이 “부처는 단방이고 예수는 부활인디, 무슨 사십구제고 염불이냐고”생략하자고, 했다며 하도 기가 막히고 처갓집 일이라 손 털었는데 자기 혼자라도 기도를 해드리고 싶은데 어떤 독경이 좋으냐고 묻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기독교인들이 자랑스레 내세우는 부활이얼마나 쉬운가를 춘성스님을 통해서 좀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춘성스님은 한국 선종의 맥을 이은 선승이자. 한평생을 탈속한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무소유의 정신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던 근세 고승으로 스님은 본래 여러 경전에 해박했고 글재주도 뛰어났기에 만공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화두를 받는 과정에서 만공선사는 춘성스님에게 “스님은 문자에 너무 밝으니 화두를 줄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던 분이신데, 스님이 서울역 앞에서 전차를 타셨는데, 그 당시에도 “예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을 써서 들고 다니던 사람들이 스님이 타신 칸에 우르르 몰려 타더니 왠 늙은 중이 앉자 있으니 한 광신자가 스님 앞에 오더니 “죽은 부처를 믿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를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에 갑니다.” 하자 전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춘성스님이 기골이 장대하셨던 분인지라 필시 한 대 패줄 것이라 기대를 하고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춘성스님이 그 말을 한 사람을 올려다보더니, “부활이 뭔데?” 하고 묻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요. 부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지 않소? 예수님을 믿으시오.” 하자 춘성 스님이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더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게 부활이라고?” “그렇소,” 하자 춘성스님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럼 니는 내 좆을 믿어라, 내 좆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예수가 내 좆하고 같으니 니는 내 좆을 믿거라” 하자, 큰 싸움이 날걸로 알고 있던 전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처사님들도 매일 아침마다 부활하실 것이니, 다들 예수님과 동격으로 생각하시고 긍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모독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지나친 맹신자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욕먹는 게 안타까워서 한 말씀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부처들입니다.
다만, 스스로 부처임을 모르고 있기에 그 사실을 알려주고자 8만 4천 가지가 넘는 방대한 법문을 하시고서도 중생들이 문자에 매이고 관념에 떨어지는 어리석은 무지와 무명과 교만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고 문자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가르침을 등불로 삼으라고”“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말씀으로 열반 직전에 8만 사천 법문의 마무리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자등명, 법등명”을 기념 삼아 이렇게 연등불을 밝히는 것이지만, 어두운 밤을 수놓는 등불을 예쁜 등불로 여기고 말면, 달을 가르키면 달은 못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등을 켜는 등불 유래를 살펴보면 “설일체 유부경전”에 부처님 당시 “아사세” 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배고픈 욕구를 자제하며 자신의 박복함을 벗어나고자 부처님 귀가 길을 밝히는 공덕의 등불을 공양한 “춘다(난타)”라는 거지여인의 지극함이 등불공양의 유래가 됐듯이 지금의 여러분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2551년 전, 인도의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에 자비와 지혜의 빛으로 이 사바세계의 만 중생을 구원하고자, 카필라국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왕자로서 이 사바세계에 나투셨고, 태어나시면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르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요, 일체개고 아당안착이라” “하늘과 땅위에 오직 나홀로 존귀하며 일체 중생의 고통이 내게 와서 편안함을 얻으리라”는 사자후를 하셨다고 “장아함”에서 말합니다.
이 말씀은 “부처이신 당신이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 중생인 누구나 깨달음을 성취하면 부처를 이룰 수 있고 부처와 동격이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과 주어진 가능성을 선포하신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나투시어 태자의 모습, 출가의 모습, 깨달은 부처의 모습을 보이시며 유한한 삶속에서 중생의 본능인 욕구를 자제하고 절제하는 수행을 통해 근본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이신 것입니다.
성주괴공, 돌고 도는 생노병사의 대 우주적인 윤회법칙 속에서 중생인 사람 몸은 일회적인 삶일지라도 주인공은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으로 영원한 윤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일러주시고 자기 속에 본래 갖춰진 법신(자성)을 찾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대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인간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좌표로 삼아야할 절대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사의 긴 밤에서 해탈의 밝은 빛을 모른 채 육도윤회만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비로소 인류는 진정한 의미의 생의 값을 알게 되었고 끝없는 윤회와 인과법이라는 우주와 인생의 바른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서구 산업사회와 자연주의적 산물로 경제적인 부의 팽창으로 기독교를 믿으면 잘 살게 되고 부자가 된다고들 합니다.
산이 높으면 골은 깊고 그림자는 더 길듯이 세계의 강대국이라는 미국과 중국이 내 뿜는 이산화탄소와 아황산가스들로 지구 오존층이 파괴되면서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인류의 생활환경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으며 생존의 터전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혹자는 세계는 점점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면서 헷가닥 한 종교인들은 종말론을 들먹이며 휴거를 주장하고 혹세무민하는 세상입니다.
과학과 물질만능주의는 문명의 이기를 주는 대신, 인간사회의 도리를 망각시키고 TV드라마 까지도 퇴폐와 향락과 쾌락 위주로 사람들의 순수 이성을 약화시켜버리고 편리함을 주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우리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서구의 학자들은 21세기는 불교의 사상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구원하게 될 거라는 말들을 많이들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불자들은 과연 이렇게 수승한 불교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페이소스로써 얼마정도의 기복은 다 가지고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자작자수”라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체가 다 마음의 조화요,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아침 뉴스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연일 터져 나오는 사회 각계각층의 사건사고를 접할 때 마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곧 바로 행복이라는 등식이 틀렸다는 것을 이 사회가 점점 증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전번 일요일 아침프로엔 인사동 거리에서 한 젊은이가 “free hugs”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생면부지의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료로 안아드립니다.”하고 서 있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느 고아원에서 신생아들을 대상으로 4주 동안 매주 5일 이상 하루 18분 씩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와 눈 맞춤을 해준 아기들은 그 반대의 실험을 한 아기들보다 생후 6개월이 지나 측정하자 신장과 머리둘레의 성장이 훨씬 빨라졌고, 알츠하이머(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에게 포옹을 자주해주자 불안과 초조, 발성과 보행능력이 개선됐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심지어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들도 자주 안아주자 성장이 빨라졌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렇게,“현대인들은 인간성 회복을 갈망하는 시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본성을 바르게 가꾸는 데서부터 비롯되어야 함을 천명하신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불교인들은 인식하고, 팔정도와 육바라밀의 실천 행으로 내 가족들 부터 부처의 세계에 인도하는 등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의의라 할 것입니다.
이차 인연공덕으로 모든 이들이 성불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대중들에게 자원봉사를 해주시고 대중공양을 내주신 분들을 일일이 밝히지는 못하지만 인연공덕이 한량없기를 축원드리며 모두들 이 분들에게 감사의 박수로 대신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이 기쁜 날에 함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성불하십시요.
남는 장사를 하고 살고 있는가
요, 며칠 동안 혼자 기도하면서 망상이라면 망상이겠지만 기도 중에 혼자서 발심도 하고 지극하고 간절하게 신심을 내다보니 아! 이번 주에는 이 내용을 법문주제로 해야겠구나 싶었고 계속되는 참회기도를 통한 자기 내면의 발견과 일상의 거듭 태어남을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법문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이 꼬이거나 엉키면 맨 처음의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둥, 맨 처음 시작했던 부분을 찾으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즘 모든 종교계가 다 그렇지만, 우리 승가도 첫 출가를 해서 맨 처음 배우게 되는 계초심학인문과 발심수행장과 자경문을 한데 묶은 “초발심자경문”이라는 기본서를 금강경 독송하듯이 매일 아침 독송한다면 승가의 모든 문제만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도 올곧은 수행자로 거듭 자리 매김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며칠 전, 문득 기도하다가 한 생각이 일어나기를 “그래 쌀을 쪄서 밥을 해야지 모래를 쪄서 밥을 하진 말자”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어차피 한 세상 태어나 출가 수행자로 살면서 남는 장사를 하자 싶더란 말입니다.
이리 살다 나 죽으면 울어줄 처자식도 없고 더더구나 요즘 세상에 제사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귀신들이 쌔~버린 세상에 언감생심 끝없는 윤회의 길에 더 늦기 전에 내 갈길 내 스스로 닦자는 한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죽으면 후손들이 망자의 이름으로 법공양도 해 주실 것이고 온갖 공덕을 대신 지어주겠지만, 저는 그 복마저도 없으니 내 갈 길 내가 닦자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을 보면 이런 경책의 글이 있습니다.
“발심 수행장”의 첫 대목에 이르기를
“부제불제불이 장엄적멸궁은 어다겁해에 사욕고행이요,”(夫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欲苦行) 수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적멸궁을 장엄하신 것은 겁의 바다에서 욕심을 버리고 고행을 하신 까닭이며,
“중생 중생이 윤회화댁문은 어 무량 세에 탐욕불사일세.”(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欲不捨)모든 중생들이 불타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저 한량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
“무방 천당에 소왕지자는 삼독번뇌로 위자가재요.”(無防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천당(天堂)에 가는 길을 누가 가로막지도 않건만,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탐진치삼독의 번뇌를 재물로 삼았기 때문이요,
“무유악도에 다왕입자는 사사오욕으로 위망심보니라.”(無誘惡道 多往入者 四蛇五欲 爲妄心寶)유혹하지도 않는 악도에 많은 사람이 가는 것은 사사오욕을 귀하게 여기는 망녕된 마음 때문이라,
“인수불욕에 귀산수도이언만, 이위불진에 애욕소전이라,”(人誰不欲歸山修道 而爲不進 愛欲所纏)누구인들 산에 들어가서 수도하고 싶어하지 않으랴만 그리하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혀있기 때문이라.
“연이불귀산 수수심이런만 수자신력하야 불사선행이어다.”(然而不歸山藪修心 隨自身力 不捨善行) 그러한 인연이 없어 산속에 들어가 마음을 닦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선행은 버리지 말라.
“수유근행에 무지혜자는욕왕동방이향서행이
요.”(雖有勤行 無智慧者는 欲往東方而向西行) 비록 부지런히 행하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려 하면서도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고,
“유지인의 소행은 증미작반이요, 무지인의 소행 증사작반이라.”(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沙作飯) 지혜 있는 사람의 수행은 쌀을 쪄서 밥을 하는 것과 같고 지혜 없는 사람의 수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하는 것과 같다.
“공지끽식이위기장이요, 부지학법이 개치심이라,”(共知喫食而慰飢腸 不知學法而改癡心) 모두가 밥을 먹어서 주린 배는 위로할 줄은 알면서 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은 없애려 하지 않더라.
“행지구비 여거이륜이니 자리이타 여조양익이라.”(行智俱備 如車二輪 自利利他 如鳥兩翼) 수행과 지혜를 갖추는 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며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으리라.
하는 대목이 생각나서 오늘 법문에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좋고 불법이 좋아 이렇게 살아가는 저나 세속에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나, 어차피 한 세상을 살다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여러분들께 묻고 싶은 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오시면서 남는 장사를 하고 살아오셨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남는 장사를 해오셨다면, 쌀을 쪄서 밥을 하신 증미작반이 될 것이고, 고개를 저으신다면 증사작반이라 모래를 쪄서 밥을 하려고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중생은 자기 분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자기 눈높이로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는 습관이 있기에 자기 착각에서 자신은 남는 장사를 했다고 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세속에 명예를 남기고, 그럴듯한 직함을 가져보았고 행세깨나 했다 치더라도 업경대라고 불리우는 스스로의 양심이라는 거울 앞에 발가벗고 서서 자기 죽어서 다음 생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해봐도 거리낌이 없다면 남는 장사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모두가 모래를 쪄서 밥을 하려들다 한 세상 마치고 가는 범부중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법문을 듣는 이 순간부터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도 고구정녕하게 찔러대는데도 못 알아듣고 고개나 돌리고 귓구멍을 막으려 든다면, “무연중생 불제도”라 부처님께서 살아 돌아오신다 해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근래 기도하다가 생긴 망상이 바로 이 망상이었습니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남는 장사를 해보자, 쌀을 쪄서 밥을 하는 증미작반을 하고자 더욱 정진하려고 하는 간절한 신심을 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법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법문을 듣기 전까지는 밑지는 장사인 증사작반이라 모래를 쪄서 밥을 하려들었다 치더라도 이제부터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알려고 해야 하고 알았다면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백년, 삼만 육천 오백 일도 채 다 못살고 갈 지극히 유한하게 주어진 이 짧은 한 생을 어리석게 밑지는 장사로 망치고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난데, 내 맘인데 누가 뭐라고 해! 하는, 제 잘난 중생들이 정작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욕구와 번뇌와 갈등 따위를 자제하거나 절제하거나 해결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시달리면서도 그러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모르는 자기기만이라는 어리석은 치심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게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을 열어 보이신 여래이자 응공이신 부처님의 제자인 우리는 이제부터 발로참회하고 본디 헛된 망상심에서 생겨난 팔만사천의 온갖 번뇌와 욕구와 삼독심을 깨부수고 남은 세월이라도 남는 장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남는 장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남는 장사는 다름아니라 지금 내 살아가는 삶을 되돌아본다면 “금생은 전생 농사의 수자시라” 다겁생래 지어온 온갖 허물과 악연과 인과들이 떠오르던 떠오르지 않던, 알던 모르던, 겸허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내면의 양심이라는 업경대에 끼인 온갖 허물과 인과와 업들을 닦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하면서 이 대목이 나오거들랑 더욱 간절하게 뜻을 새기고 독송해야 합니다.
어떤 대목이냐, “죄무자성 종심기 심약멸시 죄역망 죄망심멸 양구공 시즉명위 진참회라.” “본디 우리의 자성은 청정한지라 청정한 자성 안에는 죄든 업이든 이것들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허나, 중생의 마음 안에는 다겁생래에 익혀온 욕구라는 훈습에 의해 삼독심을 좇아 일어나는 온갖 망상에 따라 우리의 신업과 구업이 하인 노릇을 하면서 저질러온 허망한 환의 업들이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쌓아온 죄라도 일념즉시 무량겁이라 한 생각(一念)에 없어진다는 사실을 바로 천수경의 이 대목이 우리에게 절절히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가 본디 공인 공성(空性) 논리에 입각해 수행하는 지극한 참회수행이 일념이 되면 업경대라는 온갖 때가 낀 마음의 빈 거울을 청정한 자성심의 본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여 쌀을 쪄서 밥을 해야 하는 남는 장사를 하시기 바라며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참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뉘우침이나, 다시는 계율을 어기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참회를 통한 자기 발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전번 법회 시간에 말씀드렸었습니다. 참회는 모든 신행과 수행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모든 선업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참회기도에 대한 법문은 끝맺겠습니다.성불하십시오.
본전치기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신심으로 일상을 살아갈 때, 큰일은 작아지고 작은 일은 소멸되고 피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번 주에는 “증사작반에 증미작반”이라 모래를 쪄서 밥을 하려들지 말고 쌀을 쪄서 밥을 하는 “남는 장사들을 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법문을 했습니다만, 이번 7월 첫 주의 법문은 “본전치기로만 살아가는 삶”이라는 주제로 법문을 열겠습니다.
나름대로 종교들을 가지고 계시고 신앙생활을 하신다는 분들의 말하는 것을 보거나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 세간의 도인들인지라 말들은 부처님, 예수님을 쏘옥 빼닮은 언변들이고 나오는 말마다 법문들이고 무릎 닳아지게 절을 하거나 독경을 하는 것을 보면 지극정성에 목소리들은 낭랑하게 잘들도 하건만, 막상 이해타산이 발등에 떨어지거나, 자기와 생각이 쬐~끔 다르고 눈에 거슬린다 싶으면 그 좋은 입에서 마왕 파순의 종자들이 쓰는 남에 가슴에 바늘을 꼿는 말들이 난무하게 나오고 관세음보살님 닮았던 얼굴은 온데 간데 없어져버리니 이런 삶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삶일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을 살아간다면 이러한 삶이 바로 본전치기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마음의 허구를 드러내놓고 여기서 벗어나 진실로 자기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종의 2조 혜가대사와 초조 달마대사의 관심론에서 나오는 문답을 들려드리면서 그 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제목은 관심론(觀心論)이라 “마음을 보는 법”입니다.
제자 혜가(慧可)가 묻기를, “불도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가 답하기를, “오직 마음을 관(觀)하는 법이 모든 행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다시 혜가가 묻기를 “어째서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거두어들인다 하십니까?” 하자, “마음이란 모든 것(萬法)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예들어, 여기큰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나 잎이나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본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을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도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도한다면 부질없이 헛된 공만 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마음 밖에 따로 구할 도가 있다면 옳지 않은 말이다.” 하자 혜가가 다시 묻기를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하십니까?” 달마가 재차 “보살이 반야 바라밀다를 행할 때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밝게 하며, 또 자기 마음을 쓰는 데 두 가지 차별이 있음을 분명히 본다.
두 가지란 맑은 마음(淨心)과 물든 마음(染心)이다.
맑은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진여(眞如)의 마음이요, 물든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無明)의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은 본래부터 갖추어 있어 비록 인연 따라 화합하기는 하지만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맑은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을 즐기고, 물든 마음은 악한 업을 생각한다.
만약 진여의 마음을 깨쳐 그것이 물들거나 때 묻지 않는 것인 줄 깨달으면 이 사람은 성인이다.
그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물든 마음을 따라 악한 짓을 하면 온갖 괴로움과 어둠이 몸에 감기고 덮이게 되니 이를 범부라 한다.
범부는 항상 삼계(三界)에 빠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으니, 그것은 물든 마음으로 말미암아 진여의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십지경(十地經)에 말하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석처럼 굳은 불성(佛性)이 있어 해와 같이 밝고 원만하며 광대무변하지만, 오온(五蘊)의 검은 구름에 덮여 마치 항아리 속에 있는 불빛이 밖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고, 또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나 무명에 덮여서 해탈을 얻지 못 한다”고 하였다.
“불성이란 깨침이다.” 스스로 깨치고 깨친 지혜가 밝아 번뇌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善)은 깨침이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이 깨침이 근본이 되어 모든 공덕의 나무가 무성하고 열반의 열매가 여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마음을 관하는 것을 마음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혜가가 묻기를, “진여 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은 깨침이 근본이 된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명인 마음과 온갖 악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달마대사가 답하기를 “무명인 마음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와 정욕이 있어 악한 것들이 한량없으나 그 모두는 삼독(三毒)이 근본이다.
삼독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 삼독심에는 저절로 모든 악한 것이 갖추어져 있다.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나 가지는 수없이 많은 것처럼, 삼독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한량없이 많은 악업이 있어 무엇으로 비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삼독은 본체에서는 하나이나 저절로 삼독이 되어 이것이 육근(六根)에 작용하면 육적(六賊)이 된다. 육적은 곧 육식(六識)이다. 육식이 육근을 드나들며 온갖 대상에 탐착심을 일으키므로 악업을 지어 진여를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육적이라 이름한다.
중생들은 이 삼독과 육적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생사의 구렁에 빠져 육도(六途)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물이 원래 조그마한 샘물에서 시작하여 끊이지 않고 흐르면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는 만경창파를 이루게 되나, 어떤 사람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 된다.
이와 같이 해탈을 구하는 사람도 삼독을 돌이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이루고, 육적을 돌이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이루면 저절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혜가가 다시 묻기를 “삼독과 육적이 광대무변한데 마음만을 보고 어떻게 한없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삼계에 태어남은 오로지 마음으로 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에 있으면서도 곧 삼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삼계라는 것은 곧 삼독이다.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가 되고,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가 되며,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가 된다. 삼독심이 갖가지 악을 짓고 맺어 업을 이루고 육도에 윤회하게 되니 이것을 삼계라 한다. 또 삼독이 짓는 무겁고 가벼운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것도 같지 않아 여섯 곳으로 나뉘게 되니 이것을 육
도라 한다.
그러나 “악업은 오로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거둬 그릇되고 악한 것을 버리면 삼악도와 육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은 저절로 소멸되고,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고 말했다.
혜가가 또 묻기를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는 삼아승지겁(阿僧祗劫)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었다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오직 삼독을 제하면 곧 해탈이라 하십니까?” 하자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다. 아승지는 곧 삼독심이다.
아승지는 셀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 가운데에는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이 있고 그 낱낱 생각 가운데 다 일 겁씩 있으니, 삼독의 악한 생각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으므로 셀 수 없다고 말한다.
범부는 진여의 성품이 삼독에 덮였으니,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에서 뛰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탈이라 할 수 있겠느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만 제거해 버리면 이것이 곧 삼아승지 겁을 지낸 것이다.
말세 중생이 어리석고 둔하여 부처님의 깊고 묘한 삼아승지 겁이라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한량없는 겁을 지내야만 성불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어찌 말세에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잘못 알고 의심을 내어 보리도(菩提道)에서 물러나게 함이 아니겠느냐.”
혜가대사가 다시 묻기를 “보살이 삼취정계를 가지고 또한 육바라밀을 행하여야 불도를 이룬다 하셨는데, 수행자가 오직 마음만 관하고 계행(戒行)을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가 이에 답하기를 “삼취정계란 곧 삼독심을 다스리는 것이니, 일독을 제하면 무량한 선(善)이 이루어진다.
취(聚)란 모았다, 모여있다 라는 뜻인데 삼독을 다스리면 곧 세 가지 한량없는 선을 이루게 된다.
널리 선을 마음에 모았으므로 삼취정계라 한다.
또 육바라밀이란 곧 육근을 맑게 하는 것이니 바라밀이란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뜻이다. 육근(六根)이 청정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곧 번뇌에서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되므로 육바라밀이라 한다.”
혜가가 또 묻기를 “경에 말씀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한다고 하셨으니 이 묘문(妙門)으로 성불할 것인데 어째서 마음을 관하여 해탈을 구하라 하십니까?” 하자,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염불하는 자는 반드시 정념(正念)을 닦아야 한다.
참된 뜻을 분명히 알면 정(正)이 되고, 참된 뜻에 분명하지 못하면 사(邪)가 되는 것이니, 정념은 반드시 서방정토를 얻지만 사념(邪念)으로는 피안에 이를 수 없다.
‘불이란 깨쳤다는 뜻이니’ 몸과 마음을 살펴 악한 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염(念)이란 생각하는 것이니 계행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잊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정념이다.
그러므로 염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기를 그물로 잡지만 잡고 나서는 그물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말에 의지하여 뜻을 알지만 뜻을 알았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염불의 실체를 행해야 한다. 염불한다 하면서 진실한 뜻을 모르고 입으로만 공연히 부처님 명호를 외운다면 헛된 공만 들이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외운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은 말과 뜻이 다르다.
외운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깨달아 행하는 문임을 알아야 한다. 외우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니 곧 음성의 모양이다.
마음에 없이 입으로만 명호를 외운다면 그것은 모양에 집착하여 복을 구하는 것이니 그릇된 짓이다.”
달마스님이 말하기를,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기를 ‘무릇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또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사물이나 형체는 진실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모든 성인들이 닦으신 공덕을 말씀을 하실 때는 한결같이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음을 강조했다. 마음은 모든 성인의 근원이며 일만가지 악의 주인이다. 열반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에서 오는 것이요, 삼계 윤회의 고통도 또한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곧 세간을 뛰어나는 문이고 해탈로 나아가는 나루터이다. 문을 알면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고, 나루터를 알면 저 기슭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가만히 살피건대,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것이 얕아 겉모양만으로 공덕을 삼으려 한다.
힘써 공을 들여 작기도 손해보고 남도 또한 미혹하게 하며, 이러고서도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하니 어느 때에나 깨칠 것인가. 세간의 덧없는 유위법(有爲法)을 보고는 애써 애착하고, 상(相)이 없는 천진 면목을 말하면 아득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세간의 조그마한 즐거움을 탐착하고 다가올 큰 괴로움은 깨닫지 못한다.
이와 같이 공부해서는 헛되이 스스로를 피로하게 할 뿐 도무지 이익이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을 잘 거두어 안으로 돌이켜 깨치면 보는 것이 항상 맑아, 삼독심은 끊어져 사라지고 육적이 드나들 문은 닫혀 침범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때 비로소 한량없는 공덕의 갖가지 장엄과 무량 법문을 낱낱이 다 성취하여 순식간에 범부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깨침은 잠깐 사이에 있는 것인데 어찌 머리가 희기를 기다리랴. 참된 법문의 심오한 뜻을 어찌 갖추어 말할 수 있으랴. 여기서는 마음관하는 것만을 말하여 나머지 세밀한 일을 짐작케 하려는 것이다.” 하고 달마대사는 끝을 맺습니다.
이처럼 삼계가 다 마음 안에 존재하고 내 마음 안에서 내 생각 따라 일체의 시비와 선악과 분별로 인한 희노애락을 내가 만들어 가지는 것이고 일상은 거기에 매여 울고 웃고 괴롭고 슬프고 스스로 죽기도하고 다시 의욕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은 바로 순간순간 일어났다 꺼지는 일상의 내 생각임을 깨달으시고 항상 자기자신 스스로 자기생각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世界名勝(亞洲篇)
中國:萬里長城 의 雪景
中國:三亞亞龍灣 비치
台灣 : 池上水稻田
印度:藍孔雀
古利西亞人 __壁石棺
눈으로 보기엔 화려 하지 않지만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박한 명승지 였습니다.
-초 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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